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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A24 ③ 김혜리 기자의 지난 10년간 급성장한 영화 제작·배급사 A24에 대하여
김혜리 2022-11-10

이토록 선명한 취향의 세계

극장 불이 꺼지고 영화사 로고가 스크린에 뜰 때 웬만큼 안심하거나 다가올 120분이 대충 어떤 시간이 될지 감을 잡는 경우가 있다. 1990년대에는 로맨틱 코미디 명가 워킹 타이틀이 있었고 메이저 스튜디오의 예술영화 자회사 폭스 서치라이트와 (다소 노숙한 취향의) 소니 클래식, 이제는 ‘볼드모트’가 돼버렸지만 미라맥스 로고 맨해튼 스카이라인도 유사한 효과를 냈다. 2001년 말 브래드 피트가 창립한 플랜 B 엔터테인먼트는 <디파티드> <노예 12년>으로 오스카 작품상을 타고 블랙 무비와 아시아계 경험을 그리는 영화들을 내놓으며 21세기 시대정신을 반영했다. 2010년대의 첫 스타는 오라클의 상속인 메건 엘리슨이 창립한 안나푸르나. <마스터> <제로 다크 서티> <폭스캐처>를 제작하며 한동안 부상했다. 그러나 2022년 현재 개성과 예술성을 가진 영화 및 TV 제작배급사의 대명사는 2012년 출범한 인디 스튜디오 A24다.

A24는 지난 10년간 110편이 넘는 영화를 배급하거나 제작했고 처음으로 제작한 2017년 <문라이트>가 거머쥔 작품상과 2021년 윤여정의 여우조연상(<미나리>)을 포함해 7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받았다. (팬과 일부 언론은 A24가 아카데미에 홀대받고 있다고 불평한다.) 표준에서 벗어나는 장르영화 그리고 작가감독의 비전을 지지하는 파트너십으로 요약되는 색깔을 지닌 A24의 성취는 사실 박스오피스보다 문화적 영향력에서 두드러진다(44쪽 필모그래피 참조). 뉴욕 소호에는 A24 로고가 새겨진 맨투맨을 입은 젊은이들이 활보하고 지난 8월 <더 벌처>는 ‘A24 컬트’라는 제목의 기사를, 생일 파티 드레스 코드를 A24 영화 캐릭터 의상으로 잡은 텍사스의 한 젊은이 이야기로 열었다.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가 지배하는 할리우드에서 이 작은 스튜디오가 망하거나 합병되지 않고 고유한 입지를 확보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유전>

스튜디오 브랜딩의 성공

A24는 영화계 곳곳에서 경력을 쌓은 세 사람의 의기투합으로 설립됐다. 구겐하임 파트너스 내 영화 투자 그룹 수장이던 다니엘 카츠, 빅 비치의 제작본부장 존 호지스 , 오실로스코프 대표 데이비드 펜켈이 그들이다. 카츠가 새 회사를 세우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순간 운전 중이었던 이탈리아 고속도로 번호는 그대로 영화사 이름이 됐고 카츠가 재직한 구겐하임 파트너스가 몇백만 달러의 종잣돈을 댔다. A24의 ‘사훈’이 있다면 “재능 있는 작가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큰 기회가 온다”(카츠의 2018년 <GQ> 인터뷰)에 가까울 것이다. 창사 초기 배급으로 시작한 A24는 동시대 재능 있는 감독들의 욕구불만에 파이프를 꽂았다. 프랜차이즈와 저예산 인디영화로 양극화되고, 해외 시장을 고려한 무난한 영화에 자원을 쏟는 할리우드 풍토에 적응하지 못한 영화인들은 A24의 센스 있는 프러포즈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창사 직후 배급한 하모니 코린의 <스프링 브레이커>, 소피아 코폴라의 <블링 링> 같은 탈주류 청춘영화들이 스튜디오의 이미지를 형성했고 유럽에서 가져온 조너선 글레이저의 <언더 더 스킨>,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 알렉스 가랜드의 <엑스 마키나> 같은 지적인 SF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A24의 안목과 취향을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이어 아리 애스터의 <유전>, 로버트 에거스의 <더 위치>와 <라이트하우스>, 트레이 에드워드 슐츠의 <잇 컴스 앳 나잇>은 느리게 목을 죄어오다 100% 이해하지 못했다는 불안감이 신비로움으로 전환되는 A24 호러의 시그니처를 확립했다. 모든 장르와 그 너머 영역에 걸쳐 있는 A24 영화들의 경향을 단정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관객이 갖는 인상과 평판은 말할 수 있다. 영화사의 만신전에 올랐거나 오를 만한 고색창연한 예술영화에 비해 젊은 층이 접근하기 쉽고, 작가의 비전과 장르 관습이 절충돼 있으며, 개봉 후 온라인에서 자칭 영화광들의 해석 경쟁을 일으키며, 프로덕션 디자인이 강렬한 표현주의적 영화들이다. 마지막 특징은 이 스튜디오의 모든 영화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나 A24의 인장을 만든 히트작 군의 공통점이라 중요하다. 개봉 전 한컷의 스틸이나 움짤이 대중의 시선을 낚아챌 수 있는 작품이 A24의 라이브러리에는 넘쳐난다.

