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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①] 장뤽 고다르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다 – 2000년대 편
김예솔비 2022-09-29

“이미지는 부활의 때에 올 것이다”

<아워 뮤직>(2004)

<아워 뮤직>은 단테의 <신곡>을 바탕으로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세개의 장으로 나뉜다. 연옥편은 사라예보를 주 무대로 삼는다. 사라예보는 1차 세계대전의 발원지이자 대량 학살이 벌어졌던 역사적 상흔의 장소이기도 하다. 고다르는 이 영화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숏과 역숏으로 구성하는 문제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이스라엘은 픽션 소재가 됐고, 팔레스타인은 다큐 소재가 되었다는 말처럼 두 민족의 관계에는 동등하게 마주 볼 수 없는 비대칭성이 자리 잡고 있다. 오히려 고다르는 팔레스타인과 마주 볼 수 있는 자로 인디언을 불러들인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는 존재들간의 마주침을 통해 역사를 다시금 사유한다는 점, 숏-역숏이라는 몽타주를 역사의 방법론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아워 뮤직>은 <영화의 역사(들)>의 정신을 잇는다. 고다르는 역사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들 가운데 팔레스타인을 위한 영화의 자리, 즉 팔레스타인을 위한 숏을 고민하면서 시적인 급진성을 붙잡은 드문 실천가다. _김예솔비 영화평론가

<필름 소셜리즘>(2010)

<아워 뮤직>의 마지막 천국편은 이스라엘 학생 올가가 철학적 문제에 대한 고민 끝에 자살한 뒤 천국에 도착한 풍경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아워 뮤직>이 묘사하는 유럽은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유토피아적이다. 비록 한 사람일 뿐일지라도, 유럽은 올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필름 소셜리즘>에 이르면 유럽에 대한 전망은 한층 더 비관적으로 변한다. 영화는 지중해 연안 도시들 사이를 항해하는 여객선에 탑승한 채로 유럽의 암울한 전망과 제국주의의 잔재로 고통받는 존재들에 대한 고뇌를 읊조린다. 고다르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출처 없는 영상들을 재조합한 뒤, 저작물의 불법 유통을 금지하는 FBI의 경고문을 보여준다. 이어서 경고문을 부드럽게 찢고 “법이 정당하지 않을 때, 정의는 법보다 앞선다”라는 문구가 나타난다. 그리고 고다르는 여기에 “노 코멘트”라고 덧붙인다. <아워 뮤직>에서 “디지털이 영화를 구원할 수 있나요?”라는 학생의 질문에 침묵으로 답했던 고다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두번의 침묵을 중첩시켰을 때, 이는 디지털영화는 도둑질을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전언처럼 들린다. _김예솔비 영화평론가

<이미지 북>(2018)

이미지의 강탈을 통해 사유의 강탈을 꾀하는 전략은 <이미지 북>에 다다라 디지털이라는 환경에서 더욱 전면화된다. <이미지 북>은 손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필름을 자르고 이어 붙이는 손이자 수많은 인용들과 함께 작업하는 브리콜뢰르(손재주꾼)의 손이다. 이 손은 역사의 서가에 파묻혀 책장을 넘기고 타자기를 두드리며 셀룰로이드를 만지는 물리적인 손일 뿐 아니라 역사를 몽타주하는 개념으로서의 손이기도 하다. 이 손은 브레송의 소매치기처럼 우아한 손놀림으로 이미지를 빼돌리며, 서로 다른 시간의 계열들을 이어 붙인다. 고다르는 디지털 소프트웨어에 의해 원본과는 다른 속성으로 조작된 이미지들을 다룬다. “이미지는 부활의 때에 올 것이다.” 그 이미지는 재구성이라는 창조적 발명 뒤에 오는 역량으로서의 이미지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고다르를 두고 “어떤 외로운 사람이 한명의 영화감독을 떠올린다면, 그는 바로 고다르일 것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고다르는 고독과 친연한 사람이었다. <이미지 북>의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터져나오는 고다르의 기침은 열렬한 희망과 불가피한 고독 사이에서 존재하기의 떨림으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다르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언가의 사이 속에 존재하는 것의 감각을 떠올리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만 같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해지지 못하는 것 사이, 보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일 사이. 그 미묘한 차이들을 성실히 감각하기. _김예솔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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