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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FF2009] 뭘 봐야할지 모르시겠어요?
2009-10-06

개막일부터 폐막일까지 날짜별로 엄선한 스무편

8일(목): <굿모닝 프레지던트> Good Morning President /개막작

대통령을 소재로 한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대통령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유명하거나 커다란 사건과 스캔들을 일으켰던 인물을 중심으로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 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인물과는 상관없이 상상적인 대통령을 그려내는 경우다. 장진 감독의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후자에 가깝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상적 대통령 속에 현실적인 모습을 기입하면서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게 만든다.

장진의 영화는, 그가 구사하는 유머처럼, 반대가 되는 지점에서, 청개구리처럼 출발하기를 좋아한다. 그의 가장 매력적인 작품 중 하나인 <아는 여자>가 사소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공통으로 지닌 집단화된 추억을 끄집어내는 방식(그것은 야구 자체일 수도 있다)이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공적인 대통령 속에 담긴 사적인 영역들을 자꾸 건드린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고민하는 김정호 대통령(이순재), 과거의 연인 앞에 우물쭈물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대통령(장동건), 헌정 사상 초유의 이혼 사태에 직면한 여성대통령(고두심)의 모습은 그들의 인간적인 순간을 헌정의 핵심으로 호출한다. 그것은 정치가 결국 살아가는 것의 문제이며, 개인의 삶의 행복과 직결된다는 현대 정치철학의 핵심과도 맞물리는 것이다. 장진의 통찰력은 이를 능청스럽게도 잡아낸다. 그리하여,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매주 복권을 사고, 키스를 하고, 춤을 추는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정치의 인간적인 얼굴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결론은 관객을 정치 안에 포함된 개인과 만나게 하는 행복감을 제공한다.

물론 세명의 대통령을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이야기 속에 얽어놓고 있다 보니 대중영화의 도식적인 틀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함을 통해 대중영화의 사려깊은 매력을 이뤄내는 장진의 스타일은 개인과 사회를 아우르고자 했던 한국영화의 한 정점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국제영화제 무대에서는 덜 알려진 장진의 영화가 이번을 계기로 좀더 확장될 만한 자리가 된다는 점에서 장진이라는 작가에게도 중요한 영화이다. (이상용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9일(금): <하얀 리본> The White Ribbon

올해 부산영화제의 유럽영화 중에서 딱 한편만 골라야 한다면? <아이 엠 러브>와 <하얀 리본> 사이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하얀 리본>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거장 미하엘 하네케의 신작이며 그의 또 다른 걸작이다. 무대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독일의 작은 프로테스탄트 마을이다. 마을 아이들이 하나씩 끔찍하게 폭행당한 채 발견되고, 범인을 추리하던 마을 학교의 선생은 무시무시한 공동체의 비밀이 범죄의 뒤에 도사렸다는 걸 깨닫는다. 하네케는 종교적인 규율에 함몰당한 채 살아가는 한 공동체의 무의식이 빚어내는 집단적 폭력을 통해 지금 세계의 파시즘과 테러리즘을 읽어낸다. 인간성 내면의 탐구라는 하네케의 주제의식이 좀더 넓은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된 결과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미학적으로도 <하얀 리본>은 숨이 막힌다. 아름다워서 숨이 막히기도 하지만, 미학적인 규율이 너무나도 엄격해서 목이 졸리는 것 같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피아니스트>와 <히든>에서 하네케가 구사하던 영상의 쇼크 효과는 거의 없다. 이제 하네케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무시무시한 걸 보여줄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 같다. 이 걸작이 미국에서 리메이크한 <퍼니 게임> 이후에 나왔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하얀 리본>은 진정 하네케의 새로운 차원이라 불릴 만하다. (김도훈)

