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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아오야마 신지 감독론: 아오야마 신지, 혹은 하늘을 바라보는 영화의 곤경

<헬프리스>

아오야마 신지의 데뷔작 <헬프리스>의 도입부는 하늘에 떠오른 카메라의 공중 촬영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하늘 위에서 심하게 흔들리며 현기증이 일 듯한 위태로운 움직임으로 기타큐슈의 풍경을 내려다본다. 이 매혹적인 장면은 단순히 한 편의 영화를 여는 근사한 시작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에서 시작된 작가의 여정이 <구름 위에 살다>라는 또 다른 하늘의 영화를 끝으로 이르게 종결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관객이라면 아오야마의 영화를 다시 마주하면서 새삼스럽게 화면에 침범하는 구름과 하늘에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늘은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주의 깊게 관측되는 대상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행위에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헬프리스>의 초반부에서 집 안에 누워 있던 겐지가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 뒤에 이어붙는 컷은 그의 시선으로 보이는 텅 빈 하늘이 아니라 어느 공장의 외경을 비추는 무인의 삽입 쇼트다. 시선의 물리적 연결을 고려한다면 프레임에 하늘을 가득 담아낸 장면이 나올 법하지만, 공장 주변의 수직적 건축물을 담아낸 쇼트가 그것을 가로막는다. <헬프리스>의 초반부에 반복적으로 삽입되어 특권적인 밀도를 갖는 공장의 무인 쇼트는 그 자리를 대체해 하늘과 구름에 손쉽게 화면을 내어주지 않는 존재감을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 <유레카>에서 사와이가 이혼한 아내를 만나 대화하던 도중 카메라가 왼쪽으로 이동해 창밖의 하늘을 보여줄 때도, <도쿄 공원>에서 코지가 미행 중인 여자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하늘과 구름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사태만큼은 철저히 회피된다. 그들이 바라본 하늘에는 어김없이 도심의 고층 건물과 탑이 관측되고 있어, 완벽하게 하늘로만 이루어진 화면이 구성되는 것을 끝내 방해한다.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아무런 방해물 없이 온전히 하늘과 대면하는 순간을 상상하기란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드넓은 하늘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 보여주는 것은 영화가 제공할 수 있는 치명적인 매혹이자 백색 스크린을 바라보는 데서 성립하는 영화 체험의 필연적 조건을 상기시키는 형상일 터다. 그러나 아오야마 신지는 프레임에 하늘이 가득 채워지는 순간마다 일본에 지어진 현대적 건축물의 수직선을 불러들인다. 그는 계속해서 화면 내부에 현실을 환기하는 범용한 선들을 틈입시켜 무정형의 하늘 자체가 카메라에 포착되는 것을 강박적으로 저지한다.

<차가운 피>

서부극의 하늘

거대한 표면으로서의 하늘을 비추는 데 있어 최적의 조건을 갖춘 무대는 물론 서부극일 것이다. 신화적 구조를 배면에 두고 황무지를 배회하는 웨스턴의 풍경 상단에는 장대한 하늘과 평온한 구름이 언제나 모습을 드리우고 있다. 서부극의 하늘이 전하는 아름다운 감촉을 아오야마 신지가 의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잘 알려졌다시피, 아오야마는 웨스턴의 법칙이 영화를 지배하는 원리라고 말하는 작가다. 서부극을 향한 동경과 무의식은 그의 영화를 관류하는 강력한 기제다. 하지만 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서부극의 형상을 구축하는 작업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는 범용한 도심 공간 속에서 서부극의 거대한 풍경에 접근할 수 있는가, 일본을 무대로 삼은 영화가 서부의 신화적 공간을 이루는 요소인 황무지와 암석을 묘사할 수 있는가, 라는 불가피한 질문을 불러온다.

아오야마의 영화는 사건 이후의 영화다. <헬프리스>는 출소한 야쿠자 야스오가 고향에 돌아오는 플랫폼 장면에서 <말 없는 사나이>의 존 웨인이 이니스프리로 돌아오는 첫 장면의 구도를 고스란히 가져와 묘사한다. 하지만 돌아온 자에게 안식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야스오가 찾는 조직 두목은 일찌감치 죽어버렸고, 그는 두목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채로 두목의 죽음을 주장하는 동료들을 연쇄적으로 살해한다. 마침내 두목이 죽었음을 알게 되자 그는 잘린 팔과 마약을 남기고 자살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사건으로 처리해야 할 두목의 죽음은 이미 해소되어버렸다. 야스오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자다. 아오야마 신지가 웨스턴이 희미해진 영화사의 시간에 연출자로 불시착한 것처럼 말이다.

