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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진] 누군가의 여자, 신나는 경험
김성훈 사진 백종헌 2014-12-24

<국제시장> 김윤진

영화나 드라마에서 김윤진은 늘 혼자였다. 그녀의 곁엔 언제나 기댈 누군가가 없었다. 남편과 이혼했거나(<세븐 데이즈>(2007)), 남편을 살해한 죄로 교도소에 수감돼 아이를 낳았거나(<하모니>(2010)),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했다(<심장이 뛴다>(2010)). 내년 여름 시즌 방영될 미드 <미스트리스> 시즌3에서 그가 맡은 카렌 역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싱글 여성이다. 작품 속에서 강인한 여성을 연달아 연기했던 그가 윤제균 감독의 신작 <국제시장>(12월17일 개봉)에서 덕수(황정민)의 아내이자 대가족의 맏며느리인 영자를 연기했다. 윤제균 감독으로부터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이걸 왜 내게”라는 반응을 보였던 김윤진이 기어코 영자라는 옷을 입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언론 시사가 끝난 뒤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왜 울었나.

=영화를 처음 봤다. 큰 울림이 있었다. 마음이 진정되기도 전에 무대에 올라갔는데 영자가 감독님의 어머님 성함이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촬영하는 동안 감독님께서 ‘영자는 예쁘게 나와야 한다’, ‘할머니지만 고와야 한다’라고 주문하셨다. 짧은 대사도 무척 신경 쓰셨고. 그런 주문들이 다 이해가 되는 거다. 엄마를 얼마나 예쁘게 화면에 담고 싶었을까. 영자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배우들에게 한마디도 안 했던 게 고마웠다. 얘길 미리 들었더라면 배우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나.

-원래 눈물이 없는 성격이라고 들었다.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거의 울지 않는다. 직업병인 것 같다.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감정에 호소하면 마이너스가 될 뿐 플러스가 안 된다. 여자니까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감정을 엄격하게 자제하지 못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영자는 덕수의 아내이자 대가족의 맏며느리다. 홀로 가장 역할을 했던 전작과 비교하면 큰 변화다.

=깜짝 놀랐다. 감독님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얘길 하며 시나리오를 주셨다. 대본을 읽으면서 나 대신 다른 여배우들의 얼굴이 떠오르더라. 촬영 내내 메이크업을 거의 안 하다가 덕수와 영자의 결혼식 장면에서 메이크업을 좀 했는데 키가 크고 얼굴이 이국적으로 생겨 마치 외국인 며느리가 시집온 것 같았다. 화장 많이 안 했는데 왜 저렇게 티가 나지? 살짝 후회했다. 아예 화장을 하지 말걸.

-윤제균 감독에게 영자를 제안한 이유를 물어보진 않았나.

=‘영자가 (김)윤진씨에게 안 어울리는구나’라고 깨달으실까봐 안 물어봤다. 감독님이 정신 차리기 전에 빨리 촬영 들어갔다. (웃음) 영자는 어린 나이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타지(서독)에 나가 간호사로 일했다. 감독님은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갔던 내가 그런 영자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아니면, 제작자와 배우로 호흡을 맞췄던 <하모니> 때 ‘다음에 같이 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안했을 수도 있고. 그런데 왜 내게 제안하셨던 거지? (웃음)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갔던 최근작과 달리 영자는 덕수의 조력자다. 비중이 크지 않았기에 출연을 결정하는 데 고민이 되진 않았나.

=그건 전혀 고려 조건이 아니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캐릭터에 꽂히면 끝이다.

-영자는 어떤 면에서 꽂혔나.

=첫사랑에 빠지는 연기는 <국제시장>이 처음이다. 미국에서 자라다가 20대 후반에 한국에 들어와 <쉬리>로 연기를 시작해 출발이 보통 여배우보다 많이 늦었다. <로스트>나 <미스트리스> 같은 미드에서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캐릭터를 연기하긴 했지만 한국만 오면 강한 모성애를 보여주는 엄마 역할을 주로 맡았다. 한국영화에서 누군가의 여자를 연기한다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독일에서 덕수와 데이트하는 장면에서 보여준 ‘20대 김윤진’은 확실히 풋풋하고, 그래서 더욱 낯설었다.

=<쉬리> 개봉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른이 됐으니까 20대 시절을 본 관객이 없다. (웃음) 20대 시절 찍을 때는 조명도 특별했다. 촬영감독님께서 어려 보이도록 조명을 뽀샤시하게 신경 써주셨다.

-데이트 장면이 이렇게 좋은 줄 알았더라면 젊었을 때 로맨틱 코미디나 로맨스 장르를 좀 찍을걸 하고 후회는 안 했나.

=후회해봐야 뭐하나. 이미 지나간 일인걸. 당시는 로맨틱 코미디를 찍을 수 있는 나이대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때 남자주인공에게 기대는 역할은 관심 없었다. 이야기 안에서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캐릭터가 좋았다.

-일본 VFX 업체 포톤이 배우들의 얼굴을 어려 보이게 작업했다. 어색하진 않던가.

=모든 주름살이 제거됐다. (웃음) 클로즈업 장면은 손이 많이 갔지만 배우 움직임이 많은 장면은 손을 거의 대지 못했더라. 작업을 너무 매끈하게 해주셔서 화장품 CF처럼 부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한 작품에서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당연히 부담스러웠다. 특히 70대 노인 연기는 흉내내는 것으로 보이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노인 체험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무릎과 팔목에 관절을 함부로 못 움직이게 하는 아대 같은 장치를 달았다. 발목에는 모래주머니를 차서 다리를 무겁게 했다. 마른 편이라 솜뭉치를 배 주위에 고정해 한복을 입었다. 그렇게 준비를 했는데도 노인 연기가 처음이라 뭔가 이상하고 어색하더라. 한번 더 해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제대로 설 것 같다.

