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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

My name is KIM Bok-dong

2019 한국 12세이상관람가

다큐멘터리 상영시간 : 101분

개봉일 : 2019-08-08 누적관객 : 87,163명

감독 : 송원근

출연 : 김복동(본인) 한지민(내레이션) more

  • 씨네216.67
“나이는 구십넷, 이름은 김복동입니다"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한 김복동 할머니의 27년 간의 기나긴 여정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될 희망을 위한 싸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희망을 잡고 살자.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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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22)


전문가 별점 (3명참여)

  • 6
    박평식편히 쉬세요, 그놈은 저희가 잡으렵니다
  • 7
    장영엽잊지 말고, 물러서지 않아야 하는 이유
  • 7
    김소희싸우는 사람, 김복동. 그의 삶에 보내는 존경과 다짐
제작 노트
About Movie 1

모두가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영화 ‘김복동’은 여성인권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였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92년부터 올해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투쟁했던 27년 간의 여정을 담은 감동 다큐멘터리이다. 영화는 9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에도 전 세계를 돌며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를 요구한 김복동 할머니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희망을 가지고 싸워온 김복동 할머니가 되찾고 싶었던 삶, 전 세계에 세우겠다던 소녀상의 의미, 그리고 ‘나는 희망을 잡고 산다, 희망을 잡고 살자’며 후세에 희망의 씨앗을 뿌린 발자취는 진한 울림과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특히 여전히 사죄하지 않는 아베 정부, 일본군 ‘위안부’는 역사 날조라고 주장하는 일본, 그리고 피해자는 배제한 채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선언한 박근혜 정부에 맞선 김복동 할머니의 위대한 행보는 우리 모두의 결의를 다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불의에 대항하는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와 외침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한 우리들에게 반성을 이끌고 동참과 연대의 움직임을 일으킨다.

영화 ‘김복동’은 ‘자백’, ‘공범자들’에 이은 뉴스타파의 3번째 작품으로 송원근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한지민이 내레이션으로 참여했다. 또한 국내 최고 실력파 아티스트인 윤미래가 영화 주제곡 ‘꽃’을 불렀고 주제곡의 작사와 작곡은 혼성 듀오로 활동하는 로코베리(로코, 코난)가 맡았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아 시네마스케이프 부문에 초청받아 주목할 만한 다큐멘터리로 꼽히고, 매진 사례를 이루며 상영돼 많은 화제를 모았다.

개봉에 앞서 영화 ‘김복동’을 더 빨리 만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응원하기 위해 마련된 크라우드펀딩은 오픈 이틀 만에 목표 금액 1천만 원을 100% 달성하여 영화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증명했다. 특히 정우성, 김의성, 박호산, 정준, 공정환, 곽민석 배우와 변영주 감독, 노혜경 시인, 임현주 아나운서 등 셀럽들이 자발적인 SNS 릴레이 캠페인에 앞장섰다. 이와 함께 본인이 몇 번째 후원자라는 SNS 인증 릴레이도 함께 이어져 바로 지금 우리 모두가 봐야 하는 영화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About Movie 2

모두가 봐야만 하는 이유

영화 ‘김복동’은 시의성 있는 주제와 현재 진행형 사건이라는 점에서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하는 이야기이자 지금 모두가 봐야 하는 영화로서 의의를 갖는다.

#나이는 구십넷, 이름은 ‘김복동’
김복동 할머니는 암 투병 중이던 2018년 9월, 외교부 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즉각 해산’을 위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생전에도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해 전 재산을 모아 장학금을 만들어 미래를 이끌어 갈 후세들을 생각했다. 영화는 단순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 여성운동가, 평화인권운동가로서 활동했던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조명하면서 우리 사회에 용기, 정의, 민족애,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한다.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이사장은 "영화 ‘김복동’은 한국 사회뿐 아니라 세계 여성인권운동사와 평화운동사에도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가 영화를 보시면 “김복동 열심히 살았다”라고 말씀하실 것 같다"고 전했다.

