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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2005] 제6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식 현장 스케치
글·사진 오정연 2005-09-02

62마리의 사자들, 포효하다

베니스에선 모두가 길을 잃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좁은 골목들을 지나면 언뜻 봐선 도저히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작은 성당과 잠시 몸을 쉴 수 있는 아담한 공터가 나온다. 그 너머엔 거미줄처럼 도시 곳곳으로 뻗어 있는 운하와 그 위에 가로놓인 이름없는 다리들…. 그렇게 비슷한 풍경을 지나치기 몇번, 길을 잃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다. 그러나 이리저리 몸을 꺾는 좁은 골목길 곳곳엔, 베니스의 유일한 광장이라는 산 마르코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리는 이정표가 반드시 붙어 있다. 조금 늦게 도착하거나, 다소 다리가 아플 수는 있지만, 베니스의 모든 길은 서로 통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몇 시간쯤 미아가 되는 것도 어느새 즐길 만한 일이 된다. 그리고 8월31일 제6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일. 낙천적인 지중해의 태양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리도의 해변에는, 그 어느 해보다도 복잡하고 다양한 영화들이 이루는 미로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된 이들로 가득했다.

할리우드 스타는 흥행의 보증수표

올해 집권 2년째를 맞이하는 마르코 뮐러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영화제를 한결 안정적인 짜임새로 운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것은 전체 상영작 중 11편에 달하는 할리우드산 영화 중, 무려 9편이 월드 프리미어 상영작이라는 점. 이는 라인업을 발표할 당시부터 영화제쪽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부분인데, 할리우드영화가 많다는 것은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기네스 팰트로, 맷 데이먼, 조지 클루니, 조니 뎁 등 빛나는 별들 또한 리도섬을 찾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사실 3대 국제영화제의 권위를 넘보는 전세계의 숱한 영화제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베니스와 베를린영화제가 할리우드 스타 모셔오기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은 이제 특별한 뉴스거리도 아니다. 영화제 공식 데일리와의 인터뷰에 나선 마르코 뮐러 위원장은 이제, 지나치게 스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복되는 지적에 “언론의 그런 문제제기 역시 영화제의 또 다른 광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기꺼이 환영한다”라며 여유를 보일 정도다.

조지 클루니(<굿 나이트 앤드 굿 럭>), 존 터투로(<로맨스와 담배>) 등 할리우드의 배우 출신 감독부터 올해 베니스의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히는 마뇰 드 올리베이라(<마법의 거울>)와 필립 가렐(<평범한 연인>), 한국의 박찬욱(<친절한 금자씨>)과 홍콩의 관금붕(<장한가>) 등 다양한 경력과 지역, 성향을 자랑하는 감독의 신작 19편을 선정한 경쟁부문을 비롯한 전체적인 라인업에 대해서도, 대부분 우호적이다. 이탈리아의 영화 월간지 <이탈리안 시네마>는 <샤크> <터미널> 등 스튜디오 영화만이 두드러졌던 지난해에 비해 올해 할리우드영화는 스튜디오의 대작부터 스티븐 소더버그(<버블>), 라세 할스트롬(<카사노바>)의 신작과 같은 인디영화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통상적인 거장”을 죄다 끌어들인 올해 칸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 라인업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영화제를 둘러싼 이탈리아 언론의 시각은 미묘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고 있어 흥미롭다. 이탈리아의 우파 성향 일간지인 <라 레푸블리카>는 올해는 반드시 경쟁부문에 선정된 세편의 이탈리아영화 중 하나에 황금사자상을 줘야 한다는 사실을 명령조에 가까운 어조로 환기시켰고, <라 레푸블리카>와 함께 양대 유력일간지에 속하는 <코에레 델라 세라>는 2000년의 베니스가 <섬>의 김기덕을 전세계에 알렸던 것과 같은 신인 발굴의 의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개막작 <칠검> 호평… 중국계 영화 강세

서극의 <칠검>으로 문을 열고, 진가신의 <퍼햅스 러브>로 마무리될 올해 베니스의 라인업 중 가장 눈에 띄는 경향은 단연 중국계 영화 혹은 중국계 감독의 강세. 관금붕과 리안(<브로크백 마운틴>)의 신작을 포함하는 경쟁부문, 3편의 홍콩영화가 상영되는 비경쟁 부문 외에도 30, 40년대 중국영화 회고전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한 듯, 중국 언론은 영화제 초반의 기자회견에서 중국영화의 확대된 영향력을 확인하려는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마르코 뮐러는 이에 대해 여명, 양채니, 견자당, 유가량, 손홍뢰 등 중국 본토와 홍콩의 다양한 배우에 김소연이 조선 출신 노예로 합류한 출연진을 비롯해 한국의 영화사가 제작에 참여하고, 일본의 가와이 겐지가 새로운 무협서사물에 어울리는 음악을 작곡하는 등 <칠검>이 범아시아적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와이어와 CG 등의 첨단 기술을 배제하고 무협 그 자체에 집중했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초심으로 돌아갔으며, 리안의 <와호장룡>의 뒤를 이을 만한 대작 무협물의 경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칠검>의 기자 시사는 개막 전날인 8월30일 저녁에 있었다. 어지러운 세상, 무자비한 폭군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친 일곱명의 무사, 서로 다른 검과 그만큼 다른 캐릭터를 자랑하는 이들이 중국의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펼치는 서사극에 대해 대부분의 관객은 만족하는 분위기다. 서극을 홍콩 최고의 감독으로 꼽는 이탈리아 기자는, “홍콩을 비롯한 중국영화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했을 때, <칠검>은 최고의 선택”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삼엄한 보안… 개선 노력은 계속된다

테러방지 차원에서 시행되는 각종 보안 조치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제의 모든 행사장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매번 금속 탐지기를 지나치고, 가방을 열어 보이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유례없이 삼엄한 영화제의 분위기는, 레드카펫 입장과 개막식을 비롯하여 주된 행사들이 벌어질 팔라초 델 시네마 건물 앞에 늘어선 수십 마리의 황금사자들에서 정점을 이룬다. 영화제를 호위하는 이 사자들은 모두 62마리라고 추정되는데, 이는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프로덕션디자이너 단테 페레티의 아이디어라고 알려져 있다. 베니스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이러한 노골적인 전시는, 극장 안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영화제의 발랄한 오프닝 타이틀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늙은 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애니메이션은 베니스영화제 최초로 ‘팝’문화를 차용한 오프닝 타이틀로, 권위와 혁신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뮐러는 <스크린 데일리>와의 인터뷰를 통해 마켓 없는 영화제에 대한 비판을 시사하면서, 내년부터는 이에 대해 모종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고질적으로 지적돼왔던 각종 문제점들을 점차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그러나 영화제를 둘러싼 이 모든 정치적이고, 산업적이며, 상업적인 문제와 상관없이, 각종 상영관에선 지금 이 순간의 영화를 만나기 위해 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4년 전 베니스가 발굴한 로랑 캉테(<남쪽을 향하여>), 4년 전 베를린에서 인정받은 파트리스 셰로(<가브리엘>), 과거 대부분의 연출작을 베를린에서 상영했던 리안 등 국제영화제의 단골스타들의 신작을 비롯해서, 오리존티 부문에서 상영될 베르너 헤어초크, 페르난도 솔라나스의 다큐멘터리 등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극장 앞에 늘어선 긴 줄에서 엿보인다. 앞으로 일주일 뒤 전하게 될 소식은, 이들의 간절한 기대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충족되는지에 대한 작은 보고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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