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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희망의 요소’, 더이상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

닫힌 문 사이로 소리가 들린다. 내연남과 통화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소심한 남편은 아내의 외도를 외면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의 요소>의 주된 무대인 부부의 집에서 소리는 프레임의 견고한 경계를 넘어 들린다.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남편은 아내와 대화하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집 안에 진동하는 하수구 냄새를 맡지도 못하지만, 실내에 울리는 소리만큼은 분명하게 듣는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화면에 침입하지 않는다면, <희망의 요소>의 영화적 사건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집 안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채로, 상대를 바라보지도 않고 주변에서 나는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남자는 그러나 많은 것들을 듣는다.

첫 장면은 선언적이다. 4:3 비율의 비좁은 화면 위로 아내의 상처난 발과 발을 붙잡는 남편의 손이 나타난다. 어떤 설명도 없이 누군가의 손과 발이 과감하게 스크린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개입하는 것은 프레임 바깥에서 들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채로 부부의 목소리가 화면 위로 들려온다. 소리의 근원인 얼굴과 결합하지 않는 목소리는 실내 공간을 부유하듯이 전해진다. 목소리는 건조해진 부부의 관계를 드러내고, 화면을 지탱하던 시각적 구도에 긴장을 부여한다. 소리는 그 자체로 인물들에게 반응을 요구하는 하나의 문제이자 바깥의 사건이며, 프레임에 형성되는 외화면과의 갈등이다. 단 두 사람의 스탭으로 만들어진 열악한 제작조건의 한계를 고스란히 영화의 태도로 삼으려는 듯 영화를 움직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만을 남겨두는 첫 장면에서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목소리다. 그것은 프레임을 초과하고, 고정된 구도를 침범한다.

결혼의 풍경

<희망의 요소>의 연출자이자 프로듀서를 제외한 모든 역할을 도맡은 이원영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부부의 이야기를 택했다. 고시 공부를 포기한 남편은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며 단편소설을 쓰고, 아내는 학교 교직원으로 일한다. 아내에게는 다른 남자가 있으며, 남편과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 이 단순한 서사는 영화의 표면에 아무런 치장도 덧대지 않은 맨몸을 적시한다. 특별한 이야기의 변화에 기대지 않는 부부의 감정적 위기는 영화의 근본적인 질문을 부른다. 상대방을 바라볼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다가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 또 다른 근본적 질문과 함께한다. 두 사람의 시선과 행위와 반응을 조직하는 숏을 어떻게 결합하고, 어떻게 나눌 것인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서도 부부는 같은 화면에 공존하지 않고 각자의 장면에 머물러 있다. 분리된 장면 속에서 남편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아내의 말투와 표정, 탄식과 한숨을 주시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면서, 나를 경멸하는 상대방이 보이는 반응을 그는 주의 깊게 바라볼 것이다. 장뤽 고다르는 “남자가 여자를 천천히 바라보는 순간은 그녀를 사랑할 때가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떠난다고 통보하고, 싫어한다고 이야기할 때”라고 말했다. <경멸>에서 시나리오작가 폴(미셸 피콜리)이 아내 카미유(브리짓 바르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왜 날 사랑하지 않지?”라고 물어보자 카미유는 “그래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한다. 실제 부부였지만, 위태로운 관계의 위기를 겪고 있던 아나 카리나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비브르 사 비>에서 고다르는 클로즈업된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렀을 때,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고, 얼굴에 드러나는 신호를 예민하게 해석한다. 그녀의 표정은 관계의 지나온 시간을 가리키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프레임을 조직하고 인물들의 시선을 빌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탐색하게 된다. 한 편의 영화에서 부부의 위기는 그러므로 장면의 세부에 담긴 신체의 민감한 반응을 주시하는 필연적인 전제다.

이것은 결혼 생활의 위기를 다루는 단순한 서사가 <희망의 요소>의 단점이라고 말하는 몇몇 평자들의 평가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이야기에 의존하는 영화가 아니라 신발을 갈아 신고, 음식을 만들고, 글을 쓰고,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의 이해를 절실하게 바라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숏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위기에 노출된 권태로운 부부라는 설정은 서사를 견인하거나 일상적인 공감을 일으키는 요소가 아니라 신체적 영화를 성립시키기 위한 가장 작은 단위의 여건이다. <희망의 요소>는 하나의 신체적 증상이다. 상대의 행동에 반응하고 예상치 못한 충동에 사로잡히는 몸을 비추는 증상의 영화다. 그 신체가 머무는 부부의 집에는 고정된 프레임이 현실의 지각을 절단해서 제시할 때 발생하는 긴장감이 감돈다. 남편과 아내의 숏/리버스 숏이 이질적인 단면으로 잘려져 나타날 때, 일상적 공간이 파편화된 화면의 부정교합으로 변형되는 불안이 드리워 있다.