#생존자 21명, 끝까지 기억하고 싸웁시다!
영화 ‘김복동’은 일본 정부가 펼친 뻔뻔한 주장과 박근혜 정부 시절 졸속 처리된 '한일 위안부 합의'가 얼마나 할머니들과 많은 국민들에게 상처를 입혔는지를 보여준다. 최근 박근혜 정부와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거론하며 경제보복을 감행하고 있는 아베 총리의 만행이 국제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일본 정부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린 김복동 할머니의 행보가 얼마나 위대하고 의미 있는 일인지를 다시금 되새긴다. 여전히 사죄하지 않고 오히려 종군위안부는 역사 날조라고 주장하는 일본에 맞선 현재 진행형의 끝나지 않은 싸움 속에서 2019년 7월 18일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1명뿐이다. 끝까지 싸워달라던 김복동 할머니의 당부처럼 영화는 끝까지 기억하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다짐을 이끌어낸다.

#평화의 소녀상, 전 세계에 세우자!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세워졌다. 김운성, 김서경 작가의 작품으로 일본군이 성노예로 끌려갔던 당시 십대 소녀가 빼앗긴 꿈과 20년 세월 같은 자리에 앉아 일본대사관을 바라봤던 피해자들의 아픔, 명예와 인권회복, 그리고 평화 지향의 마음을 형상화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평화의 소녀상을 일본이 사죄할 때까지 전 세계에 세우겠다고 선포했고, 해외에는 미국 글렌데일시에 처음으로 세워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의미를 전 세계인에게 알리고 있다. 그러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공관의 안녕과 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소녀상 철거를 합의했다. 부산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은 설치 4시간 만에 철거됐지만 시민들의 반발에 3일 뒤 다시 다시 제막식을 열었다. 현재 대한민국 전국에는 총 112개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고, 그 중 단 32개만이 공공조형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About Movie 3

상영 수익 전액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위해 사용

영화 ‘김복동’의 상영 수익은 전액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활동에 사용된다. 상영 수익의 절반은 정의기억연대에 기부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 사업에 사용되고 절반은 뉴스타파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자료 아카이브 구축 사업에 사용된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는 상영 수익을 ‘나와 같은 피해자는 없어야 한다’는 김복동 할머니의 뜻에 따라 2020년 개관을 목표로 추진중인 우간다 김복동 센터 건립을 비롯하여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과 전시성폭력 재발방지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사용할 계획이다. 정의기억연대는 1992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한 김복동 할머니의 육성 파일을 비롯해 미디어몽구와 함께 할머니들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기록하고 보존해 왔으며 이번 영화 ‘김복동’의 기획에도 참여했다.

뉴스타파는 영화 ‘김복동’ 제작 과정에서 입수한 4백기가 분량의 파일과 6mm 테이프 40개 분량의 영상자료를 아카이브로 구축해 일본군 성노예 피해 사실이 후대에도 잊혀지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또한 일본군 성노예 피해 당사자의 뜻과 다르게 왜곡되거나 지난 2015년 한일 정부간 위안부 합의 같은 역사적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누구나 쉽게 검색해서 볼 수 있도록 정의기억연대와 협의해 시민들에게 정보를 공개할 예정이다.

영화 ‘김복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아직 현재 진행 중인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싸움에 동참하고 지지할 수 있다.



Interview. 한지민

Q 영화 ‘김복동’의 내레이션 참여의 이유
‘허스토리’, ‘아이 캔 스피크’에서도 그랬고 영화라는 매체로 대중들에게 조금이나마, 특히 젊은 친구들한테는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해 반갑기도 했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한을 다 풀고 돌아가신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함께 할 수 있다면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하게 됐다.

Q 2017년 김복동 할머니를 뵀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지
김복동 할머니께서 길원옥 할머니에 비해 훨씬 강단 있으셨다. 거동이 불편하신 길원옥 할머니를 부축하느라 김복동 할머니의 손을 더 많이 잡아드리지 못해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다.

