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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눈길‘ 유보라 작가, “사회가 희망을 가지려면 잘못에는 제대로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예지 사진 정용일 2023-03-13

사진 정용일 <한겨레21> 선임기자

고등학생 시절 겪은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 여성 투톱물을 좋아하죠? 영화로도 선보인 <눈길>은 위안부로 끌려간 종분(김향기)과 영애(김새론)의 연대를 그려냈어요. “죽는 게 무섭니, 죽지 못해 사는 게 더 무섭지”라는 고고한 영애, “죽는 게 제일 쉽다, 살아서 돌아가야지”라며 달래는 꿋꿋한 종분. 두 여성 캐릭터를 대비하며 극을 끌어나가는 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 저는 이야기에서 먼치킨(능력이 뛰어난 캐릭터)인 한 인물이 모든 사건을 해결하길 원하지 않아요. 서로 다른 두 인물이 결핍을 존중하고 채워주는 이야기를 좋아하죠. 일제강점기의 거대한 재앙 앞에서는 사회적 약자인 종분뿐 아니라 의식이 있고 엘리트 계급이라고 생각했던 영애도 같은 처지가 돼요. 이들이 어떻게 연대하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성을 주인공으로 쓰게 되는 건, 제가 남성을 주인공으로 쓰게 되면 제 안의 로망에 가까운 남자들을 쓰게 되거든요. 그러다보면 날것의 느낌이 안 나요. 그래서 제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세월호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죠. 대한민국의 외상 후 증후군을 그리며 위로를 보내는 드라마예요. 이야기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데, 작가님 글에선 늘 그런 점이 또렷하게 느껴져서 좋습니다.

= 제가 가장 예민하던 고등학생 시절에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붕괴했어요. 제가 다니던 보성여고가 성수대교와도, 삼풍백화점과도 멀지 않았거든요.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갑자기 선생님들이 수업을 다 멈추고 결원을 체크하는 모습이 아직도 떠오르네요. 세월호 때 다시 그 무력감과 절망감을 겪어야 했고요.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납득할 만한 대처와 수습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어떤 부분은 치유받을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사회에선 그런 게 없었죠. 그래서 자꾸 제 드라마나 영화 <벌새> 같은 작품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 세계에 관심이 많죠.

= 관심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요. (웃음) 관심이 너무 많아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죠. 저는 냉소적인 태도가 가장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 해요.

- 파리바게뜨 공장에서 희생된 노동자, 신당역에서 살해당한 여성, 이태원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을 봐도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 저는 사회가 희망을 가지려면 선명한 잘못에는 제대로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시는 재발하지 않게 노력하고 예방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면 결국 허무와 냉소에 빠질 수밖에 없거든요. 어차피 글렀어, 망한 사회야.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그거예요. 책임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작은 일에 책임지듯 큰일에도 책임져야죠. 그래도 요즘 드라마와 영화와 소설에 희망이 있는 건, 그런 이야기를 계속하려 노력하잖아요. 그러니 절망할 건 아니라 생각해요.

사진 정용일 <한겨레21> 선임기자

- 오랜만에 작가님을 히트 작가 반열에 올린 드라마 <비밀>을 보고 왔어요. 다시 보니 더욱더 매운맛 드라마던데요.

= 다시 보면 ‘빻은’ 장면 천지이지 않아요? 요즘 옛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야, 저때는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구나’ 싶다니까요. (웃음)

-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벽 치기 키스는 기본, 억지로 잡아끌고, 힘으로 제압하고, 버럭 소리 지르고 그런 것들이요?

= 그때는 그게 이상한 건지 몰랐어요. 오히려 ‘이러면 좋아하겠지?’라면서 썼죠. 저도 이렇게 바뀐 걸 보면, 우리가 아무리 비관적으로 이야기하더라도 사회는 분명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사람들은 1980~90년대를 유토피아처럼 회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기억나거든요. 저희 옆집 아주머니가 늘 멍을 가리려고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던 것. 아저씨가 아무렇지 않게 여자애들을 만지며 ‘네가 예뻐서 그런 거야’라고 했던 것. 부모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기 애들을 때리던 것. 매일 어디선가 엄마들이 맞는 소리, 여자들이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고, 애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좋아졌잖아요? 우리는 아주 조금씩이지만 나아가고 있어요.

- 작가님은 유정이나 종분처럼 꺾이지 않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 같아요.

= <비밀>은 제가 늦게 투입된 작품이어서 대본을 쓰면 바로 촬영하는 상황이었어요.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여자주인공은 점점 더 앞만 보고 가는 강직한 인물이 돼가고 속도감이 붙으며 시원시원해졌죠. 저는 그런 캐릭터를 더 보고 싶어요. 요새는 여성 서사에 재미까지 더해진 작품과 캐릭터가 정말 많이 나와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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