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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배우 최민식이 말하는 4가지 연기론
정재혁 2006-05-04

연기는 음악이며, 연기는 인격이다

5월 2일 메가박스 3관에선 최민식의 마스터 클래스가 열렸다. 경희 대학교에서 연기를 지도하고 있는 이영란 교수의 강연으로 시작된 이날 행사에는 연기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은 물론 일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찾아온 팬들도 참석했다. 그의 대표작인 <파이란>이 상영됐고, 곧이어 강연이 진행됐다. 영화 <파이란>의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연기와 배우에 대한 이야기까지, 140여명의 관객들은 쉴새없이 질문을 쏟아냈고, 최민식은 특유의 열성적 목소리로 질문에 답했다.

연기는 음악이다.

<파이란>의 한 장면, 편지를 읽던 강재가 허둥거리며 담배를 찾고 참다못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 이건 80%정도가 애드리브다. 이 부분은 영화 전체적으로도 꽤 중요한 장면이라 많은 고민을 했다. 강재가 울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촬영 직전까지도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송해성 감독이 “형, 지금까지 강재로 살아왔으니까, 그냥 마음대로 해봐”라고 하더라. 그래서 일단 그 편지를 직접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근데 그냥 눈물이 났다. 중요한 건 강재가 우느냐, 안 우느냐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강재의 삶이 이 마지막 장면에서 어떻게 보여질까, 그 감정을 어떻게 가져갈까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내 연기가 모두 애드리브처럼 이뤄지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강재가 싱크대에 오줌을 누고, 다리 사이에 베개를 끼고 잠을 자는 장면들은 다 내가 사전에 계산한 것이다. 물론 대본에는 이런 설정들이 없었다. 나는 강재의 모습이 최대한 남루하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재의 방도 매우 남루해 보이지 않나? 그런 미술적인 요소와 더불어 강재의 행동 하나 하나가 그의 캐릭터를 잘 설명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더 지저분하게 보이도록 연기했다. 부하에게 목을 졸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나는 후배 배우인 지대한에게 실제로 목을 조르라고 요구했다. 사람이 죽는 장면인데 최소한 혀가 나오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비주얼은 있어야하지 않나. 그런데 이 친구가 자꾸만 가짜로 하는거다. 세번 정도 테이크를 가도 계속 그렇게 하니까 짜증이 나더라. 내가 정색을 하고 진짜로 조르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제대로 했다. 죽는 사람의 얼굴이 정상으로 보이면 안된다.

연기는 음악과 같다. 음악은 똑같은 곡이라도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파이란>의 이강재라는 캐릭터도 송강호나 설경구가 했으면 다른 느낌이 됐을 것이다. 내 연기에서 어디까지가 애드리브고 어디까지가 계산된 것이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지만, 정작 중요한 건 배우가 자신의 역할을 얼마나 잘 체화하고 있느냐이다. 배우는 몸으로 연주를 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철저한 준비는 필수적인 것이다. 테크닉이 중요한 장면에서도 배우가 캐릭터에 대해 빠져있지 않으면 테크닉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나는 디테일적인, 기술적인 연기가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사전에 미리 계산을 하지만, 연기 전반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냥 내 몸에 모든 걸 맡긴다.

연기에 최고란 없다.

최고의 배우, 최고의 흥행작. 나는 이런 말들이 싫다. 어떤 영화 주간지를 보면 신인 배우든 기성 배우든 모두 최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잡지에 의하면 최고가 아닌 사람이 없는거다. 예술을 이야기할 때, 최고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예술은 모든 개성이 다 존중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최고’는 이 모든 다양한 것들에 순위를 매기고, 일렬종대로 세워서 나열하려는 나쁜 관습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는 피아노가 더 좋으냐, 바이올린이 더 좋으냐를 따지는 것과 같은 문제다. 배우는 하나의 악기다. 그 악기가 내는 소리는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사람마다 다 살아온 여정이 다르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보여주는 연기도 다 다를수 밖에 없다. 나는 지금도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기상을 받았던 작품의 연기도 지금 보면 부끄럽다. 연기도 인생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 ‘내가 그때 왜 그런 짓을 했지’라며 후회할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면 연기도 더 좋은 방법들이 떠오른다. 왜 내가 그때는 저렇게 했을까, 그때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지만 지금은 차선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연기는 인간을 표현한다.

