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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최양일 감독: 폭력으로 세상에 맞서다

지난 11월27일, 최양일 감독이 방광암으로 별세했다. <피와 뼈>(2004)의 거칠고 폭력적인 주인공 김준평처럼, 언제나 세상을 거스르며 꼿꼿하게 살아남을 것 같은 감독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아무리 강인해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시대도 변했다. 스탭에 대한 폭언과 폭력으로 유명했던 최양일을 마냥 추앙하기도 쉽지 않다. 재일 조선인 2세로서 험난한 세월을 헤쳐온, 빛나는 영화들을 남긴 최양일 감독의 명복을 빈다.

최양일은 1949년 나가노현에서 태어났다. 조선학교를 졸업한 후, 사진전문학교에 들어갔다가 중퇴하고 영화계로 뛰어들었다. 조명부, 소품부를 거쳐 연출부로 갔고, 오시마 나기사 연출의 <감각의 제국>(1976), 마쓰다 유사쿠 주연의 <가장 위험한 놀이>(1978) 등에서 수석 조감독을 맡았다. 첫 연출을 맡은 작품은 드라마 <프로헌터>(1981). 이후 뮤지션이며 배우인 우치다 유야가 기획한 <10층의 모기>(1983)로 감독 데뷔를 했다.

<10층의 모기>는 경찰관이 총을 들고 인질강도를 했던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둔 영화다. 조직에서 정의를 지킬수록 나락에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일본은 버블경제로 호화판이었지만, 개인은 모기 같은 존재였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 최양일은 한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무너져내리는지 차분하게 보여준다. 자극적인 시선 없이, 다큐멘터리를 찍듯 냉정하게 일상을 쌓아가는 연출은 탁월했다. <의리 없는 전쟁> 시리즈를 통해 후카사쿠 긴지가 완성한 범죄실록 영화를 자신의 스타일로 가져온 것이다. <10층의 모기>는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와 요코하마영화제에서 신인상을 받았고, <기네마준보> 베스트10에도 오르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됐다.

연출력을 인정받은 최양일은 당시 소설과 만화 원작의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를 만들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가도카와 영화의 감독을 맡는다. 아카가와 지로 원작의 <언젠가 누군가 살해당한다>, 기타카타 겐조 원작의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1985)와 <검은 드레스의 여자>(1987), 다카구치 사토스미의 만화 원작 <꽃의 아스카조>(2004) 등이다. 하라다 도모요의 <검은 드레스의 여자>와 와타나베 노리코의 <언젠가 누군가 살해당한다>는 인기 아이돌 주연이고, <꽃의 아스카조>도 소녀들의 활기찬 우정과 싸움을 그린 오락영화다.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는 당시 인기 작가인 기타가타 겐조의 소설을 각색한 정통 하드보일드 범죄물이다. 범죄에 얽힌 친구의 요청으로 오키나와에 갔지만, 주인공이 바라본 것은 아수라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고, 누구도 헤어날 수 없는 이전투구.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지독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뿐이다.

버블이 붕괴하고, 최양일은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최양일은 <10층의 모기> 인터뷰 당시, 양석일의 소설 <택시광조곡>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1993년, 위성방송국 WOWOW에서 영화로 데뷔 못한 감독들과 과소평가된 중견 감독들이 중편영화를 연출하는 ‘J 무비 워즈‘를 기획했다. 시네콰논의 이봉우가 프로듀스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는 중편으로 만들어 방영했고, 장편으로 편집하여 극장에서 개봉한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재일교포, 동남아인 등 비일본인들이 주연인 인정희극이다. 90년대 신주쿠라는 무국적, 혼돈의 공간을 배경으로, 아웃사이더들이 살아가는 일본 사회를 슬프지만 따뜻하게 바라본다. 최양일 스스로 말하듯,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가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면, 최양일의 영화는 끈적끈적하고 울퉁불퉁한 삶을 향해 달려간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기네마준보>의 작품, 감독, 각본, 주연배우상과 일본 아카데미 영화제의 작품상과 감독상 등 11개 부문을 석권했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를 만든 후, 최양일은 독특한 행보를 보인다. 1994년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꾸고, 1996년 한국의 연세대학교에서 유학을 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개 달리다>(1998)의 나카야마와 히데요시는 ‘쓰레기 같은’ 인생을 달려가면서, 포기하지도 돌아서지도 않는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가 비주류 인생의 밝은 면이라면, <개 달리다>는 그들의 이면, 어두운 면이다. 최양일은 실패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막대한 애정을 품으면서도 욕을 하며 질책하고 때로는 과하게 폭력을 가한다.

<막스의 산>(1995)은 피도 눈물도 없는 다카무라 가오루의 소설이 원작이다. 부모의 동반자살에서 겨우 빠져나온 소년이 성장해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60년대 학생운동의 아수라장을 거친 사람들이 있다. 속고 속이며 살아남은 과거와 끔찍한 살인의 행적이 겹치면서, <막스의 산>이 보여주는 세상은 싸늘한 ‘얼음의 집’이다. 참혹한 시대에 개인은 상처받고, 얼어붙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드보일드의 최전선이라 할 최양일은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쌓았다. 70년대 ATG(예술영화관조합) 출신 사회파 작가들의 선 굵고 실험적인 스타일과 다르고, 80년대 자주영화의 자유분방하면서도 지적인 스타일과 다르다고 평가된다.

잠시 <형무소 안에서>(2002), <>(2004) 같은 따뜻한 영화를 연출한 최양일은 마지막 걸작 <피와 뼈>를 만든다. 1923년,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넘어간 김준평은 야수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원하는 것은 오직 돈과 섹스 그리고 아이뿐이다.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김준평은 주변의 모든 이들을 지옥으로 몰아간다. 김준평은, 어떻게 그런 괴물이 되었을까. <피와 뼈>의 첫 장면은 오사카로 향하는 배 위의, 젊은 김준평의 앳된 얼굴이다. 그러곤 바로 아내를 때리고 겁탈하는 중년의 김준평을 보여준다. 괴물이 된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김준평은 살아남기 위해 최악의 길, 짐승을 선택했다.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있는 야수의 길.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괴물이 되기로 결심한 김준평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않은 채, 기꺼이 지옥에서의 죽음을 택했다. 그의 참담한 인생을, 기타노 다케시는 섬뜩한 무표정으로 섬뜩하게 보여준다. <피와 뼈>에는, 최양일이 그동안 만들었던 영화들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너무나 폭력적이고 차가운데 곳곳에서 비극적인 웃음이 터져나온다. 너무나 비참하지만 그대로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때의 비어버린 웃음이다. 그들은 그렇게, 지독한 세상을 살아왔다. 김준평도, 최양일도.

최양일의 마지막 영화는 시라토 산페이의 만화가 원작인 <카무이 외전>(2009)이다. 닌자들의 저항을 그린 전설적인 만화. 최양일은 영화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폭력적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지만, 그것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 최양일은 폭력으로 세계와 맞섰다. 때로는 지극히 차갑게, 때로는 무정부주의적인 온정과 연대를 은유하며. ‘개 달리다’라는 제목처럼, 최양일은 치열하게 달리면서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그리고 홀연히 떠났다. 아마도 저 세계에서 최양일은 이방인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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