창사 6년째인 2018년 3월 <뉴욕타임스>는 시장 점유율에서 폭스 서치라이트와 안나푸르나를 제친 A24를 주목하는 프로파일 기사를 게재했다. 이런 성장 과정에서 A24는 스튜디오와 일회성 이상의 파트너 관계를 가진 ‘A24 보이스’라 불리는 감독 그룹과 충성스러운 관객 집단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알렉스 가랜드(<엑스 마키나> <>), 트레이 에드워드 슐츠(<크리샤> <잇 컴스 앳 나잇> <웨이브스>), 사프디 형제(<굿타임> <언컷 젬스>), 다니엘스(<스위스 아미 맨>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아리 애스터(<유전> <미드소마> <디스어포인트먼트 블러바드>), 로버트 에거스(<더 위치> <라이트하우스>), 데이비드 로어리(<고스트 스토리> <그린 나이트>) 등이 A24와 지속적 관계를 유지하는 감독 명단으로, 이들 각자의 개성이 종합된 태피스트리가 스튜디오 A24의 이미지를 지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년간 내놓은 110여편 중 태작과 망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데 A24는 2013년부터 맺은 다이렉티비,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와의 계약을 유용한 뒷마당으로 만들었다. 극장 개봉하기 민망한 약한 영화들은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소리 소문 없이 생애를 마친 덕에 브랜드 이미지를 흐리지 않았다고 할리우드 관찰자들은 지적한다. 물론 A24의 스트리밍 플랫폼 전략은 이처럼 수세적인 보완책을 넘어 진화했다. 이들은 Apple TV+, 쇼타임 네트워크와 계약을 성사시키며 오리지널 영화(Apple TV+의 <맥베스의 비극>), 시리즈 (<유포리아> <카마이클 쇼>)를 성공시켰고 A24 TV 디비전은 최근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다분히 영화광적 8부작 <이마 베프>를 <HBO>에서 공개했다.

