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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2022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 사회자 권해효, “22년차 터줏대감”
이자연 2022-11-30

무려 22년이다. 강산이 두번 바뀌고 다섯번의 월드컵과 네명의 대통령을 거쳐오는 동안 권해효는 서독제와 함께했다. “서독제 시즌이 오면 촬영이든 해외 일정이든 어느 것도 이것보다 더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 이젠 삶의 한 부분이 된 서독제를 통해 그는 초겨울이 바짝 다가왔음을 깨닫는다. 바닷가에 남은 모래 줄무늬로 파도의 깊이를 짐작하듯, 권해효에게 새겨진 영화제의 잔상으로 긴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다.

-서독제 개막식 사회자를 맡아온 지 22년차다. 한 가지를 오랫동안 하는 게 어려운 세상에서 지난 20여년을 돌아보면 어떠한가.

=처음에는 10년만 하려고 했다. (웃음) 그런데 어느덧 10년이 흘러 4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생각을 고쳐먹었다. 매해 서독제에 처음 오는 친구들에게 ‘어서 와’ 하고 반겨주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독립영화라고 하면 상업영화로 가기 위한 전 단계나 저예산 소규모 영화 정도로만 생각하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한다. 열심히 연기하는 배우로서 관객이 독립영화의 진가를 잘 들여다볼 수 있도록 오랫동안 안내해주고 싶다. LA다저스와 67년을 함께한 장내 아나운서 빈 스컬리처럼 우직하게 사람들을 기다리려 한다.

-독립영화가 담고 있는 다양한 소재와 메시지를 20년 넘게 접하다 보면 자신의 변화를 느낄 것 같다.

=서독제를 함께하면서 나도 많이 배웠다. 독립영화는 다양한 소재를 다룬다. 환경, 여성, 동물, 아동, 지역…. 그전에는 어떤 문제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영화를 통해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사실 서독제의 명칭도 여러 번 바뀌었다. 1994년에 금관단편영화제였다가 1999년엔 한국독립단편영화제로 바뀌었고, 2002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때 ‘단편영화제’라는 명칭이 꼭 붙었던 이유가 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독립영화 하면 단편영화라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에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면서 창작자들이 디지털카메라를 쓰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독립영화 장편 출품작이 늘어나게 되었다.

-서독제에서 2018년부터 진행해온 ‘60초 배우 프로젝트’를 먼저 제안했다고.

=내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나의 아내이자 배우인 조윤희씨가 처음 제안한 것이다. 어느 날 유튜브에서, 60초 동안 자그마한 사무실에서 초시계를 두고 연기를 선보이는 콘테스트 영상을 보게 되었다고 하더라. 재야의 배우들이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조윤희씨의 의견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가 생산되는 와중에 한편에서는 배우 기근이라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배역을 잡을 기회가 부족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60초 배우 프로젝트가 배우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사실 60초 배우 프로젝트는 신인 발굴의 자리는 아니다. 경력이 20년 된 사람이 나올 수도 있고, 갓 연기를 시작한 사람이 무대에 설 수도 있다. 배우들은 수없이 많은 오디션을 본다. 그리고 수없이 많이 떨어진다. 그런 그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통해 ‘당신은 너무 매력 있고, 당신의 연기를 지지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실제로 이 자리를 거쳐간 배우들이 “앞으로 10년을 버틸 힘을 갖게 됐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말이 가장 감사하고 뭉클하다. (웃음) 사실 배우라는 직업은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내가 잘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게 한다. 그래서 배우 스스로 자신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제일 자신 있는 대사와 컨셉을 선택해 1분 동안 선보이도록 구성했다. 60초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심사를 하면서 가장 눈여겨보는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한마디로 진실됨. 도대체 이 사람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이런 대사를 준비했나 궁금해지는, 자기만의 진실됨을 간직한 사람에게 자연스레 이끌린다. 실제 심사할 때에는 한편을 10번씩 본다. 예심할 때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를 거의 밤샌다.

-서독제 외에 다른 영화제에도 꾸준히 참석하며 영화제에 대한 큰 애정을 드러냈다. 올해는 유독 영화제 폐지 소식이 많이 들렸다.

=영화제는 공통적으로 지역성을 띤다. 지역에서 비롯한 시민의 힘과 근간이 필요한데, 매년 지자체와 국비 지원으로만 운영하다 보니 정치적 영향권에 따라 존폐가 엇갈리는 태생적 한계를 갖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엔 정치적 보복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영화제는, 특히 단편영화의 경우 관객과 만나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에 존속의 의미가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후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사회적 슬픔의 자장 안에서 부채감을 담은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왔다. <죄 많은 소녀>부터 <살아남은 아이>, <이월>까지. 많은 것을 빨리 잊으라고 독촉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천천히 기억하는 자리가 영화제가 아닐까. 우리에겐 다양한 영화제가 여전히 필요하다.

-작품 선택을 보면 맡은 역할의 비중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듯하다. 오랜 시간 배우로 달려온 사람으로서의 여유일까.

=그냥 나의 원칙이다. 먼저 연락 온 사람과 작업하기. A 감독에게 연락이 오고 다음날 B 감독에게 연락이 왔을 때, B의 작품이 규모가 더 크고 배역도 더 매력적으로 보여도 A 감독의 제안에 응한다. 이 원칙을 계속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놓친 일이 내 인생을 망치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연연하다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 수없이 많은 배우를 지켜보기도 했고. 나의 쓸모를 알고 먼저 불러준 이들과 함께 일하는 게 나에게 더 중요하다. 다만 안 하는 건 있다. ‘권해효씨를 생각하며 썼다’는 말들에 현혹되지 않는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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