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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창밖은 겨울’,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로 돌아오다
오진우(평론가) 2022-12-14

탁구를 생각하면 올해 두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하나는 <실종>이다. 부녀는 탁구공 없이 탁구를 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리는 들린다. 부녀는 랠리를 이어가고 카메라는 네트를 줌인한다. 부재를 느끼게 하는 이 기묘한 영화의 마지막 숏은 네트를 통해 윤리의 경계를 형상화한다. 다른 하나는 <창밖은 겨울>이다. 선배 버스 기사들이 휴식 시간에 탁구를 친다. 심판을 보는 석우(곽민규)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비춘다.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그의 얼굴 위로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한다. 이내 석우는 선배들에게 심판을 제대로 안 보냐며 꾸중을 듣는다. 경계를 가르는 네트에 위치한 석우. 그는 시간의 경계에 멈춰 있다. 과거와 현재, 그 사이에서 석우는 잠시 길을 잃었다.

MP3가 촉발시킨 감정들

<창밖은 겨울>엔 두개의 인력이 석우에게 작용한다. 하나는 과거로, 다른 하나는 현재로 그를 이끈다. 이러한 움직임은 터미널에서 본 MP3로부터 시작된다. 석우는 영화감독을 하다 모든 걸 접고 고향 진해로 내려와 버스 기사를 한다. 어느 날 터미널에서 한 여자의 뒷모습을 본다. 여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의자엔 MP3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석우는 유실물을 담당하는 매표소 직원 영애(한선화)에게 MP3를 전달한다.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눈다. 영애는 유실물에 대해 “사실은 버리고 싶은데 잃어버린 척하는 게 아닐까요?”라고 석우에게 말한다. 석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날 이후 석우는 계속해서 MP3의 주인이 왔냐고 영애에게 묻는다. 석우가 이러는 이유는 놓고 간 사람이 전 애인인 수연(목규리)일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추측이라기보다는 확신에 가깝다. 만약 그 물건이 버려진 것이라면 과거를 부정당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이다. MP3는 석우가 수연에게 줬던 물건으로 그녀가 이별을 고한 날 갑자기 꺼낸 물건이다. 영화에 MP3와 관련한 특별한 전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수연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 기폭제임은 분명하다.

석우가 MP3를 발견한 이후 영화에 플래시백이 등장한다. 단 두 장면만 등장하는데 모두 수연과의 에피소드로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는 그녀와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플래시백엔 진자운동을 하는 인테리어 소품이 등장한다. 이는 무한동력을 얻어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으로 이들이 연인 상태임을 말해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물리학이 아니다. 언제든 그것에 손을 대 멈출 수 있다. 두 번째 플래시백은 그런 장면이다. 수연은 석우에게 헤어지자고 한다. 석우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 여기서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석우가 집에서 들어가지 않는 방이 하나 있다. 그곳에는 영화와 관련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방문은 고장이 나서 닫아도 어느새 살짝 열린다. 석우는 유혹의 손짓을 하는 방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다. 이런 방문을 MP3가 완전히 열어젖힌 것이다. 이를 통해 석우가 과거를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과거를 눈에 보이지 않게 덮었을 뿐이다. 진자운동을 하는 소품처럼 석우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기억들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었다. 단지 그가 그것에 대해 함구했을 뿐이다. 버스 기사로 새롭게 인생을 출발한 듯 보였으나 실상 그는 과거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에 잠겨 진해 중원로터리를 빙빙 돌았던 석우의 버스처럼 말이다.

영애는 그런 석우를 과거에서 현재로 이끈다. 그녀도 석우처럼 유실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유실물이 버린 물건이기에 주인이 찾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녀의 확신은 석우의 확신을 접하면서 변한다. 이는 MP3를 고치러 석우와 같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바뀐 생각이다. 수리점을 찾으러 나선 여정은 미로에서 길을 잃은 것과 같았다. 그 여정의 끝에서 석우는 고친 MP3를 찾으러 가지 않는다. 버린 것으로 단정 짓는 석우에게 영애는 왜 혼자 생각하고 단정 짓냐고 성낸다. 영애는 석우가 말하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추게 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석우는 이 기회를 스스로 덮어버린다. 고친 MP3 안에는 무엇이 있던 것일까? 그 안에 수연이 녹음했던 파일이 있다면 그것은 수연이 놓고 간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이후에 송년회에서 석우는 수연과 대면하지만, MP3에 대해 묻지 않는다. 대신에 석우는 요즘 탁구를 치고 있다며 횟집 앞에서 어색한 포즈를 취하며 애써 잘 지내고 있다고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탁구를 통해서 과거를 극복하고 싶어서 영애와 복식으로 탁구 시합에 나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시합 당일 수연에게 전화가 오고 석우는 완전히 무너진다. 과거를 줄곧 외면하다가 시합날 마주한 것이다. 결국 시합 파트너인 영애에게까지 피해를 준다. 영애에게도 탁구 시합은 중요한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 탁구 선수였던 영애는 코치였던 아버지의 하드 트레이닝이 싫어서 즉흥적으로 그만뒀었다. 그녀 역시 탁구를 통해 과거와 화해를 시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본 것은 석우의 무너짐이었다. 이때 석우를 바라보는 영애의 얼굴에 눈물이 살짝 글썽인다. 영애는 석우를 통해 무엇을 봤던 것일까?

제자리걸음이 드디어 끝나다

MP3의 주인이 애초에 석우였기 때문에 모든 여정은 수많은 길을 돌아 자기 내면을 향하는 과정이었다. 석우는 걸어 잠갔던 문을 열고 방 안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또한 부모를 모시고 같이 찍었던 단편영화를 보는 여유도 갖게 된다. 메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석우에게 과거는 이제 잊고 싶던 것에서 추억으로 바뀐다. 하지만 영애 앞에서는 미안한 게 있는지 쭈뼛거린다. 이때 영애의 마지막 행동이 인상 깊다. 그녀는 쿨하고 배포가 큰 사람이었다. 그녀는 석우가 수리를 맡겼던 MP3를 찾아온다. 이제 MP3의 주인은 영애다. 영애는 석우의 버스에서 일부러 자는 척을 하며 그를 옆자리로 끌어당긴다. 나란히 앉은 이들은 이어폰을 나눠 끼고 노래를 듣는다. 아마도 MP3는 석우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MP3의 주인은 누군지 알 수 없다. 모든 해석은 석우의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좌표 없는 물건을 보고 각자의 기억과 해석을 입히며 벌어진 해프닝이다. MP3는 텅 빈 기표로 과거라는 라벨을 떼고 이제 석우와 영애의 현재를 기입함으로써 둘을 잇는 하나의 매개체가 된다.

창밖은 진짜 겨울이 됐다. 크랭크업 이후 3년 만에 개봉한 <창밖은 겨울>은 지난해 겨울을 장식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연상시킨다. 두편 모두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미사키는 영화의 끝에서 빨간 차의 주인이 된다. 마스크를 벗은 그녀의 얼굴에 흉터는 사라졌다. 뻥 뚫린 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는 차의 뒷모습을 보며 응원을 보내게 된다. <창밖은 겨울>도 마찬가지다. 석우와 영애가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응원을 하게 된다. 제자리걸음을 했던 이들은 드디어 앞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미래를 가리킨다. 영화는 겨울에서 끝이 나지만 스크린 밖 우리에겐 봄을 기다리는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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