9일(금): <난징! 난징!> 南京!南京!: City of Life and Death

중국 박스오피스 1위의 실체를 확인할 때, 처음 떠올릴 질문은 ‘어떻게’일 것이다. 도대체 <난징! 난징!>은 어떻게 1.68억위안의 상업적 성공을 기록했을까. 1937년 난징대학살을 그린 <난징! 난징!>은 누군가를 구하거나, 누군가를 이기는 전쟁영화가 아니다. 시각적 쾌감을 주는 전쟁의 스펙터클, 혹은 감정적 동요를 일으킬 현악기의 강한 연주도 없다. 관객의 눈앞에 놓인 건 끝없이 펼쳐진 시체의 물결이고, 귀에 들리는 건 숨소리와 총소리뿐이다. 심지어 죽음을 앞둔 사람들도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여타의 전쟁영화들이 용감한 죽음의 숭고함을 지향한다면, <난징! 난징!>은 살아남는 것의 버거움을 이야기한다. <사라진 총> <가가서리> 등을 연출한 루추안 감독은 피해자인 조국의 입장에서 몇 발자국 물러나 난징대학살을 바라본다. 영화가 그리는 것은 전쟁을 버티는 사람들이다. 전투장면은 적군과 아군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연출됐고 일본군의 무자비한 강간이 묘사되는 한편,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 조국의 군인들을 넘기는 중국인 난민지도자가 등장한다. 전쟁의 마지막 풍경을 일본군의 감정적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 또한 흥미로운 부분이다. 박스오피스 1위의 이유는 아마도 중국인에게 짙게 남겨진 전쟁의 상처,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강병진)

9일(금): <심볼> Symbol

제2의 기타노 다케시로 불리는 일본의 유명 개그맨 마쓰모토 히토시의 신작이다. 전작 <대일본인>을 통해 일본사회의 무기력함을 기묘한 유머로 꼬집은 그다. 두 번째 영화연출작인 <심볼>의 무대는 전세계다. 시작은 멕시코에 살고 있는 한 프로레슬러의 아침이다. 중년 선수인 에스카르고만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아이들을 다그치는 아내의 잔소리를 음악 삼아 커피를 마신다. 한편, 사방이 하얀색인 어느 방에서 잠옷을 입은 남자가 깨어난다. 그가 누군지, 왜 이 방에 왔는지는 모른다. 방 벽에는 어린아이의 성기처럼 생긴 돌기들이 튀어나와 있다. 남자는 돌기를 하나씩 눌러보는데, 그때마다 온갖 물건들이 튀어나온다. 칫솔, 확성기, 도자기, 나무젓가락, 참치초밥 등등. 이 두 남자의 이야기가 어떻게 엮일지, 미리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하얀 방의 남자가 누르는 돌기들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심볼>은 마쓰모토 히토시의 예상치 못한 행보다. 문제의식을 전세계로 확장시킨 영화는 <대일본인>에 비해 단순하지만 난해하고, 그보다 더 직접적인 유머를 구사한다. 특히 하얀 방에서 탈출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마쓰모토의 코믹연기가 압권이다. 자신이 꿈꾸는 정통 코미디를 영화적인 공간에서 구현하고픈 욕심이 보인다. (강병진)

10일(토): <팔레스타인> The Time that Remains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됐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거나 쫓겨나거나 도망쳐야 했다. 소수의 사람들은 고향에 머물렀지만 일상은 한시도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영화의 자존심’ 엘리아 슐레이만이 <신의 간섭>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팔레스타인>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다. 전작들이 그랬듯 이 역시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영화다.

슐레이만은 부모 세대의 기억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거주지인 나사렛을 점령한 1948년부터 현재까지를 영화에 담아낸다. 그렇다고 <팔레스타인>을 역사적 순간을 탁월하게 묘사한 역사영화나 선동적 메시지를 던지는 정치영화로 오해하면 안된다. 슐레이만은 대단한 선동가나 예술가쪽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영화라는 도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아는 명민한 감독에 가깝다. 드러내놓고 선동하거나 예술인 척하지 않지만 결국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웃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 웃게 만들고 그런 다음 씁쓸한 마음으로 다음 장면을 쫓아가게 만든다. 그의 장기다. 그렇게 <팔레스타인>은 블랙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들로 넘친다. 그중에서도 이스라엘이 세운 ‘분리장벽’을 장대높이뛰기 폴을 사용해 훌쩍 뛰어넘는 장면은 짧지만 강하게 기억될 것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10일(토): <사왓디 방콕> Sawasdee Bangkok

<사왓디 방콕>의 소제목을 붙여보자면 ‘사랑해 방콕’쯤 되겠다. 그렇다. 이건 <사랑해, 파리> <뉴욕 아이 러브 유> 같은 감독들의 도시 프로젝트다. 뉴욕, 파리 프로젝트와 차이가 있다면 도시를 마냥 예찬하지는 않는다는 점. 네명의 자국 감독들은 타이의 현실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그런데 그게 더 진심처럼 보인달까.