식탁에 앉은 아내와 소파에 있는 남편이 나누는 대화 장면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두 사람의 엇갈리는 시선으로 교차한다. 이 영화에서 공간을 파편적으로 나누는 장면의 운용은 신체와 목소리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도록 요구한다. 목소리는 분명 서로에게 가닿고 있지만, 두 사람이 머무는 장면들은 같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것처럼 어색함을 드러내며 이미지와 사운드에 대한 근본적인 조정을 제기하는 것이다. 좁은 화면비에 반복되는 행동들로 장면을 쌓아나가는 이 영화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를 조정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일그러뜨려 다르게 바라보는 시도가 된다.

목소리의 유혹

남편은 다니는 직장이 없고, 가족은 그를 빼놓고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는 간접적인 정보로만 주어진다. 아내와 불화하는 그에겐 삶을 지속하는 안정적인 형식이 없다. 꿈속에서 그는 단편소설이 신춘문예 수상작으로 선정됐다는 전화를 받지만, 마음 편히 기뻐하는 대신 베란다로 나가서 자기 뺨을 때린다. 그의 제한된 지각 안에서 세계는 불안정하게 흩어지고 있다. 비좁은 화면을 침범하는 소리는 그런 남편의 시야 바깥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암시한다. 텔레비전 소리와 아파트 단지에서 투신하는 사람의 비명이, 내연남과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의 신음과 절망한 남편에게 건네지는 시각장애인 연주자의 하모니카 소리가 그 안으로 접혀 들어온다. 소리는 그의 신체를 반응케 하고, 그의 반응은 숏의 윤곽을 결정한다.

아내의 외도를 ‘엿들은’ 남편은 집을 나서기 직전에 침실 문 앞에서 철봉운동을 한다. 그 자체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행동이지만, 정말 의문스러운 것은 그 장면이 놓여 있는 위치다. 절망감에 휩싸여 집을 떠나기 전에 왜 이런 운동을 하는 걸까. 심리적인 인과관계에 근거하지 않는 행동은 논리적인 해석보다 몸짓의 연상으로 생각을 이끈다. 남편이 철봉운동을 할 때, 카메라는 떠오르고 바닥에 닿기를 반복하는 남편의 발을 포착한다. 이 모습은 이전에 남편이 마주한 아파트 단지의 추락사와 유사성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꿈속에서 베란다로 걸어나가던 남편의 감춰진 열망이자 창문 바깥에서 비명으로 들려오던 누군가의 추락을 떠올리는 충동과 연결되어 있다. 베란다에 나가고 단단하게 고정된 틀에 목을 거는 남편은 꿈을 꾸고, 운동을 하는 것이지만 같은 몸짓으로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는 상태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술에 취해 남편이 없는 집에 돌아와, 안정된 지지대를 잃어버린 듯 휘청이는 아내의 동작은 그에 조응하는 하나의 반응으로 작용한다. 아내는 남편이 남겨둔 단편소설을 읽고 화장실에서 구토한다. 소설을 읽고 구토하는 것은 표준적인 리액션을 넘어서는 반응이다. 구토하는 아내의 옆에는 남편이 사둔 화분이 놓여 있다. 그것은 아내가 내연남과 외도를 벌이던 순간에 집에 돌아온 남편이 그 모습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물이기도 하다. 아내가 건넨 돈은 남편이 구매한 화분으로, 이제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남편을 환기하는 기호로 옆에 놓여 있다. 말하자면, 지금 아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남편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부부의 이야기를 중단한다. 이 장면들은 표면적으로 남편이 집을 떠나고 아내가 그의 부재를 확인하는 한 가지 결말을 가리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남편이 자살을 선택하고 아내가 그 시체를 목격했을지도 모르는 부부의 파국적인 가능성을 배면에 품고 있다.

유토피아에 도착하기까지

그 자리에서 <희망의 요소>는 1년 후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이야기 전개나 인물의 심리와는 상관없는 비약의 지점이다. 과감하게 시간을 넘어서는 선택이 두 사람을, 혹은 영화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것은 인물들의 결단에만 기댄 결과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감정적 선택도 아니다. 반대로 그 어떤 일관된 맥락에도 기대지 않는 태도를 갖춤으로써 이 영화는 제목에 적시된 ‘희망의 요소’를 발견하고자 한다.