배우는 인간을 표현하는 작업이다.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삶을 표현한다. 그것이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이는 모두 사람의 사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벗어난 작업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연기는 표현 수단이 몸뚱이다. 배우는 그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풍부한 경험이다. 아무리 단순히 사람을 웃기는 코믹 연기를 한다고 해도, 그 웃음 이면에는 많은 것들이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그 배우가 얼마나 많이 인간에 대해 사고하고, 삶에 대해 질문하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다 배우들만의 탓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선 배우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좀 이상하다. 배우 연기에 대한 비평은 잘 하지 않고, 배우들의 가십이나, 신변잡기들만 보도한다. 또 배우에 대한 비평을 한다고 해도 칭찬 일색인 경우가 많다. 그 배우가 어떤 연기를 어떤 방식으로 소화했는지에 대한 토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배우들은 자신의 연기보다 스캔들에 촉각을 더 기울이게 된다. 결국 자신의 개성은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배우를 볼 때 그 배우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느냐를 생각하기 보다, 그가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는가, 얼마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줬는가를 생각한다. 배우의 도덕성과 성실도가 그 배우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배우라는 직업은 그 특성상 각각의 개성들이 마음껏 드러나야 한다. 젊은 남녀가 사랑을 하는게 뭐가 죄가 되는가? 나는 후배들에게 마음껏 사랑하라고 말한다. 좀 울퉁불퉁하게 살면 어떠나? 사람이 어느 정도는 굴곡이 있어야 연기를 할 때도 풍부한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연기는 인격이다.

1989년 <구로 아리랑>으로 스크린 데뷔를 하기 전, 나는 연극 무대에서 경험을 쌓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연기의 기본을 배우려면 연극을 해야 한다, 연극은 마음의 고향이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맞는 얘기인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연극 연기가 가지고 있는 기본기와 테크닉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이는 연기자로서의 인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연극으로부터 인격을 배웠다. 연기자로서 어떤 태도와 자질을 갖춰야 하는지를 그때 배웠다.

대학교 4학년 졸업공연을 할때 쯤이다. 국립극장과 학교 소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공연 전날 연극 연습을 마친 후 엄청나게 술을 마셨다. 4차, 5차까지 가고 모두 술에 취해 근처 여관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몸에 열이 엄청나더라. 정신은 말짱한데 벽은 춤추는 것 같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후배가 나를 업고 근처 병원에 갔고, 폐렴이란 진단이 떨어졌다. 공연은 바로 내일인데, 폐렴에 걸린거다.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동료들도 당장 공연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허둥대고 있었다. 근데 그때 안민수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라. 그때 연기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이 나에게 “앞으로 너는 내 앞에서 배우한다는 소리 하지마라, 너는 배우 할 자격이 없는 놈이다. 공연을 앞둔 배우가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건 배우로서 기본적인 자격이 없다는 의미다”라고 하셨다. 눈물이 났다. 특히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배우로서는 치명적인 꾸지람을 들은거다.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더라. ‘지금까지 내가 뭘 해왔나’하는 생각도 들고.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배우로써 성공하는데 가장 큰 뿌리가 되어 주신 분이 안민수 선생님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연기가 인격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아무리 배우가 자신의 능력이 훌륭하다고 해도 배우로서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결코 완성된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발성과 개인의 내적인 훈련도 중요하지만, 직업 배우로서 기초가 되는 것은 정신적인 훈련이다. 요즘도 건방져지거나 오만한 생각이 들때, 안민수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이 분은 정말 칭찬이 짠 분이신데, 그 점이 배우는 내 입장에서는 유익했던 것 같다. <파이란> 시사를 할 때도 연기에 대한 칭찬보다도 “옷이 그게 뭐냐, 배우가 자신의 영화를 가장 처음 소개하는 자린데 그렇게 막 입고 나오면 어떻게 하냐”며 꾸지람을 하셨다. 그때 주위엔 기자분들도 많아서 창피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 말씀이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어렵게 연기하며 배우를 꿈꾸던 시절이었지만, 안민수 선생님을 비롯한 나의 정신적인 멘토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풍부한 시기를 보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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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소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