위시트 사사나티앙의 <Sightseeing>은 앞을 볼 수 없는 여주인공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역설한다. 겨우 하루를 연명해가는 그녀에게 방콕을 보여주겠다는 천사가 나타난다. 아딧야 아사랏의 <Bangkok Blues>는 삶의 공간으로서의 방콕에 집중한다. 소리 녹음이 취미인 루이스는 외국에서 왔다. 평화로운 어느 아파트 놀이터에서 그는 친구에게 뉴욕에서 녹음한 놀이터 소리를 들려준다. 뉴욕이나 방콕이나 사람 살아가는 건 마찬가지라고 말하려는 듯. 콩데이 자투라나사미의 <Pi Makham>은 매춘과 폭력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고 감독은 직접적으로 고발하지 않고 남녀의 심리에 더 공을 들인다. 마치 아련한 멜로드라마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펜엑 라타나루앙의 <Silence>는 돈을 풍자하는 교훈극이다. 차를 몰다 고장이 난 한 여자가 거지에게 도움을 받는다. 대가로 그녀는 거지에게 돈을 건네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지는 돈을 받지 않는다. 이 네 작품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방콕을 만날 수 있다. (김성훈 객원기자)

11일(일): <피시 탱크> Fish Tank

15살 영국 소녀 미아는 노동계급 빈민 아파트에서 젊은 엄마, 되바라진 여동생과 살아간다. 그녀의 꿈은 스트리트 댄서. 꿈을 이룰 방법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미아는 엄마의 남자친구와 관계를 맺게 되고, 그가 사실은 가족이 있는 중산층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레드로드>(2006)로 칸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세계 무대에 등장한 여성감독 안드레아 아놀드의 신작 <피시 탱크>는 미학적인 선이 뚜렷한 영화다. 노동계급의 팍팍한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켄 로치(특히 지금보다 더 비관적이던 초창기의 켄 로치)를 연상시키고, 자칫 끔찍한 범죄로 이어지는 듯한 클라이맥스는 다르덴 형제의 미니멀한 사회드라마와 닮아 있다.

그러나 <피시 탱크>는 결코 주인공들에게 삶의 희망을 완전히 앗아가는 법이 없다. 그건 어쩌면 노동계급 여자들의 삶을 다루는 이 영화의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가 여성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쓰레기처럼 천박하고 덜떨어진 노동계급 여자들의 삶에도 언젠가는 빛이 떠오르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다. 뿔뿔이 흩어지는 모녀에게 마지막 화해의 춤을 선사하는 <피시 탱크>의 마지막 장면은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희망적이다.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김도훈)

11일(일): <딥 레드> Deep Red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다리오 아르젠토적인 영화는 무엇입니까? 답변은 다양할 거다. <서스피리아>는 가장 대중적인 답변이 될 것이고 <수정 깃털의 새>는 가장 마니아적인 답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정답을 하나 내놓아야 한다면 역시 <딥 레드>일 수밖에 없다. 심령술사 헬가는 심령학대회에서 살인마의 존재를 감지하자마자 살해당한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살인범을 목격한 마크는 기자 지안나와 함께 수사에 나선다. 그리고 살인마가 동요를 틀어놓고 살인을 저지른다는 사실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나간다. 물론 아르젠토 영화에서 이야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감히 말하자면 다리오 아르젠토는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이야기 직조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남자다. 무슨 상관 있으랴. 아르젠토의 영화에서 중요한 건 살인의 미학일 따름이며, 고블린의 음악과 함께 벌어지는 <딥 레드>의 살인장면들은 이미 클래식이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는 <수정 깃털의 새> <슬립리스>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고양이> <딥 레드>와 함께 아르젠토의 신작인 <지알로>도 상영된다. 아르젠토 역시 내한한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팬이라면 영화제 기간 중 부산에 오지 않는 걸 수치로 여겨야 할 거다. (김도훈)

11일(일): <백야> A White Night

이야기의 무대는 프랑스의 리옹, 리옹에서도 붉은 다리를 중심으로 반경 100여m다. <백야>는 이곳에서 처음 만난 일본인 남녀의 10시간 남짓한 사랑과 이별을 담는 영화다. 다리에 올라 상념에 젖은 여자에게 남자가 말을 건다. 여자는 경계하고 남자는 사라지는데, 둘은 다시 다리에서 만난다. 남자의 말은 여자의 상처를 헤집어놓는다. “여기서 애인을 기다리는 건가요? 오지 않는 거 아니에요? 아마도 유부남이겠죠?”

