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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등신 미녀의 액션영화, <미스 에이전트>
박은영 2001-03-27

팔등신 미녀들이 액션영화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우연일까, 유행일까, 현실 반영적인 하나의 현상일까. 지난 가을과 겨울을 <미녀 삼총사>가 습격한 데 이어, 올 봄에는 <미스 에이전트>다. <미스 에이전트>의 출발점은 조금 달라 보인다. ‘미녀 삼총사’들이 미인계를 치명적인 무기로 동원하는 데 스스럼이 없었던 반면, 이 ‘에이전트’는 미인과 거리가 멀고 심지어 친해질 수도 없는 부류다. 그녀는 생존과 정의를 위해 혐오해 마지않던 ‘미인 탄생’의 대장정에 돌입한다. 두 영화가 취한 태도와 동기는 다르지만, 스크린 뒤에 숨은 의도는 같다. 주인공 여성들은 상당한 지력과 무공의 소유자들로, 남성 전용석인 사설탐정 또는 FBI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지만, 이들에게 여전히 뇌쇄적인 미모(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는 필수다. 여성과 남성은 서로 상충하는 카타르시스를 안고 극장 문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심각해지지는 말자. <미스 에이전트>는 ‘웃자고 하는 얘기’다. 폭파 사건을 ‘누가 저질렀는가’ 추적해가는 액션 스릴러의 골격에, 코미디와 멜로의 살을 붙인 영화지만, 스릴러적 요소는 빈곤하다. 범인은 허를 찌르는 반전이나 뜸들임 없이 싱겁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범행 동기도 단순하다. FBI가 이 사안에 대처하는 방식도 단순하기 짝이 없다. 미인대회 폭파범을 잡아내려면, FBI 요원이 대회에 직접 ‘위장 출전’해야 한다, 그것도 결선 파이널에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난센스다. 그러나 코미디적인 맥락에서, <미스 에이전트>는 예상 밖의 잔재미를 자주 선사한다. 미인대회라는 화사하고 말랑말랑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끊임없이 크고 작은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레이시는 관객의 라이터를 총으로 오해해 무대에서 객석으로 다이빙하는 해프닝을 벌이고, 장기자랑 시간에 과격한 호신술 시범을 보인다. 높은 구두에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으로, 뒤로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일쑤다. 그레이시가 평소 연정을 품어왔던 동료 에릭은 키스할 듯 무드를 잡으며 얼굴을 들이대다가, 다이어트 중인 그레이시를 골리려 초코바를 꺼내 입에 문다. 액션 시퀀스도 멜로적 요소도 기상천외한 우스개감으로 동원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그레이시가 훗날 미인대회 동료들로부터 ‘우정상’(Miss Congeniality - 이 영화의 원제)을 받게 된 사연에는, 단순히 ‘웃기는 영화’로 자족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를 만들고자 한 야심(또는 순진함)이 숨어 있다. 미인대회를 혐오하던 그레이시는 몸소 그들의 세계에 뛰어들면서, 자신의 편견을 수정하게 된다. 미인대회가 한낱 “사자머리에 짙은 화장에 수영복 차림으로, 또라이같이 세계평화나 외치는” 이벤트라고 생각하던 그레이시는, “가방 끈 길고 못생긴, 미인대회 혐오주의자들, 페미니스트들과 평생 싸워온” 미인대회 단장 캐시와 팽팽한 전선을 형성한다. 정작 그레이시의 태도가 돌변하게 된 것은, 동료 출전자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고 연대를 이루면서부터. 그녀는 미인대회 출전에 “내 눈을 뜨게 한 새로운 경험”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변신한 외모만큼이나 드라마틱한(그러나 예상 가능한) 변신. 영화는 자신의 미모를 기꺼이 전시하는 여성들과 그들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그들 모두를 껴안으려는, 안전하지만 진부한 결론을 택한다.

황당한 설정에 과장과 비약이 심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미스 에이전트>가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샌드라 불럭 때문이다. 샌드라 불럭은 빼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소탈하고 귀여운 ‘이웃집 아가씨’ 같은 자신의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해내고 있다. 빗질 한번 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 케찹 묻은 셔츠를 태연히 입고 다니며, 웃을 때마다 코 고는 소리를 내고, 공룡처럼 성큼성큼 걸어다니던, ‘변신 전’ 그녀의 모습은 매우 살갑다. 샌드라 불럭이 이 영화의 프로듀서라는 정보를 대하고 보면, ‘변신 후’ 미인대회 무대를 누비는 그녀의 모습에서 다분히 나르시시즘의 혐의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작은 배역, 큰 카리스마

<미스 에이전트>의 빛나는 조연 배우들

<미스 에이전트>는 샌드라 불럭의 영화지만, 그에 못지않게 조연들의 존재감도 빛나는 영화다. 최근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듯 보이는 마이클 케인은 <사이더 하우스>의 인자한 의사에서 <퀼스>의 위선적인 고문 기술자에 이어, 이번엔 게이 뷰티 컨설턴트로 또다른 연기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외모 가꾸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왈가닥 FBI 요원인 그레이시를 단 이틀 만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조’로 둔갑시키라는 미션을 받고, 왕년의 일급 뷰티 컨설턴트에서 골칫덩이 처리반으로 전락한 신세를 한탄하다가, 자신의 솜씨가 녹슬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회복하고, 그레이시와도 돈독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기존 영화에서 디자이너 등 미용업 종사자들이 게이로 설정돼 여성성을 과장하는 연기를 보여준 것과는 달리, 그가 그레이시가 아닌 에릭에게 추파를 던지는 에피소드는 억지 웃음을 자아내지 않는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의외의 재미를 선사한다.

그레이시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미인대회 단장 캐시 역의 캔디스 버겐도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이다. <간디>를 마지막으로 은막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던 그녀는 88년 TV시리즈 <머피 브라운>으로 재기에 성공해 10년 동안 5번의 에미상과 2번의 골든글러브상을 받았고, 그 여세를 몰아 <미스 에이전트>로 돌아왔다. 우아하고 지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은 여전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몰아세우며, 미인대회 단장으로서의 야심을 향해 내달리는 모습에는 악마적인 카리스마가 깃들어 있다.

샌드라 불럭이 은근한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 동료이자, 미인대회 폭파사건 수사팀 리더 에릭으로 분한 벤자민 브렛은 TV탤런트 출신으로, 영화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맡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첫 번째 초이스’였던 맷 딜런 대신 투입된 행운아. NBC의 드라마 (95∼99년)에서 레이 커티스 형사 역으로 인기 몰이를 시작했고, <데몰리션맨> <긴급명령> <레드 플래닛> <트래픽> 등에 단역 또는 조연으로 꾸준히 얼굴을 내비쳤다. 모계가 페루 인디언이라, 라틴 남성 특유의 터프하고 섹시한 매력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줄리아 로버츠와 오랜 연인 사이임이 밝혀져 더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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