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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PIFF Daily > 10회(2005) > 추천영화
대중적 즐거움이 담긴 중국 리얼리즘의 진수, 쑨 유의 <대로>

영화가 시작되면 일군의 청년들이 걸어 나와 그 어떤 장애물이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제거하여 길을 놓겠다는 내용이 담긴 노래 <선봉개로>를 합창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 길이 항일투쟁에 힘쓰는 중국군대의 중요한 운송로가 될 길이며 나아가 영화 안팎 중국인민들의 커다란 희망과 염원을 담은 ‘위대한 길’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1930년대 초반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만주점령과 상하이 공격이 중국인민들의 반일감정을 더욱 공고하게 다져놓은 가운데,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1935년에 발표된 <대로>는 당대 중국영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자 좌파적 항일영화의 금자탑으로 기록되고 있다.

용기와 웃음과 인내력을 갖춘 진형, 근면한 장씨, 하모니카를 잘 부는 정군, 거칠고 뚱뚱하지만 사람 좋은 장따, 불도저 운전기사가 되기를 꿈꾸는 샤오러우, 그리고 희극적인 행동으로 동료들을 곧잘 웃기곤 하는 한샤오리우즈로 이루어진 여섯명의 노동계급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는 상하이를 떠나 내륙지방의 도로공사현장으로 향한다. 이곳은 생계를 위해 일해야만 하는 힘겨운 삶의 현장이라기보다는 미래를 향한 희망에 사로잡힌 노동자계급 남성들의 카니발적 에너지로 넘쳐나는 장소인 것처럼 묘사된다. 여기에 남성들의 육체를 향한 욕망을 감추고 또 드러내는 여성들, 일본군에 매수되어 도로공사의 중단을 획책하는 봉건지주 등의 인물이 추가로 제시되면서 영화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이곳은 도로공사로 상징되는 근대화의 이상과 항일투쟁이 조우하고 그 둘이 다시 계급투쟁으로 수렴되어 하나의 큰 ‘대로’를 이루게 되는, 그야말로 1930년대 중국좌파 항일운동의 전술적 상상의 지리학이 펼쳐지는 영화적 장소인 셈이다(그러니 이 영화가 국민당 정권에 의해 금지되고 불살라졌던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기술하고 나면 어쩐지 영화 <대로>가 민족주의적인 대의나 정치적인 의제가 앞선 프로파간다 영화처럼 여겨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가 <대로>를 볼 때 흥미로운 지점은 그러한 대의나 의제가 노골적으로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 물론 그러한 순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 당대의 여러 대중적 오락의 형식들을 살갑게 끌어안고 또 그것들과 적절히 협상하는 방식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노래의 활용이다. <대로>는 대사는 모두 자막으로 처리되고 간헐적으로 약간의 효과음만이 사용된 거의 무성영화에 가까운 영화이지만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 있어서만큼은 예외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선봉개로> 이외에도 식당주인의 순진한 딸 딩샹이 연인 샤오러우 앞에서 부르는 <연연가>, 보다 개방적인 성격의 여인 모리가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부르는 <펀양의 노래>, 그리고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부르는 노래로 주제가에 해당하는 <위대한 길의 노래> 등 제법 많은 노래들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모리가 부르는 <펀양의 노래> 장면은 비평가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부르는 노래가사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비참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 데다가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 삽입된 숏들이 통상적인 뮤지컬 양식의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일련의 (노래 부르는 이의) 숏과 (노래를 듣는 이들의) 반응숏이 아니라 전쟁과 홍수로 피폐해진 마을의 모습을 담은 실제 다큐멘터리로부터 발췌한 숏들인 탓에, 이 장면이 영화 내에서 매우 이질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딩샹이 <연연가>를 부르는 행복한 순간에도 갑작스럽게 일본군의 습격소식이 들려오기도 한다. 영화적 판타지와 실재의 급작스런 충돌로 설명될 수 있을 이러한 양식은 예기치 않게 <대로>를 매우 실험적인 형식의 영화로까지 보이게 만든다. 이외에도 <대로>에는 슬랩스틱 코미디와 디즈니류의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차용한 시각 개그들까지도 등장하고 있다.

한국에서 지금 <대로>를 보는 우리에게는 당대 상하이 영화계의 스타였던 조선인 배우 김염(진형 역)의 존재가 더 눈에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남아있는 영화필름들만 놓고 보자면 오직 친일의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는 일제치하의 한국영화들을 대신하여 그 부재와 결핍의 자리를 채워줄 쓸쓸한 욕망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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