자신의 바보 같은 사랑을 들킨 여자와 10시간 뒤 파리로 향하는 남자는 서로 말싸움을 벌이다 차를 마시고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서 대화를 반복한다. 서로가 하지 말라는 말과 행동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와중에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위로받고 충동적인 키스와 런던으로 가서 함께 살자는 충동적인 계획을 나눈다. 여기까지는 <비포 선라이즈>식의 여행 로맨스다. 잔잔한 멜로디에 실린 밀고 당기기의 대화는 충분히 로맨틱하다. 그런데 <백야>는 이때부터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두 남녀의 감정을 묘사한다. 과연 그들의 사랑은 진심일까? 남자는 외로운 여자를 감싸려던 것 아닐까? 여자는 자신을 위로하는 남자의 말에 현혹된 것은 아닐까? 영화는 낮이면서도 밤이고 밤이면서도 낮인 상태의 사랑을 묘사한다. 감독 자신의 경험담은 아닌지 의심해볼 만한 이야기일 듯. 일본 독립영화의 상징적 인물인 고바야시 마사히로의 연출작이다. (강병진)

12일(월): <낙원은 서쪽이다> Eden Is West

코스타 가브라스의 이름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건 ‘정치영화’다. 그리스 출신의 이 거장은 <Z> <계엄령> <의문의 실종> <뮤직박스> 같은 영화들을 통해 유럽과 남미 현대사의 숨겨진 이면들을 스크린에 옮겨왔다. 그의 최근작이자 베니스영화제 경쟁작인 <낙원은 서쪽이다>는 현대 유럽의 가장 첨예한 문제인 ‘불법 체류’를 이야기하는 로드무비다. 주인공 엘리아스는 그리스를 떠나 파리로 가기 위해 돈을 주고 밀항선에 오른다. 하지만 경찰선이 다가오자 무작정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만다. 그는 ‘에덴’이라 불리는 나체촌 리조트에서 영국 여자를 만나고, 남프랑스에서는 촌부의 일을 돕고, 마음 좋은 독일인 트럭 운전사들의 차를 얻어타는 등 유럽을 가로지르며 파리로 향한다.

<낙원은 서쪽이다>는 심각한 문제를 다소 가벼운 코미디의 필치로 다루는 영화다. 가브라스는 엘리아스가 지나치고 만나는 수많은 유럽인들을 통해 통합 유럽의 허상을 까발리며 웃어넘긴다. 지나치게 순진한 주인공을 선량한 주변 인물들과 엮어놓은 까닭에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이 종종 옅어지기도 하지만, 거장의 소박한 로드무비라 생각하며 즐겨도 좋을 것이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이름을 처음으로 전세계에 알린 정치스릴러 <Z> 역시 월드시네마 부문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김도훈)

12일(월): <밤과 안개> Night and Fog

‘두기봉 회고전’을 통해서만 임달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허안화의 <천수위>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밤과 안개>에서도 그의 정신분열적인 연기를 볼 수 있다. 전편인 <천수위의 낮과 밤>은 올해 홍콩금상장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허안화), 여우주연상(포기정), 여우조연상(진려운)을 수상하며 허안화의 명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줬는데, 속편인 <천수위의 밤과 안개>(원제)는 1편과 무관한 내용으로 시작한다. 중국에서 온 웡히우링(장정초)과 리삼(임달화) 부부는 홍콩의 재개발 지역인 천수위의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다. 의처증이 심한 리삼은 사사건건 아내를 들볶고, 웡히우링은 결국 두딸과 여성복지시설에 몸을 의탁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천수위의 낮과 밤>이 두 여자의 애틋한 우정을 그렸다면 <밤과 안개>는 한 가족의 끔찍한 파멸의 드라마다. 천수위 지역은 최근 유국창의 <위성> 등 홍콩영화계의 새로운 무대로 자주 등장한다. 마치 어린 갱들이 날뛰던 80년대 홍콩 누아르의 몽콕 지역처럼 그려지기도 하는데, <밤과 안개>는 홍콩에 정착하고자 했던 한 중국 대륙 여인의 슬픈 꿈을 따라간다. 중국 처가의 집도 고쳐주고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던 임달화가 놀고 먹는 백수가 된 뒤 마치 <팔선반점의 인육만두>의 황추생처럼 사이코로 변해가는 모습은, 이 두 사람이 현재 두기봉 영화의 멋진 남자들이라는 점에서 묘한 비교가 된다. (주성철)

