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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The Scarlet Lettter
2004-10-13

한국, 2004, 감독 변혁, 오후7시30분 수영만 야외상영장

난데없이 창세기 3장 6절이 스크린에 새겨진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익히 알려진 구절이다. 여자가 이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남자에게도 건넸고, 이로써 눈이 밝아진 이들은 알몸이었던 자신들의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리게 됐다는 이야기. <주홍글씨>가 이 성경구절로 시작했다는 건 영화가 끝나고 나서 새롭게 되새겨질 것이다. 이 구절은 여자를 치명적인 유혹의 함정에 비유하도록 유도하지만, 이건 그녀의 ‘선지적’ 그리고 ‘모험적’ 인도로 인간이 진짜 현실을 대면하게 됐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도 된다. 비록 몰랐으면 좋았을 고통스런 진실을 깨우쳐주는.

 

<주홍글씨>의 세 여자 경희(성현아), 가희(이은주), 수현(엄지원)이 기훈(한석규)에게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안겨준다. 물론 해석은 자유다. 그녀들을 장르화한 팜므 파탈로 보던지, 인생의 나침반 쯤으로 보던지. 전반부에서 그 입장은 반대로 놓여진 듯 하다. 잘 나가는 강력반 반장 기훈은 명석한 두뇌만큼 터프하고 자신감에 넘쳐서 아내와 연인을 동시에 거느리는 사생활도, 이제 막 현장에 도착한 살인사건도 거침없이 풀어간다. 아내 수현은 곱게 단장하고 우아하게 첼로를 연주하는 단아한 아내의 표정으로 일관한다. 수현의 친구이기도한 가희는 근사한 재즈 클럽을 매력적인 보컬로 울리면서 기훈과 끈적끈적한 정사를 즐긴다. 문제는 이 삼각관계가 아니라 사진관 여인 경희에게서 터져나온다. 그녀 남편의 머리를 백주대낮에 처참하게 짓뭉겐 자가 누굴까? 기훈이 그 범인을 찾는 건 시간문제인 듯 했다. 그런데 투명해보이던 단서가 조금씩 어긋나더니 엉뚱한 데서 오래도록 고인 고름이 터져나온다. 그렇게 자신있던 비밀스런 사생활이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다.  

<주홍글씨>는 불륜의 치정극과 살인 미스터리를 교차시키는 상업영화다. 그 교차는 긴장과 집중의 고조를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내면 혹은 진실을 비춰주는 거울 노릇을 한다. 그러다가 최후의 순간에 격하게 충돌하면서 교차의 매듭을 세게 풀어버린다. 그때 기훈은 지금까지의 인생 좌표와는 전혀 다른 곳에 서게 된다. 주변의 낯선 풍경같은 전반부의 이야기를 인공적인 느낌이 강한 TV극처럼 풀어가더니, 지나친 허구처럼 보이는 사건이 잇따르는 후반부에선 치밀하면서도 물흐르듯 움직이는 카메라의 동선을 따라 놀라운 사연을 진짜처럼 믿어버리게 만든다. 그렇게, 낯익은 건 가짜가 되고, 외면하고 싶은 상상은 진짜가 된다.

이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