Q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관련된 활동이나 영화에도 참여하게 된 계기나 이유는
특정한 계기라기보다는 배우라는 타이틀이 갖고 있는 힘을 많은 대중 분들이나 아직까지는 관심이 미치지 못한 분들에게 좀 더 영향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믿는다. 2007년에 [경성스캔들]에 출연했을 데, 팬 분들이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기부를 시작했다. 팬 분들의 행동을 보고 함께 동참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관한 영화나 행사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져서 당연히 그 힘을 실어드리고자 했다.

Q 어떤 마음으로 내레이션을 하셨는지
할머니들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일부러 화면을 잘 보지 않았다. 최대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을 조금은 담담하고 담백하게 전하고 싶었고, 때로는 할머니께 마음이 잘 전달됐으면 하는 진심을 갖고 하려고 노력했다. 항상 관심을 갖고 같이 목소리를 내야지 하다가도 일상 생활을 하게 되면 때로는 잊기도 하고 또 할머니께서 많은 시위를 하셨었지만 인권운동가로서의 활동까지도 목소리를 내셨다는 걸 미처 몰랐었던 것이 죄송스럽고 부끄럽기도 했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젊은 친구들이 이어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Q. 인상적인 장면 또는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는지
할머니의 생활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차별 받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어렵게 모으신 전 재산을 기부하시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인상적이기보다 화가 나는 장면이 너무 많았다. ‘나는 용서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라는 대사처럼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를 바라시는 걸.. 그게 가슴이 아팠다.

Q 영화 ‘김복동’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는지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 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한 번 보고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가 아니라 정말 할머니가 그 동안 걸어오신 길과 길 위에서 외치셨던 그 모든 말들을 우리가, 그리고 또 우리 다음 세대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Interview. 윤미래

Q ‘김복동’ 헌정곡 제작을 제안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고, 어떤 마음으로 수락하였는지
처음 제안 받았을 때는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다. 짧지만 영화를 보고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Q ‘김복동’을 본 소감은
정말 굉장히 화가 났다. 평소 알고 있는 사실들이라 생각하고 영화를 봤는데, 보는 내내 장면 하나 하나가 너무 화가 나게 만들었다.

Q 김복동 할머니가 전쟁 이후 한국에 돌아와 세상의 편견이 두려워 가족에게 조차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이야기 하지 못한 대목이 있다. 음악을 통해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 사회의 편견에 대해 남다른 시각이 있을 것 같은데,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김복동’을 보고 이러한 부분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한국 사회의 편견이라기보단 편견이라는 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병과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이 병에 걸리면 그 후유증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는 거다. 저는 다행히 음악이라는 탈출구를 찾아서 표현하고 또 다행히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편견은 영혼을 말려버리고 결국 마음을 약하고 악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 부분에서 어쩌면 이 영화가 저에겐 더 강한 교감을 불러일으켜준 것 같다.

Q 어떤 마음으로 헌정곡을 만들었는지
제 음악을 통해서라도 조금이라도 이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열심히 불렀다. 조리 있게 말을 잘하거나 활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편이 아니라, 그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음악으로 밖에 표현 못해서 이렇게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여러분, 영화 보러 많이 찾아와주세요~



Director’s Note

‘김복동’ 작업의 시작.. 남은 생애 3개월
2018년 10월 22일
종로에서 미디어몽구님을 만나 김복동 할머니의 현재 상황과 앞으로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병원에서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다고 한다. 정의연에서도 할머니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어떤 방식으로든 할머니의 활동을 기릴 수 있는 작업이 이뤄졌으면 바란다고 한다.