12일(월): <선샤인 보이> The Sunshine Boy

켈리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손을 산만하게 움직이고, 혀를 자주 빼문다. 가끔 이상한 소리도 낸다. 켈리는 자폐아다. 그럼에도 켈리의 가족에게는 ‘선샤인 보이’다. 부모로선 자식의 병이 꼭 제 탓 같을 수밖에 없다.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지도 않았고, 치료할 수 있는 방법도 제시된 바 없는 자폐증 아이를 둔 부모의 마음은 더할 것이다. 더군다나 자폐아는 의사소통의 문제로 혼자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자폐증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은 의사소통의 수단을 찾아내 증상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 게 가능하다고 본다. 켈리의 어머니도 희망을 품고 켈리와 소통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러 나선다. 그 희망의 기록이 바로 다큐멘터리 <선샤인 보이>다.

좋은 다큐멘터리가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 중 하나는 성실한 리서치일 것이다. <선샤인 보이>는 거기에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을 더했다. 아이슬란드의 빼어난 자연과 시규어 로스의 음악은 <선샤인 보이>를 특별하게 만든다. 켈리네 가족이 함께 온천에 가고 공원에 가는 일상이 비정상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 잠깐 켈리의 자폐증을 잊게 된다. 아니, 켈리의 가족이 결국엔 켈리와의 의사소통에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영화가 끝나면 뭉클해진 가슴에 손을 얹게 될지도 모른다. (이주현 객원기자)

13일(화): <슈퍼마켓의 하룻밤> One Night in Supermarket

로카르노영화제에서 넷팩상을 수상한 <슈퍼마켓의 하룻밤>은 중국영화의 또 다른 숨겨진 재능이다. 무협 대작과 지하전영의 극단적 대비 속에서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던 중국 대중영화의 신선한 호흡이다. 풋풋한 신인감독답게 초보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제법 감각적 화면과 카메라워크를 보여준다. 우리로 치면 ‘24시간 편의점’이라 할 수 있는, 한 슈퍼마켓에 낯선 침입자가 들이닥친다. 리준웨이와 또 다른 여직원은 곧장 인질이 되고 만다. 허산쉬라는 이 침입자는 3개월 전 복권에 당첨됐다가 그만 가게주인의 실수로 복권 당첨이 무효로 되자, 돈을 되찾기 위해 전기충격기를 들고 온 것이다. 이들은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가게 영업을 대신하게 된다.

‘편의점 습격사건’이라 부르면 딱 맞을 이 영화는 어처구니없는 블랙코미디다. 허산쉬는 주인 ‘왕 여사’를 기다리며 유니폼까지 차려입고 계산대에 섰지만 바코드 찍는 법부터 시작해 아는 게 없다보니 실수투성이다. 게다가 함께 데려온 복면 동료 역시 인질을 지키라고 했더니, 주인 방에 갖춰져 있는 노래방 기기를 이용해 노래를 부르고 앉았다. 리준웨이의 친구이자 배우지망생인 주랴오는 괜히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전기충격기의 제물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배꼽 잡던 사이 진짜 강도가 가게에 들이닥친다. 대륙 ‘펄프’ 코미디의 수준을 가늠하기에 안성맞춤인 작품이다. (주성철)

13일(화): <새벽의 끝> At the End of Day Break

청춘은 늘 불안하다. 언제 어디서나 금방이라도 깨질 수 있다. 젊은이들이 자신을 드러낼 부담이 없는 인터넷으로 몰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과 인터넷을 착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 인터넷 채팅에서 만난 16살의 ‘잉’을 임신시킨 23살의 ‘툭’처럼 말이다. 미성년자인 딸의 임신에 분개한 잉의 부모님은 그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한다. 가난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자기 소유의 오토바이를 파는 것뿐. 곤경에 처한 툭을 구하기 위해 그의 엄마는 주위에 돈을 구걸하러 다닌다.

