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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탑’, ‘이후’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소은성 2022-11-30

영화 <>은 여섯개의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다(여기에서의 시퀀스 구분은 이 글의 진행을 위한 자의적인 것이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는 영화의 유일한 공간인, 병수(권해효)가 머물게 될 건물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진다. 1층에서 식사를 마친 세 사람, 병수와 병수의 딸 정수(박미소), 그리고 건물주 해옥(이혜영)은 함께 계단을 오르며 이후에 등장하는 지하 작업실, 2층 식당, 각각 3층과 4층의 세입자가 살고 있는 집, 그리고 4층 집에서 연결된 옥상을 차례로 지나친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 숏은 옥상 난간에 살짝 기대어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는 정수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프레임 안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무섭지 않으냐고 묻는 병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는 이전 숏에서 병수가 위치했던 자리, 해옥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던 옥상의 다른 편으로부터 들려왔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영화의 관객에게 외화면 영역이 인식되는 기본적인 방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옥상에 있는 정수의 뒷모습으로부터 곧바로 이어지는 숏, 건물 밖 지상에서의 쥴(신석호)이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될 때, 건물이 휘청거린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해도 막무가내식의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지상의 공간은 병수의 목소리로부터 자극된 외화면 영역에 대한 인식을 4층 건물 높이만큼 낙하시킨 셈이기 때문이다.

진위 파악은 중요치 않다

이와 같이 외화면 영역을 보증해주지 않는, 프레임 안에 위치하지 않은 인물의 목소리에 대한 더욱 정확한 예는 영화의 네 번째 시퀀스의 마지막 숏에서 찾을 수 있다. 선희(송선미)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고, 오래도록 그를 기다리다 지친 병수가 침대 위에 눕는다(4시30분쯤을 가리키고 있던 시계가 그다음, 병수가 침대에 눕기 직전인 숏에서는 11시50분쯤을 가리키고 있다. 두숏에서 모두 창문으로 햇빛이 비춰드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밤이 지났던지, 아니면 시간이 거꾸로 흘렀음에 틀림없다). 그 위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목소리들로만 제시되는, 병수와 집으로 돌아온 선희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 대화는 혼자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그의 한탄에 가까운 혼잣말과 함께 이내 그치고 만다. 뒤이어 두 사람의 대화 소리와는 다른 질감의, 선희의 목소리가 병수를 부른다. 여기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외화면 영역과 관련을 갖는 것이 불가능한 소리이기 때문에 오프 사운드라고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병수를 부르는 선희의 목소리는 앞선 대화에 이어지는 오프 사운드처럼 들리기도 하고, 동시에 소리의 다른 질감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을 선희로부터 비롯된 외화면 사운드처럼 들리기도 한다. 물론 중단 없이 다음 숏으로 넘어가는 이 영화의 관객은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진실을 판단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닌 표면이다. 이 영화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병수와 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들 모두(건물의 현현처럼 마지막 시퀀스를 제외하고 모두 같은 옷을 입고 등장하는 해옥을 제외하고) 영화의 외화면 영역에서 잠시 목소리의 상태로 머문 뒤에 사라진다는 것이다. 프레임의 확장이라는 외화면의 정의는 그로 인해 불안정해진다. 오히려 시간적인 단절을 예비하는 공간으로서 이 영화의 외화면은 프레임의 내부와 연속성을 잃어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떠한 다른 시간에 속한 공간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시퀀스이자 영화의 마지막 신에서 그것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세개의 숏으로 구성된 이 신은 병수와 지영(조윤희)이 건물 바깥으로 나오며 시작된다(병수는 첫 번째 시퀀스와 동일한 옷차림이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은 지영이 프레임에서 나가면(프레임 바깥에서는 잠깐 지영의 목소리가 지속되고), 병수는 건물 앞에 서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문다. 컷이 바뀌고 건물의 앙각숏을 보여준 다음, 마지막 세 번째 숏에서는 다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병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잠시 후에 쥴이 병수의 차를 건물 앞에 세운다(쥴이 입은 흰색 셔츠는 첫 번째 시퀀스와 동일하지만, 이때 병수는 이미 차를 몰고 영화사 대표를 만나러 갔었다). 병수는 차에 타서 시동을 켰다가 끈다. 그러고 나서 차에서 내리면, 건물로 돌아오는 정수(첫 번째 시퀀스와 동일한 옷차림이지만, 그때는 없었던 우산을 가지고 있는)와 마주친다.

이 마지막 신에서 시간적인 단절이 일어나는 순간을 정확하게 지목하기란 어렵다. 심지어는 앞서 네 번째 시퀀스에 대해 서술하며 언급한 두개의 시간처럼, 완전히 불가능한 시간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또한 쥴이 자동차를 건물 앞에 세우고, 병수가 자동차에 탔다가 내리고, 정수의 손에 우산이 들려 있는 이유를 약간의 무리한 정당화라도 할 수 있다면 전체적인 서사 진행이 연속적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이것은 영화 전체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간 안에 머물기 위해서

하지만 어떠한 경우든 여기에는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 과거의 병수든, 아니면 현재도 과거도 아닌 불가능한 시간에 속한 병수든, 영화의 관객이 마지막에 보게 되는 것은 지영이 사라진 이후의 병수다. 마찬가지로 다섯 번째 시퀀스의 병수는 선희가 사라진 이후의 병수이고, 세 번째 시퀀스의 병수는 정수가 사라진 이후의 병수다. 바로 병수가 겪는 그 ‘이후’의 시간이 지하층부터 4층까지, 그리고 마지막 지상의 건물 바깥에 이르기까지 영화 <>이 통과한 단절과 연속의 어지러운 시간들의 뼈대를 이룬다. 그런 점에서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째 시퀀스, 그러니까 병수가 사라진 이후에 지하층에서 이루어지는 정수와 해옥의 대화는 아이러니한 듯 보이지만, 이 영화에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적확한 단어를 제시한다. 정수는 자신을 포함하여 건물에서 사라지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영화의 마지막까지 건물에 남게 된 병수를 오히려 ‘실종자’로 호명한다.

정수, 선희, 그리고 지영이 외화면을 통과해 건물 안에 흐르는 시간의 바깥으로 사라졌다면, 지하층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프레임 안에 위치한 병수는 그들과 다른 방식의 실종을 통해 계속해서 건물의 시간 안에 머문다. ‘이후’의 시간이 전제되는 이 영화의 건물 안에 머문다는 것은 병수에게, 각각의 층마다 존재했던 이전 시간으로부터 사라진 뒤에, 그 흔적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를테면, 선희가 사라지기 이전과 이후의 병수가 동일한 사람이기 위한 조건이다.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가지가 앙상한 나무의 뒤쪽 건물 외벽에 새겨진 시커먼 자국, 또는 흔적처럼 멈춰 서 있는 병수의 모습은, 계속되어야 할 ‘이후’를 살기 위해 또 다른 실종을 준비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쓸쓸함이 담겨 있다. 언제나 덧없고 일시적이고 사라져버리고 마는 시간만이 그의 존재를 보장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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