2018년 11월 12일
김복동 할머니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을지 관련 서적을 찾았다. 신문기사 등으로는 삶을 전체적으로 살필 수 없어서 책을 찾았다. 김숨 작가가 쓴 김복동 자전적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를 읽었다. 현대사의 전쟁 성폭력 피해자의 삶을 증언을 바탕으로 소설 형식으로 엮은 책이다. 삶을 종합적으로 보려면, 할머니에 관한 최대한 많은 기록이 필요했다. 정의기억연대가 보관중인 할머니 관련 자료가 무척 방대했다. 별것 아닌 것이라도 다큐 제작에는 큰 의미가 되어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김복동 할머니가 담긴 것은 무엇이든 모았다.

2018년 11월 19일
윤미향 대표에게서 테이프, 사진, 파일. 핸드폰 영상 등 김복동 할머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을 모으고 있다고 연락을 받았다. 할머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 마음이 급하다. 생전에 작업을 끝낼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생애를 통찰해 정리하는 일을?

2018년 11월 21일
며칠 전 할머니가 혈뇨, 혈변을 보게 되어서 급하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왔다. 의료진은 상태를 지켜보고 할머니의 퇴원을 결정했다고 한다. 할머니께서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신다. 식사를 제대로 못 하시는 상황이다. 앞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는 것도 힘들어질 거라고 한다.
오전에 화해치유재단 해산 선언을 여성가족부 명의로 발표했다. 공식 기자회견은 없고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할머니는 이 말을 듣고 ‘말로만 하는 해산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재단을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지난 여름 수술한 지 얼마 안 되는 비 오는 날 오후 외교부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할머니의 바람이 이뤄진 것일까?

2018년 11월 22일
할머니께서 퇴원하셨다.

2018년 11월 23일
할머니께 인사 드리러 평화의 우리집에 들렀다. 퇴원하며 병원에서 의료용 침상이 함께 들어왔는데, 할머니가 이 침대가 불편해 짜증을 내신다고 한다. 할머니께서 주무시고 계시는 방에 함부로 들어가기 죄송스러워 방 밖에서 마음으로 인사 드렸다. 깨어있을 때 뵙고 싶다.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작년에 복동 할매가 정정할 때는 감이 방에서 감이 열리는 모습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셨을 것이다. 알 수는 없지만 상념에 잠기기도 하셨을 것이다. 지금 할머니는 저 감나무에 감이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지도 못하고 병마와 싸움을 하느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할머니의 평범한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항상 누워 인상을 쓰며 고투하는 모습이다. 이번에 퇴원하면서 병원 측으로부터 받은 입퇴원 확인서에는 할머니의 병명이 세 개 정도 더 늘었다. 치매까지 얻었다고 한다. 할머니와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2018년 11월 28일
오전 10시 김복동 할머니가 일본 조선학교에 장학금 5천만 원 전달식을 가졌다. 할머니에게 남은 전 재산이라고 한다. 평화의 우리집 2층 할머니 방에 올라갔다. 할머니가 머리를 단정히 하고, 따뜻한 스웨터를 입은 채 꼿꼿이 앉아 계셨다. 항상 누워계시며 고통스러워하던 모습만 보다가 할머니께서 앉아계시는 모습을 보니 새로웠다. 이렇게 다시 할머니가 일어나 활동하시고, 인터뷰도 진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학금을 전달한 할머니에게 ‘지금 마음이 어떤지’를 물었다. 할머니는 잠시 생각했다. 간밤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앉아있는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나를 잘 받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왔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라며 모두 나처럼 희망을 잡고 살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곁에 있던 정의기억연대 활동가들은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훌쩍거렸다.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꼭 꿈속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에서 이런 말들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희망을 잡고 산다는 말이 오래 되뇌어진다. 할머니는 희망을 ‘붙잡고’ 살았을 것이다. ‘부여잡고’ 살았을 것이다. 어딘가에 희망이 있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오셨을 것이다.

2018년 11월 30일
정의기억연대로부터 김복동 할머니에 관한 자료를 넘겨받았다. 1테라 바이트 외장하드 속에 400기가 가량의 파일과 6mm테입 40권이다. 일단 6mm테입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는 작업부터 외부에 의뢰했다. HD로 촬영된 파일이 아니어서 화질이 어떨지 조금 걱정이다.
넘겨받은 자료들은 대부분이 수요집회로 김복동으로 검색된 모든 파일과 포털에서 김복동으로 검색해 김복동 할머니 이름이 들어간 기사의 날짜를 찾아 정의연의 서버에서 할머니 영상의 존재유무를 파악해 파일들을 찾아낸 것이다.