혈기왕성한 청춘들의 방황. 새로울 것 없는 소재이지만 말레이시아 뉴웨이브의 기수 호유항 감독은 이야기에 입체감을 불어넣는 법을 아는 듯하다. 그 비결은 촬영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이 바뀌어버릴 위기에 처한 툭과 갑자기 임신이라는 신세계를 접한 잉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카메라는 한마디의 말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돈을 빌리러 다니는 엄마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어지럽게 뒤엉킨 툭이란 캐릭터를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김성훈 객원기자)

14일(수): <아이 엠 러브> I Am Love

러시아 출신의 엠마는 밀라노의 상류 재벌 가문인 레키가(家)에 시집와서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고 살아왔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남편 탄그레디와 아들 에도를 동시에 가문의 공동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점점 부자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게다가 런던으로 유학간 딸은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을 하고, 엠마 역시 아들 에도의 친구인 요리사 안토니오와 격정적인 불륜에 빠진다. 팔레르모 출신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는 한 재벌 귀족가문이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을 아연실색할 만큼 유미적인 영상언어로 직조해낸다. 우아한 카메라워크와 격정적인 음악과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어깨선처럼 완벽한 프로덕션디자인을 보노라면 이 영화가 비스콘티와 로셀리니로 대표되는 이탈리안 시네마의 미학적 후손임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가 앞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를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21세기의 <레오파드>라 불릴 만한 <아이 엠 러브>가 이탈리아영화의 새로운 부흥을 알리는 상징적인 영화라고 말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만약 당신이 틸다 스윈턴의 팬이라면 이 영화는 2시간에 달하는 정서적 여정이 될 게 틀림없다. (영어는 전혀 못하는 척 시침 뚝 떼고) 이탈리아어와 러시아어로 연기하는 틸다 스윈턴의 연기는 그녀 경력 중에서도 최상급이니까 말이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오리존티 수상작. (김도훈)

14일(수): <헤르만> Herman

“그녀는 물고기다. 내 물고기.” 물속에서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헤르만’과 ‘아다르’는 어쩔 줄 몰라한다. 이들은 보고 있어도 자꾸만 보고 싶은, 진실한 연인이다. 드넓은 평원에서 흑염소를 함께 구경하고, 웃으며 뛰노는 영화의 초반부만 보면 영락없이 장밋빛 미래가 예상된다. 그런 달콤한 순간도 잠깐. 쿠르드 지역에서 발생한 전쟁은 행복한 연인을 갈라놓는다. 아다르는 헤르만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연인과 생이별을 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장르의 수순을 밟는다. <헤르만>의 두 연인은 여느 멜로드라마 속 연인들이 그렇듯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다가도 엇갈린다. 다만 감독은 장르 안에서 담을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담아내려 노력한다. 고단한 피난 행렬에서 느껴지는 이라크의 현실, 임신했다는 이유로 삼촌에게 구타당하는 모슬렘 사회 속 여성의 지위 등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연인들의 에피소드에 겹친다. 어느 순간 영화는 두 남녀의 사랑을 넘어 전쟁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생명까지 그려낸다. 황폐한 사막, 메마른 전장의 풍경 속에서 새 생명을 잉태하는 아다르의 눈빛이 유독 빛나는 것도 이때다. 오직 강인한 의지만이 남아 있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 감독이 왜 커플의 사랑을 그토록 애틋하게 그렸는지 잘 알 수 있다. (김성훈 객원기자)

15일(목): <아편전쟁> OpiumWar

탈레반 정권이 끝났다고 해서 평화가 찾아온 건 아니다. 황야로 뒤덮인 아프가니스탄의 어느 마을. 두명의 미군, ‘돈’과 ‘조’가 조종하는 헬기가 추락한다. 이들이 떨어진 곳은 다름 아닌 양귀비밭. 마을의 유일한 경제적 터전인 이곳에서 두 군인은 말도, 문화도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책은 단 한 가지다. 마을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이 마을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재빨리 파악해야 하는 것. 즉 약삭빠른 염탐꾼이 되는 것이다.

감독은 철저하게 관찰자인 미군의 시선으로 영화를 전개한다. 처음에는 마을의 풍경이, 전쟁 중에 버려진 낡은 탱크가, 천으로 만든 공으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의 숨겨진 환부가 드러난다. 이웃에게 빚을 갚지 못해 양귀비밭은 물론이고 딸까지 팔아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가 서서히 두 미군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본주의는 문명화되지 않은 이곳을 천천히 잠식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탈레반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이라고 영화는 암시한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인 세디그 바르막 감독이 미군의 눈과 마음을 빌려 아프가니스탄의 현재를 얘기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김성훈 객원기자)