<미나리>

밀레니얼 표적 마케팅

A24가 상대적으로 적은 자본으로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은 데에는 마케팅의 과감한 혁신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세명의 창립자는 슈퍼볼 중간 광고 등 비싼 TV 광고 타임과 레거시 미디어 광고를 깨끗이 포기하고 비용이 낮고 아이디어가 중요한 디지털 플랫폼에 전력투구했다. 데이터 마케팅 스타트업 오페람 등 대행사의 도움을 받아 자사 영화를 볼 만한 관객을 겨냥한 알고리즘을 이용했다고도 전해진다. <엑스 마키나>를 영화제에서 공개하며 A24는 주인공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 캐릭터로 설정된 틴더 챗 봇을 만들었다. <더 위치>의 마케팅팀은 캐릭터별로 트위터를 만들어 운영했는데 이중 염소 블랙 필립의 계정이 화제를 모았다. 현재 A24 인스타그램 계정의 팔로워는 139만으로 포커스 피처, 파라마운트, 네온, 아마존 계정의 그것보다 훨씬 많다. 무엇보다 A24 마케팅팀은 광고가 아니라 사람들이 공유하고 즐기고 흉내낼 만한 숏과 클립을 자사 작품 가운데에서 뽑아내는 데 능란하다. 아니, 어쩌면 반대로 그런 장면을 포함한 영화가 A24의 취향에 부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위스 아미 맨>의 방귀 뀌는 시체(다니엘 래드클리프 a.k.a 해리 포터), <엑스 마키나>의 오스카 아이작이 보여준 막춤, <미드소마>의 꽃으로 포장된 플로렌스 퓨의 모습 등은 결코 만만치 않은 실체를 가진 영화를 젊은 대중의 관심권에 진입시켰다. 쿨한 이미지의 브랜드를 확립한 A24는 영화에 대한 애착과 소속감을 겉으로 표현하고 공유하고 싶어 하는 밀레니얼들의 수요를 굿즈로 흡수했다. 패션계의 방식을 받아들여 머천다이즈의 한정판 판매로 열기를 부채질하기도 한다. 인스타그램과 연결된 A24 스토어에는 각본집, 블루레이는 물론 모자와 점퍼 등이 판매 중이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특수분장을 본뜬 핫도그 손가락 모형이 매진 표시를 달고 있다. 더불어 A24는 스튜디오의 멤버가 되라는 슬로건과 함께 팬덤에 회원제를 도입했다. 신작 영화를 포함한 모든 A24의 프로덕트에 우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24 올 액세스에 가입하면 월 5달러에 무료티켓, 스튜디오 자체 발행 매거진, 한정판 굿즈 우선 구매 기회를 얻고 A24 인스타그램의 가까운 친구 그룹에 들 수 있다고 한다. 매거진뿐 아니라 A24는 오디오 콘텐츠도 직접 제작한다. 한달 1회 업로드되는 자체 팟캐스트 ‘더 A24 팟캐스트’는 호스트도 광고도 없이 자사와 인연이 있는 영화인 두세명의 자유로운 대화로 이뤄진다. <스위스 아미 맨>을 만든 다니엘스 감독과 또 한명의 다니엘인 래드클리프의 삼자 수다, 아리 애스터와 로버트 에거스의 대담, <미나리>의 정이삭과 <동조자>의 원작자 비엣 탄 응우옌의 대화는 특정 영화 홍보와 무관하다. 대신 청취자들은 A24의 감식안이 만든 시네필의 세계에 동참하고 있다는 즐거운 기분을 느낀다. 데이비드 미어먼 스콧과 레이코 스콧의 저서 <팬덤경제학>(Fanocracy)에는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가 자기 정체성의 일부라고 소비자가 느끼게 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어찌 보면 A24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이 명제를 실천한 셈이다. A24 마케팅에 가미된 마지막 한 방울은 신비주의다. A24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좀처럼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걸로 알려져 있다. 한 사람이 스튜디오 전체를 대표하는 얼굴로 영화계를 누비다가 그의 몰락과 함께 치명상을 입은 미라맥스가 남긴 교훈을 새긴 결과일 수도 있다.

<더 랍스터>

부티크 스튜디오의 미래

모두의 물음은 당연히 첫 10년 이후 몸집이 커진 A24가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을까로 수렴될 것이다. 할리우드의 판세를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올해 공개된 A24 영화와 시리즈들은 아직은 이 미니 스튜디오의 전략이 굽힘 없이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올해 3월 개봉하고 현재 미국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와 Apple TV+에서 볼 수 있는 타이 웨스트 감독의 <엑스>는 1970년대 말 시골 농장 별채를 빌려 포르노영화를 찍는 젊은이들과 집주인 노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그린 영화로 일부 평자로부터 걸작의 칭호마저 얻고 있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와 <싸이코>를 연상시키는 슬래셔영화지만 타이 웨스트 감독과 1인2역 주연 및 각본에 참여한 배우 미아 고스는, 전통적으로 여성을 착취한다고 여겨진 호러 장르에 잠재된 여성의 폭발적 힘을 발굴하는 쾌거를 이뤘다. 흡사 사진작가 낸 골딘이 찍은 듯한 공간 속 인물의 이미지도 아릅답고 독하다. 제작진은 극중 두 여성 캐릭터 펄과 맥신의 과거를 담은 미아 고스 주연의 후속작 두편을 촬영 완료했고, 9월 개봉해 파란을 일으킨 <펄>에 이어 <맥신>을 2023년 공개할 예정이다. 그 밖에 A24가 공개한 라인업으로는 전작에 이어 스튜디오와 협업을 이어가는 조엘 코엔, 조애나 호그, 켈리 라이카트, 알렉스 가랜드, 조너선 글레이저의 신작이 있으며 <HBO> 에서 방영될 박찬욱 감독의 <동조자>와 제주 해녀 다큐멘터리도 A24 로고 아래 세계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그동안 종종 지적된 A24의 백인 편향도 서서히 균형을 찾는 쪽으로 움직이는 걸로 보인다.

서두에 언급한 <벌처> 기사는 “A24는 24살 남자가 역대 최고의 영화라고 믿을 만한 영화의 준말”이라는 작가 윌리 스테일리의 정의를 인용했다. 농담 섞인 표현이지만 일말의 진실이 있다. A24는 비평이나 흥행에서 최고작을 배출해서가 아니라 영화사의 필모그래피를 묶는 정체성을 수립하고 각인시켰으며 디즈니, 마블, 넷플릭스 같은 거대 브랜드 틈바구니에서 관객과 공유하는 취향의 세계를 짓고 가꾸어냈기에 성공한 스튜디오다.

<고스트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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