2018년 12월 4일
할머니의 병원 진료가 예정돼 있어 미디어몽구님과 함께 동행 취재하려고 계획했었다. 아침에 할머니 병세가 갑자기 나빠져 병원에 가지 못할 정도가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할머니의 병세는 지금 어느 정도일까? 살아생전에 할머니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 걱정이 크다.
나는 할머니의 마음을 느끼고 싶다.
“비가 그쳤지만 구름이 걷히지 않은 하늘은 기분 나쁘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찌꺼기들이 세상에 흩어져 있다. 없앨 수 없다. 오늘따라 몸을 움직이기 힘들다. 간호사가 찾아왔다. 다시 병원에 갔다가 내발로 되돌아올 수 있을까? 손끝에 피가 채 닿지 않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발끝에도 피가 채 닿지 않는다. 내 몸은 그렇게 점점 차가워져 가고 있다. 오랫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다. 씹을 수가 없다. 소화도 안 된다. 내 몸이 슬금슬금 제 일을 하지 않고 있다. 곪아가고 있다”
할머니의 오늘 마음은 이렇지 않았을까? 혼자 할머니의 오늘 마음을 상상해봤다.

2018년 12월 21일
기획안을 완성했다. 그냥 기획안을 쓰는데도 한 번씩 눈물이 맺혔다. 이런 느낌을 잘 전달하는 다큐를 만들어야 한다. 이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이야기로.
김복동이라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돌아보되,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김복동의 활동과 고뇌를 되짚는 다큐멘터리로 기획했다. 개인의 삶에 한정해 일상만 보여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보는 이들에게 이 다큐를 보는 의미를 다큐 스스로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김복동의 활동을 주요 기점에 맞춰 설명하는 방식의 서사 구조를 가져갈 예정이다. 사실에 입각해 감정을 짜내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던지면 판단은 보는 이들이 하도록 한다. 1992년부터 2018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김복동의 행적을 되짚는 다큐다. 일본의 반응, 우리정부의 대응, 국제사회, 미국의 대응, UN의 목소리들을 하나의 타임라인에 올렸더니 김복동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보였다. 그 흐름을 총체적으로 살폈다. 정점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다. 합의 이후 할머니의 무너진 삶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것도 필요하다.
할머니 곁의 인물들의 성격도 정리했다. 윤미향 대표는 할머니의 인생적 정무적 동반자다. 손영미 평화의 우리집 소장은 할머니의 삶의 구석구석을 면밀히 꿰고 있는 인물이다. 개인적인 추억들도 많다. 한복, 습관, 가족, 식사 등 할머니의 생활 깊숙한 곳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김동희 관장은 할머니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 전쟁터로 끌려가던 시절부터 살아 돌아온 기록들을 잘 알고 있다. 2010년 서울로 돌아와 둘만의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2019년 1월 21일
교토에 있는 교토조선중고급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 중 김복동 장학금을 받는 4명의 학생에 대한 취재를 위해 학교 측에 촬영 협조를 요청했다. 학교는 고심 끝에 김복동 할머니의 활동에 관한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허가를 내려줬다. 지난해 6월 도쿄에서 장학금을 전달받은 학생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이 세 명, 1학년이 한 명이라고 한다. 1학년 학생이 독감에 걸려 부득이 촬영에 협조하지 못하게 됐다.
학교는 교토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의 산속에 학교가 있다고 해도 무방했고, 학교 자체도 굉장히 오래돼 보였다. 지난 여름 장마에 뒷산에 산사태가 나서 학교 뒤편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예산이 없으니 쓸려 내려온 흙들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나는 김복동이 이 학생들을 만나 눈물짓던 지난해 6월 장학금 전달식을 보고 김복동이 대체 이 학생들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문득 드는 생각으로는 끌려가던 시절 자신의 모습과 이 학생들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렇게 눈물지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당신의 잃어버린 시절이 살아 돌아온 듯한 느낌.. 그 느낌을 김복동이 받은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그 짐작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오후 2시에 학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 학교를 찾았다. 장학금 전달식에서 만났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 학생들에게 우리가 이 자리에 취재를 온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할머니가 눈물지으며 힘내라고 당부하던 모습과 얼마 전 자신의 전 재산을 조선학교를 위해 사용해달라고 기부하던 모습을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인터뷰를 하기 전에 내가 이 학교에 너희들을 만나러 온 이유를 설명해야 아이들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학생들은 감색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16살, 17살의 학생들이었다. 할머니가 여러분들을 보고 운 이유에 대해 ‘이상하게 그 애들을 보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전하는 순간. 오히려 그 말을 하는 내 눈에서 눈물이 터졌다. 할머니가 왜 눈물이 그냥 흘렀는지 직접 그 모습을 확인하니 굳이 무엇을 어떻게 봤는지 설명되지 않았다. 그저 김복동이 이 학생들을 직접 봤을 때 느껴지는 가슴 속 깊은 데에서 올라오는 뜨거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지난 십 수년을 냉정하게 일해왔는데 그런 모습을 보여 학생들에게 미안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김복동이 찾고 싶었던 순간.. 적어도 이 조선학교 학생들을 보면서 김복동의 잃어버린 시절을 이 다큐를 통해 되찾아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내가 느낀 이 느낌을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19년 1월 25일
일본 취재를 다녀온 후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더 강렬해진 느낌이다. 정의기억연대에 가서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영화 제작으로 전환하겠다고 설명 드렸다. 미디어몽구님도 잘 된 결정이라고 얘기해줬다. 잘 만들어서 전 세계 사람들이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더욱 되새기게 되길 바란다고도 말했다. 오늘 병원에서는 의사가 마지막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생이 끝나가고 있다.

