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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도 난다> Turtles Can Fly
2004-10-12

이란, 2004, 감독 바흐만 고바디, 오후 8시, 부산2

쿠르드족 아이들은 일찍 어른이 된다. 동생을 안아 어르고 돈을 구하러 다니는 이 아이들은 이기적인 욕심이 없어 보이지만, 슬픈 노래와 눈동자에선 걸음마와 함께 생존을 배워야하는 거친 세월이 어쩔 수없이 드러난다. 온힘을 다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이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취한 말들의 시간> <고향의 노래>에 동족의 고난을 담았던 바흐만 고바디는 그 전쟁터를 떠나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이것은 픽션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그게 전부다.

이라크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국경지역, 위성 안테나를 사고 싶어해서 ‘위성’이라고 불리는 소년 칵은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민첩하게 살아가고 있다. 위성은 팔을 잃은 오빠 헹고와 함께 피난민 속에 섞여온 소녀 아그린을 보고 반한다. 아그린은 부모를 살해한 군인들에게 강간당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매몰차게 아기를 떠미는 아그린은 그 밤의 악몽을 잊지 못하고 벼랑에 올라 자살을 꿈꾸곤 한다. 위성은 아기를 위한 조그만 방독 마스크까지 구하러 다니면서 그녀를 도우려 하지만, 언제나 완강한 거부에 부딪친다. 미군 진주가 눈앞에 다가올 무렵, 지뢰밭에 둘러싸인 이 마을에서, 아이들은 서로 다른 길을 통과해 불행과 죽음으로 다가간다.

바흐만 고바디는 쿠르드족 민속악기 다프의 리듬이 울리는, 슬프지만 낙천적인 에너지가 있던 <고향의 노래>를 지나, 또다시 목격하는 것 자체가 고통인 아이들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후세인을 피해 고향을 떠난 아이들은 무엇으로도 구원받을 수없다. 아이들의 지도자와도 같았던 명민한 위성은 지뢰를 피해가지 못하고,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헹고는 여동생의 죽음만은 예언하지 못한다.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는 아이들의 삶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거북이는 비좁은 웅덩이에서도 날아오르는 것처럼 헤엄을 치는데, 아이들은 호수 깊은 곳에서 절망만을 건져올린다. 아무런 내레이션 없는 <거북이도 난다>는 바흐만 고바디의 영화 중에선 가장 극적 장치가 눈에 띄는 데도 후세인 정권의 횡포나 강대국에 휘둘리는 이라크의 참상을 직접 고발하지 않는다. 하나의 길을 따라가는 대신 마을 안에 머물며 종횡하는 이 영화는 미군 진주 직전 며칠을 촬영하고 통곡을 녹음한다. 그러나 어떤 기록은 그자체로 웅변이 될 수가 있다. 이라크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과 맞닥뜨려 <고향의 노래>의 생기를 잃은 듯한 <거북이도 난다>는 그런 기록 중의 하나일 것이다.

김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