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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편집장] 정훈이 포에버
이주현 2022-11-11

2015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촬영 현장. 복숭아의 도시이자 마틴 루서 킹의 고향이자 나에겐 마블의 도시로 기억되는 그곳에서 블랙 팬서, 채드윅 보즈먼을 만난 적이 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통해 처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 모습을 드러낸 보즈먼이 당시 히어로 경력이 꽤 찬 스타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스칼렛 요한슨만큼이나 여유롭게 블랙 팬서로 합류한 소감이며 자신이 맡을 임무에 대해 들려줬던 기억이 난다. 이후 <블랙 팬서>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고유한 캐릭터와 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슬프게도 2편이 제작되기 전 그의 부고가 들려왔다. ‘채드윅 보즈먼의 블랙 팬서’는 2018년의 모습으로 영원히 머물러 있겠지만 와칸다 왕국의 블랙 팬서 이야기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이하 <와칸다 포에버>)를 통해 계속된다. 티찰라(채드윅 보즈먼)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161분짜리 영화는 자연스럽게 앞선 영웅의 죽음과 새 영웅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블랙 팬서의 유산을 계승하는 건 실험실에서 복잡한 계산식과 확률을 붙잡고 있던 슈리다. 슈리와 함께 또 한명의 젊은 여성 과학자로 등장하는 리리는 영화에서 서사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번 영화만 놓고 보면 슈리와 리리 두 캐릭터는 미완의 상태라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와칸다 포에버>는 캐릭터와 배우가 젊어진 것을 넘어 영화 자체가 젊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의 중요한 미션이 되어버린 세대교체와 다양성이라는 화두가 <와칸다 포에버>에선 작정하고 그려진달까.

문득 정훈이 작가(본명은 ‘정훈’이나 오랜 시간 필명 ‘정훈이’ 작가로 불렸기에 여기선 익숙한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다)라면 <와칸다 포에버>를 어떻게 패러디할까 궁금해졌다. 마블의 ‘그렇다 치고’를 능가하는 만화적 허용 혹은 “비약의 미학”으로 25년간 <씨네21>에서 만화를 연재하며 사랑받아온 정훈이 작가가 11월5일 세상을 떠났다. 부고를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작가의 분신 같은 캐릭터 남기남의 푸근한 실루엣이었다. 한때 ‘정훈이 만화’의 지면을 담당한 적이 있다. 1년간 편집팀에서 일할 때, 목요일 밤 11시의 풍경은 늘 비슷했다. 편집장이 “‘정훈이 만화’ 들어왔어?” 물으면, 정훈이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작가님, 원고는…”이라고 말을 뗐고, 뒷문장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정훈이 작가는 “네, 다 됐습니다”라고 답을 주었다. 변함없는 간결한 마감 독촉의 통화 루틴. 생각해보면 그 시기 나는 ‘정훈이 만화’의 첫 번째 독자였던 셈이다. 2021년 <씨네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정훈이 작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겐 매주 마감이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25년이 흘렀다니 기분이 묘하다. (…) 앞으로 10년 정도는 만화를 더 그리지 않을까 싶다.” 그의 말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그린 ‘정훈이 만화’는 10년 그 이상,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정훈이 작가님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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