2019년 2월 11일
2015 한일 합의가 체결된 후 할머니는 바다가 보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한다. 바다가 보고 싶다는 할머니의 바람을 이루고자 정대협 활동가들은 할머니를 모시고 강원도 속초로 향한다. 91번 째 생일을 속초바닷가에서 맞이했다. 지난 수년간을 온몸이 부서져라 돌아다니며 일본정부의 사죄와 반성, 법적 배상을 요구하던 순간들이 회한으로 다가왔다. 부서질 듯 위태롭고, 깨지고 사그라들어 버릴 듯한 지난 시간들.. 할머니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위로했을까?

2019년 3월 12일
1948년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김복동에게 바다는 살아 돌아왔다는 기쁨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과 함께 다시 부산에 돌아온 후 남편과 함께 부산 다대포 바다에서 생활한다. 부산 다대포는 낙동강 하구에 자리하고 있다. 모래가 많고, 바람이 무척 거세다. 낭만보다는 대상이 씻길 듯한 강렬함이 인상적이었다. 김복동이 다대포 생활 시절 운영한 구멍가게 자리를 찾았다. 그 자리에는 이제 발전소가 들어섰고, 왕복 6차선 도로가 들어와있다. 김복동이 생활했다고 얘기하는 그 자리에서 50년 전, 40년 전 김복동이 맞았을 바람을 맞아보았다. 한가하게 추억할 수 있는 바람이 아니었다. 삶에 대해 곧바로 행동하게 하고 뛰어나가게 만드는 그런 바람이었다. 모래바람은 강렬했다. 이따금 얼굴을 때리기도 했다. 이곳에서 김복동은 자신의 잃어버린 시절을 후회하는 시간조차 가질 여유가 없었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먹고 살고, 하루하루 나아가기 위해 삶을 꾸리는 것, 그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바다였고, 바람이었다. 파도소리보다 바람소리가 더 거셌다. 그런 바다를 김복동은 마주하고 살아왔을 것이다. 1992년 세상에 자신의 삶을 고백할 때 맞았던 바람도 들었던 파도 소리도 이 다대포 바다였다. 회한의 바다는 그렇게 김복동의 삶에 스며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삶에 새겨진 바다는 삶이 끝나가는 순간, 그리고 자신의 삶의 원동력이 사라진 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순간, 한동안 잊고 지낸 그 ‘바다’는 문득 김복동에게 다시 다가오지 않았을까? 바다는 김복동에게 고향이고 의지할 품이었다. 어쩌면 어머니였을 수도..