15일(목):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 Killer Virgin Road

영화제를 찾은 일본영화의 경향 중 하나는 배우들의 감독 겸업이다. 마쓰모토 히토시의 <심볼>을 비롯해 일본의 국민배우 야쿠쇼 고지는 <두꺼비 기름>을 내놓았고, <공기인형>의 배우이자 개그맨인 이타오 이쓰지가 <탈옥왕>을 연출했다.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 <용이 간다>의 배우 기시타니 고로의 연출작이다.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행복을 찾아가는 두 여자의 좌충우돌 수난극이다. 결혼을 앞둔 히로코는 난생처음 행복에 겨워하고 있다. 달리기든 일이든 무엇이든 꼴찌였던 그녀가 동료보다 먼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자신을 스토킹하던 집주인을 미필적 고의로 살해한 히로코는 시체를 치우려다 더 큰 난관에 부딪힌다. 한편, 외로움에 지쳐 자살을 결심한 한 여자가 히로코와 동행하게 된다. 여자는 히로코에게 제안한다. 시체를 숨겨줄 테니 나를 죽여줘. 물론 맘대로 되는 일은 없다. 뮤지컬과 뮤직비디오, 게임 기법을 차용한 영화는 이들의 여행을 시종일관 유쾌하게 담아낸다. <스윙걸즈> <구구는 고양이다>의 우에노 주리가 히로코를 연기한다. (강병진)

15일(목): <나는 비와 함께 간다> Come with the Rain

이병헌은 역시 또 멋지다. 최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창이’에 이어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의 ‘스톰 쉐도우’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간지를 자랑한 이병헌이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도 홍콩 삼합회의 보스 ‘수동포’로 매력적인 연기를 펼친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을 검거한 이후 경찰을 그만두고 사립탐정일을 시작한 클라인(조시 하트넷)은 한 중국 재벌에게서 아들 시타오(기무라 다쿠야)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멩(여문락)의 도움으로 시타오를 찾던 그는, 마침 그때 수동포의 아내 릴리(트란 누 엔케)를 인질 삼아 달아나던 조직원과 교통사고가 난다. 우왕좌왕하던 사이 릴리는 시타오가 사는 곳까지 흘러들고, 클라인과 수동포 모두 시타오를 찾아 나서게 된다.

<히어로>에서도 만난 적 있던 이병헌과 기무라 다쿠야가 제대로 만났다. 기무라 다쿠야는 가난한 사람들을 치유하는 능력을 지닌 예수 같은 존재다. 트란 안 훙 감독 특유의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불빛이 꺼지지 않는 도시 홍콩을 무대로 한다. <씨클로>의 ‘Creep’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번에도 역시 거의 라디오헤드의 뮤직비디오처럼 흘러가는 이 영화에서 흐느적대는 이병헌의 모습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성철)

16일(금): <바람의 소리> The Message /폐막작

1940년대를 배경으로 일본 정보부 장교와 정보부에 침투한 스파이의 대결을 그린 전쟁 심리 스릴러영화.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번지고 중국 전역이 전쟁의 기운으로 가득하던 1942년, 중국 본토에서 지도자들이 연이어 암살당한다. 암살당한 지도자들은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허수아비로 내세운 인물들. 일본 정보부는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해 함정을 판다. 가짜 암호에 걸린 5명의 정보부 내부요원은 감금당하고, 일본 정보부에서 특파된 엘리트 장교들은 이들을 차례로 심문한다. 음모와 배신으로 관계는 얽히고설키며 그 안에서 인물들은 우정을 시험받고 희생을 강요받는다. <바람의 소리>는 전쟁이라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는 개인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비춘다.

대만의 첸쿠오푸 감독과 중국의 가오췬수 감독은 각자의 장기를 살려 대중적이면서도 대담한 연출력을 선보인다. 대만에서 영화평론가, TV다큐멘터리 감독 등으로 활동했던 첸쿠오푸 감독은 <집결호> <비성물요> 등 펑샤오강 감독의 작품에 제작과 기획으로 참여한 바 있고, 가오췬수 감독은 TV드라마를 통해 연출력을 인정받은 중국의 젊은 감독이다. 영화는 또한 배우들의 연기에 크게 빚지고 있다. 리빙빙, 저우쉰, 황샤오밍 등 내로라하는 중화권 배우들은 캐릭터 속으로 완벽히 걸어들어가 섬세한 심리 연기를 보여준다. (이주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