존 포드의 인물이 고독하지만 분명한 몸짓으로 원거리의 하늘을 바라보며 돌멩이를 던진다면, 아오야마의 인물들에게 하늘 위의 구름을 올려다보며 명확한 행위를 취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애매한 몸짓으로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놓치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차가운 피>의 형사 사가는 터널에서 도주하는 범인이 쏜 총탄에 맞아 총을 도난당하고, <헬프리스>에서 오른쪽 팔이 잘린 야스오는 손에서 굴러떨어진 술병을 줍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호숫가 살인사건>에서 슌스케는 시체의 지문을 지우는 데 사용한 라이터를 잃어버린다. 아오야마는 어긋난 시간과 분실된 표상의 교차로 이루어진 무대에서 머뭇거린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인물의 손에 쥐어진 사물은 그 손의 주인이 갖는 정체를 규정한다. 브레송에 빗대어 말한다면, 어느 남자가 소매치기라는 것을 알기 위해선 그의 손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봐야 한다. 영화적 논리로는 소매치기라서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동작에서 소매치기라는 정체성이 각인되는 것이다. 서부극에서라면 주인공은 손에 든 권총으로 적을 해결해야 한다. 순식간에 상대방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주인공의 목숨이 위험하다. 웨스턴의 법칙은 행동을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서부극적 인물의 손은 빠르게 사물을 들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아오야마 신지는 반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시간을 도입한다. <헬프리스>의 서사에는 행동하는 인물인 야스오가 있지만, 다른 축에 행동하지 않는 겐지가 있다. 아오야마의 영화가 전하는 특별함은 행위를 규정하는 사물로부터 인물의 손을 분리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사물이 손에서 빠져나가고, 심지어 인물의 팔이 잘려버린 모습이 드러날 때, 영화의 표상은 그들을 규정하는 체계를 상실한다. 총을 들고 범인을 쫓는 사가는 형사다. 그러나 총을 분실하고 한쪽 폐에 손상을 입은 사가는 형사가 아닌 무엇이 된다. 버스를 운전하는 사와이는 운전기사다. 그러나 끔찍한 버스 납치 사건을 겪고 살아난 사와이는 운전기사가 아닌 무엇이 된다.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인물은 능동적으로 사건에 개입한다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노출된다. 그들이 영화적 무대에 도착하기 전에 일찌감치 누군가 죽어 있거나 살인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카메라 렌즈에 남겨지는 것은 범용한 의미와 맥락으로 규정할 수 없는 타인의 면모다. 그들이 화면에 돌아오면서 영화는 표상 불가능한 것에 접근하는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헬프리스>의 야스오는 조직원과 경찰의 말로 전달되는 두목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차가운 피>에서 형사는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힌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러하다. 카메라는 규정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오야마 신지는 서부극의 구조를 빌려오지만, 서부극의 인물이 수용하는 규칙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자들의 궤적에 시선을 건넨다. 그는 웨스턴이 붕괴한 자리에서 서부의 흔적을 주시하는 관찰자다. 서부극의 인물이라면 손을 꺼내 행동하고, 지평선으로 멀어지며, 하늘을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아오야마의 인물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손을 잃었거나, 화면 내부의 중력에 붙잡혀 있다. 그들은 서부극이라는 이미지에 도달할 수 없는 얼룩을 간직한다. 그들의 시선이 하늘이라는 추상적 원경을 향할 때마다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을 가리키는 구조물이 침입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아오야마의 인물은 그토록 간단하게 신화적 배경과 결합할 수 없다. 터무니없는 크기의 버스를 몰고 세상의 바깥으로 이동을 멈추지 않는 <유레카>의 작은 공동체만이 좌표를 알 수 없는 경유지에서 거대한 암석을 발견할 뿐이다. 하지만 그 희박한 순간에서조차 영화는 하늘이 화면을 차지하기 전에 장소를 이동해버린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태양과 원

서부극에 근접하는 강박적 한계뿐만 아니라 아오야마가 담아내는 하늘에는 또 다른 곤경이 주어져 있다. 일본에서 하늘을 비추는 것은 태양이라는 원의 모양을 목격하는 일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오야마는 이렇게 말한다. “구체 또는 원은 떠오르는 태양(일장기)으로 시작하는 안정된 눈이자 권력의 상징이며 오늘날 후지 TV 및 기타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상표로 부끄럽게 재현되고 있다.” 하늘에 떠오른 구체 또는 원은 국가권력의 상징이자 민족을 통합하는 표상이며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다. 아오야마는 그 표상을 두고 ‘부끄러운 재현’이라는 표현을 쓴다. 일본의 현실을 찍을 수밖에 없는 그의 영화는 부끄러움, 수치, 고통을 포괄하는 추한 경험과 더불어 재현을 생성하는 것이다. 아오야마의 영화를 전후의 영화이자 사건 이후의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통렬하게 다가오는 표현이다. 그는 과거로부터 덧대어진 일본의 ‘부끄러운 재현’을 외면할 수 없다.

