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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내 사랑이다, 질긴 운명이다
2010-10-09

장이모 마스터클래스 ‘나의 인생, 나의 영화.’

문화대혁명 시기에 나는 16살이었다. 아버지가 군관출신이어서 정부에서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이었다. <산사나무 아래>의 남자 주인공인 징치우가 자괴적이고 우울한 느낌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마 그 때의 내 경험이 투영된 듯하다. 여러모로 중국 인민들에게는 고난의 시기였다.

1976년, 혁명이 끝나고 대입제도가 부활하자 공부에 욕심이 생겼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 더 이상은 기회가 없을 거라는 절박함이 있었다. 사진을 잘 찍으니 영화학교를 가보라는 친구의 권유에 베이징의 영화아카데미에 등록하려 했다. 그 때 27살이었는데 나이제한에 걸려 시험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문화부장관에게 직접 찍은 사진들과 함께 편지를 보냈더니 입학허가가 떨어졌다. 당시에는 대학교에 가려면 한국의 연좌제 같은 정치적 검증을 받아야 했지만, 너무 높은 사람의 허락이 있었기에 연좌제도 피해 가고 시험도 치지 않고 무사히 입학할 수 있었다. 정말 기적적인 상황이었다.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됐을 때에는 이 영화가 이토록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기에 영화제 심사결과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영화제 기간 동안 술 마시며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에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물가가 달라서 서베를린의 화폐를 몰래 들고 세관을 통과했다. 기분에 취해 동베를린에서 흥청망청 놀고 있었던 데다가 핸드폰도 없던 시기였으니, 영화제 측에서 수상자인 내가 어디 갔는지 알 길이 없었던 거다.

<인생>을 만들게 된 계기는 이렇다. 어느 날 소설가 위화가 새로운 작품을 하나 썼다면서 읽어보라고 권했다. 하도 읽어보라고 재촉해서 억지로 읽기 시작했는데 충격을 받았다. 원래 만들려던 영화는 미뤄두고 <인생>을 만들기 시작했다. 반세기에 걸쳐 일어난 중국의 정치적 운동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민감한 소재였다. 사전검열을 받자마자 상영금지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중국에는 사전 등급 제도가 존재하며, 등급분류가 없다. 그렇기에 영화가 심의를 통과하려면 모든 연령층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중국 영화계가 처한 현실이다. 중국이 국제화 시대에 맞춰 제도를 완화시킨다면, 너무나 많은 훌륭한 소재들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 대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영화를 많이 찍느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내가 영화를 너무 사랑한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솔직히 말해 지금은 돈이나 명예 따위는 모두 얻을 만큼 얻었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작업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다. 나와 같은 동년배 친구들은 모두 퇴직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내 남동생들도 퇴직해서 쉬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평범했던 나의 인생을 바꿔준 운명과도 같았기 때문에, 그 운명의 기회를 줬던 시대에 감사하고 그 운명에 미안하지 않기 위해서 현실에 안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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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현수 객원기자 / 사진 옥수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