부부는 단지 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던 공간에서, 그들을 둘러싸던 환경적 규정에서 벗어난다. 남편은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고 글을 쓰는 전업주부가 아니라 육체노동자로 변하고, 아내는 학교 교직원이 아니라 낯선 장소에 도착한 여행자가 된다. 서울을 떠나 속초에서 재회한 부부가 아무런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바다에 도착하는 여정은 그러므로 아직 밝혀지지 않는 영토로 영화의 지각을 안내하는 경로가 된다. 하지만 1년 뒤의 세계는 무조건적인 환대와 기쁨으로만 이루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다. 절망을 극복한 화해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에게 한 가지 제스처가 필요하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한 장면, 술에 취한 부부가 노래방에 앉아 남편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그래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연출자의 계획대로라면 이 장면에서 남편이 부르는 노래는 2절까지 쭉 이어졌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가 불현듯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입을 맞추는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화면에 흐르던 목소리는 중단된다. 연출자는 배우가 선택한 우연적인 충동을 수용해 원래 계획을 버리고 침묵 속에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포옹으로 장면을 지속한다. 입맞춤과 포옹이라는 사랑의 몸짓은 이 순간 장면의 형식을 결정하는 하나의 결정적인 몸짓이 된다. 아내는 노래를 부르는 남편에게 입을 맞춘다. 이 제스처는 두 사람의 불안을 촉발하고, 1년 전의 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로서의 목소리를 차단한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잠시라도 위기는 없을 것이다. 1년 만에 재회한 부부가 횟집에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도, 횟집 바깥에 놓인 카메라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 장면들에서 술에 취한 부부(를 연기한 배우)는 1년 전과 1년 뒤의 시간, 계획된 행동과 충동적인 몸짓, 목소리와 침묵 사이에서 미묘하게 진동한다.

영화와 입맞춤

목소리가 지워지고 두 사람의 몸이 맞닿는 지점, 사랑과 의심, 따뜻한 환대와 기각되지 않은 불안이 뒤섞인 그 자리에서 부부의 관계는 새롭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서사의 논리가 제공하는 결말도, 인물들의 심리적인 선택에서 비롯되는 상태도 아니다. 첫 장면을 구성하고 있던 두 신체의 접촉과 목소리가, 두 신체의 접촉과 침묵이라는 형태로 대응을 이루며 변주되고 있을 뿐이다. 이 장면이 지속되는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드는 작업은 입맞춤과 같은 돌연한 신체적 행위가 된다.

목소리를 발명한 유성영화는 역설적으로 언제든 그 소리에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감각을 무기력하게 방치하는 <희망의 요소>의 무대에서도 소리만큼은 계속해서 존재감을 드리우며 부부의 위기를 심화한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입을 맞추며 목소리를 지우는 영화의 한 장면은 소리의 질서에 저항하는 하나의 무성적 이미지가 된다. 부부는 그들의 미약한 몸짓으로 잠시나마 발화를 중단하는 침묵의 순간을 발견한다. 비록 그 몸짓은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두 사람의 시간에 누락된 한 가지 모습을 되돌려준다. 입맞춤과 포옹은 그렇게 두 부부가 나누는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소리를 중단하는 연인의 형상으로 되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남편과 아내는 혼자 남겨졌을 때만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는 동질적인 존재들이다. 하지만 영화가 운용하는 파편화된 숏의 연쇄에서 그들의 동질성은 발견될 수 없었다. 같은 순간에 눈물을 흘리고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영화는 노래가 멈추고 침묵이 이어지는 순간을 수용한다. 이 영화가 1년 뒤 부부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면, 그 포옹이 지속되는 순간에 문득 나타난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F. 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에서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부부는 노면전차를 타고 도시로 향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부부는 휴가를 보내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나폴리로 향한다. 연인의 위기는 무성영화와 모던시네마의 한 기점을 증언하는 형식이면서 또한 현대 영화가 직면한 주요한 과업이기도 하다. 스와 노부히로의 <퍼펙트 커플>에서 사이가 멀어진 커플은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향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에서 도시에서 헤어진 연인은 정글에서 다시 깨어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아내는 3년 만에 되돌아온 죽은 남편과 시골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파국에 이르기 직전의 연인을, 머물던 집을 벗어나 다른 도시와 구역으로 향하는 커플을 찍는다는 것은 위기에 처한 영화의 믿음을 새롭게 갱신하는 시도임을 우리는 명심하고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이란 오래 지속되거나 영구적으로 정박할 수 있는 유형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희망의 요소>에서 아내는 남편의 단편소설에서 발견한 ‘희망의 요소’가 무엇인지 끝내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부부가 찾은 희망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다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내의 일터에 누군가 찾아온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화면 바깥에 있으므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카메라는 장면을 멈추고 영화를 끝내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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