아오야마는 오시마 나기사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 국기의 태양 부분을 검게 물들이거나(<소년>) “검은 태양이 떠오르네”라는 가사를 노래할 만큼(<일본춘가고>) 단호하게 국가의 표상에 파산 선고를 내리는 작가가 아니다. 혹은 아오야마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도착한 시기에 일본이라는 국가는 그런 공격을 받아낼 만큼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한다. 단지 아오야마는 웨스턴과 미국영화를 동경하면서도 일본이라는 낡은 태양 아래서 영상을 제작할 수밖에 없다는 철저한 자각을 실행할 뿐이다. 그것은 동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 지역의 로케이션 촬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일본영화’를 만드는 연출자의 조건에 대한 자각이다. 후지이 진시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오야마의 독창적인 저항의 관점은 “천황제나 국가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이 자신의 육체를 흐르는 피의 문제로 여긴 점”에서 비롯된다. <호숫가 살인사건>의 부모들이 말하듯이 아오야마가 그리는 인물이란 스스로 자신의 추함을 시인하고 떠안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구체의 형상은 무정형의 하늘이 아니라 추한 기억을 품은 지면에 있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공중에 떠오른 비눗방울은 금세 터져 지상에 있는 자들을 적신다. <헬프리스>와 <차가운 피>에 나오는 터널의 형태, <호숫가 살인사건>의 시신을 빠트리는 거대한 호수, <도쿄 공원>에서 손가락을 들어 도쿄의 지도 위로 그리는 소용돌이 모양이 아오야마가 가리키는 지상의 구체 또는 원이다. 무엇보다 특별한 원형은 <유레카>의 사와이가 나오키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공터를 도는 장면에서 그려진다. 아오야마는 탈것이 나오는 장면을 많이 찍었지만, 이 순간에 사와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터널을 가로지르거나, 거대한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과 더불어 지평선 너머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다섯 명을 살해한 나오키를 태우고 아무도 없는 공터를 돌면서 하나의 원을 그릴 뿐이다. 그것은 도입부의 버스 납치 사건에서 공터로 나온 사와이와 버스 테러범 주변을 돌던 카메라 움직임과 정확히 조응한다는 측면에서 잊을 수 없는 움직임이 된다. 돌이킬 수 없는 폭력과 상실의 순간을 비추던 움직임은 큰 원을 돌아 타인의 폭력을 받아들이는 구제의 몸짓으로 되돌아온다. 이해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가져오는 원운동은 마찬가지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 타인을 수용하는 포용의 동작으로, 기묘한 유사성을 갖고 반복된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의 외침에서 제목을 빌려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도 한 인물 주변으로 원운동을 하는 카메라워크가 나온다. 자살 충동 바이러스가 만연해 있는 근미래에 병에 걸린 소녀는 어느 마을로 찾아온다. 그곳에 사는 무명 음악가는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구름과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눈을 가린 소녀의 귀에 소리가 닿는다면 기적 같은 회복이 발생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희미한 가능성을 향해 카메라는 눈을 가린 소녀의 주변에서 원을 그린다.

<유레카>에서 사와이는 나오키에게 “꼭 죽지 말고 살아라.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라고 당부했지만, 영화는 그 말의 근거를 찾지 못했다. 단지 아오야마는 카메라 앞에 놓인 하늘과 지면, 그 사이를 잇는 지평선에 인물의 몸짓과 소리가 남겨지는 것을 비춘다. 원으로 회전하는 움직임의 여백에서 그들의 몸짓과 소리는 나타나고 사라진다. 세계의 파국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우회하고 변형되기를 반복하는 구체의 형상은 태양 아래 놓인 세계의 현실적 기록을 넘어선 잠재적 세계의 가능성을 환기한다. “패배할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미래에 이길지도 모른다는 믿음”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 아오야마의 말처럼 그의 영화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도래할 미래를 예감케 한다. 그 미래의 가능성이란 반복건대, 지상에서 형성되는 구체와 원형의 표상적 기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규정되지 않는 표상 앞에 선 영화의 저항이란 이러하다.

터널을 통과하기

<헬프리스>의 후반부에 겐지는 장애가 있는 야스오의 여동생 유리를 태우고 터널을 통과한다. 터널은 어둠으로 막힌 벽이 아니라 마치 비어 있는 공간처럼 바깥으로 열린 투명한 통과지점이 된다. 시선은 끝까지 열려 있고, 어둠을 통과하면 세계의 빛이 나타난다. 아오야마는 일본의 ‘부끄러운 재현’이 새겨져 있던 시기를 터널의 어둠 속에서 통과해나간다. 이 장면을 조명하는 어둠과 빛의 짧은 교차에서 기나긴 흑백의 시간을 마치고 색채를 회복하는 <유레카>의 여정이 암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터널의 어둠을 통과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도쿄 공원>에서 의뢰를 받고 어느 여인의 사진을 찍는 코지는 정작 자신을 사랑하는 이복형제 누나를 똑바로 바라본 적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지를 끝없이 생산하면서도 정작 타인을 바라본 적 없는 코지는 현실과 이미지의 경계에서 회전하는 소용돌이에 정체되어 있다.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는 것에 실패하고 타인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데 붙들린 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미지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다는 무력한 결론을 의미하는 바는 아니다. 또 다른 이미지의 터널을 통과하고 하늘을 바라보기 위한 위치를 조정하는 <구름 위에 살다>의 계단과 고층아파트의 엘리베이터는 새로운 질문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질문의 답을 개진하기 전에 아오야마 신지는 대답을 멈췄다. 하지만 중단되어버린 터널의 여정을 되짚는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를 가늠해보는 희망의 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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