2019년 3월 20일 오후 2시
한지민씨 매니지먼트 관계자와 미팅을 가졌다. 2017년 한지민씨가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기억의 터 기념행사에 참석한 영상을 보고 의뢰하게 됐다고 말씀 드렸다. 한지민씨도 김복동 할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여서 참여하고 싶다고 의견을 내비쳤다고 한다. 기억의 터 행사에서 한지민씨가 할머니들의 눈을 마주치고 미소 지으며 두 손을 꼭 잡고 걷던 모습들이 이 영화에 한지민씨를 내레이션으로 섭외한 주된 이유다. 손끝에 느껴지던 심장의 떨림과 눈빛에서 느껴지던 맑은 마음이 진심으로 김복동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지민씨가 그런 마음으로 오랜 시간 고생만 하고 세상을 떠난 김복동의 굽은 등과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듯이 내레이션으로 읽어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다시 한 번 참여해줘서 고맙다고도 말했다. 참 고마운 일이다.

2019년 4월 26일 오후 2시
내레이션 더빙을 했다.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고, 할머니를 위해 참여하게 됐다고 자신의 마음을 설명했다. 한지민씨는 녹음하면서 반성하지 않는 일본정부의 행태에 할머니처럼 분노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의 행태 대목에서는 함께 한숨지었다. 해결 가능한 일을 해결하지 않고 죄가 없다며 버티는 일본정부의 행태가 답답한 듯 느껴졌다. 한지민씨는 영상은 보지 않고 대본에만 집중했다. ‘첫 장만 읽어도 눈물 날 것 같던데요’라는 말처럼 행여나 원고를 읽다가 눈물이 흘러 작업이 지체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최대한 감정 소모를 적게 해 작업에 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영화 속 할머니의 마음에 동요하기도 하고, 응원하기도 하면서 읽었다. ‘전문 성우가 아니라 배우가 내레이션 하는 이유가 이런 감정선을 표현하는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라는 한지민씨의 말처럼 그 목소리로 김복동을 위로하고 응원하고 있었다.
녹음이 다 끝나고 한지민씨는 한참을 대기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원고를 읽어나가는 4시간 동안 누구보다 스스로를 다잡았다는 것을 한지민씨는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눈물 흘리지 않고 읽어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한없이 쏟아냈을 것이다. 누구보다 김복동의 마음을 잘 느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한지민씨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손을 내밀지 못하는 일본정부가 진심으로 사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이 가슴에 많이 와 닿았다고 한다. 그 말에 한지민씨의 참여 이유가 묻어 있다.


김복동의 목소리
박물관 속 보관 중이던 김복동의 목소리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내 자료실. 그 안에 존재하는 이름들과 그 기록들. 그 속에서 찾아낸 할머니의 신고 당시의 육성. 1992년 영상이 흔치 않던 시절 기적처럼 남겨진 음성 파일들… 처음 음성을 들었을 때의 떨림과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답답함과 먹먹함. 16살 소녀가 전쟁터로 끌려가 시간이 얼마가 흘렀는지도 모른 채 살아오다가 기적처럼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기쁨과 먹먹함. 자신의 나이가 23살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느낄 수 없었던 시간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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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와 스탭

감독

출연

수상내역

  • [제20회 전주 국제 영화제] 코리아 시네마스케이프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