-스웨덴 출신의 특수분장팀 러브 라르손이 노인 분장을 맡았다. 분장을 받는 건 힘들진 않았나.

=처음에는 4시간 반, 나중에는 3시간 정도 걸렸다. 얼굴이 변하는 게 신기했다. 언젠가 이런 모습으로 변하겠구나. 언제 또 노인 분장을 받겠나. 즐거운 작업이었다.

-노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촬영 하루 전날 노래방에 가서 목이 쉬어라 노래를 불렀다고 들었다.

=70대가 되면 목소리가 커진다. 귀가 잘 안 들리니까. 하지만 목소리가 올라가면 ‘영자’스럽지가 않다. 감독님께서 점잖고 차분한 할머니를 원하셨다. 허리를 굽혀서 내는 목소리가 그나마 감독님이 원하신 할머니 목소리와 근접했다. 그래서 후시녹음할 때 허리를 굽혀 대사를 했다. 나중에 영화를 보니 덜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목소리에 큰 변화가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

-확실히 영자는 시나리오에 비해 훨씬 차분하고 점잖은 할머니더라.

=감독님께서 ‘윤제균’스러운 건 벗어나고 싶다는 말씀을 농담 삼아 하셨다. 감독님의 코미디 타이밍과 디테일은 기가 막히는데 이번에는 자제를 많이 하셨다. 영자가 덕수에게 ‘나 잡아봐라’ 하는 설정도 빼시려고 했는데 말렸다. 감독님 색깔을 많이 버리면 그것 또 아닌 것 같잖아. 나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내가 출연한 영화를 보러 올 때 ‘저 여자는 정의로울 것 같고, 또 뭔가 해결할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가진다. 그런 이미지를 완전히 버린다는 건 어렵다. 그런 지점 때문에 매번 갈등을 많이 한다.

-<국제시장> 작업하는 동안 술을 못 마시면서 술자리를 그렇게 따라다녔다던데.

=사람들이 술 취해가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다. 한국 남자들은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야 편해진다. 커피 한잔 마셔도 내 얘기를 다 할 수 있는데 술을 전혀 못 마시니… 친해지려면 술자리를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한다. 모르는 얘기를 듣는 것도, 상대방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다. 언젠가 설경구씨가 그랬다. “윤진아, 너는 노래 잘하고 술 잘 마셨다면 아주 좋았을 텐데. 그건 참 아쉽다.” (웃음)

-곧 시즌3에 돌입하는 미드 <미스트리스> 얘기도 좀 해보자. <국제시장> 촬영에 들어가기 전, 미드 <미스트리스> 시즌3 촬영 일정이 언제 나올지 몰라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다.

=<미스트리스>가 시즌2까지 방영된 뒤 대기 상태였다. <미스트리스> 제작진에 전화해 일정을 나한테만 얘기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심장이 뛴다>는 <로스트>가 끝난 뒤 들어와 찍은 거라 여유가 있었지만 <하모니>나 <세븐 데이즈>는 미드 촬영 중간에 들어와 2개월 반 만에 후다닥 찍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일정이었다. <미스트리스> 같은 13부작 드라마는 촬영기간이 5개월밖에 안 걸리지만, <로스트> 같은 24부작은 9개월이나 걸린다. 처음부터 내 스케줄에 맞는 한국영화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제시장>은 거대 예산이 투입됐고, 출연진이 많은 작품이라 제작에 폐가 될까봐 처음부터 스케줄을 신경 썼다.

-시즌3 촬영은 언제 시작하나.

=내년 2월. 여름 시즌에 방영될 예정이다.

-<로스트> 이후 작품 제안이 많이 들어왔을 텐데 <미스트리스>를 고른 이유가 뭔가.

=한 작품을 통해 인지도가 생기면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캐스팅 제의가 들어온다. 하지만 진짜 스타가 아닌 이상 미국에서는 오디션을 봐야 한다. 어떤 작품은 오디션 없이 바로 출연하기에는 스케줄이 안 맞았다. 어쨌거나 <로스트>의 선화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지금 <미스트리스>에서 연기하고 있는 카렌이다. <로스트> 때 J. J. 에이브럼스가 선화를 한국 여성으로 설정해준 것처럼 <미스트리스>에서 맡고 있는 카렌 역시 내가 합류하면서 한국 여성으로 설정됐다. 원래는 백인 캐릭터였다.

-부자(父子)를 차례로 사랑한다는 설정이 있지만, 30대 여성의 일과 사랑 그리고 고민을 다루는 과정은 현실적인 캐릭터다. 카렌의 어떤 면이 매력적이었나.

=어린 시절, 미국에서 방영되는 TV에서 동양인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었다. 간혹 동양 여성이 등장하면 “언니!”라고 외칠 정도였다. (웃음) 이후 브루스 리(이소룡)와 재키 챈(성룡)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크린이나 TV드라마에서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멋지게 나오면 큰 힘이 된다. 그건 타국에서 지내본 사람만 안다. <로스트>의 선화가 신비롭고 여성스러운 동양 여자였다면, 카렌을 통해 섹시하고 매력적인 동양 여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약간 엉뚱한 구석도 있지만 많은 남자들이 원하는 매력적인 여성.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동양 여자와는 거리가 먼 여성.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실제 모습이 카렌에 반영되기도 했나.

=물론이다. <로스트>는 제작진이 하와이에, 작가가 LA에 있어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미스트리스>는 모두 LA에 있어 제작진과 매일 만난다. 작가가 또래고, 매주 일요일에 함께 ‘아점’을 먹으며 수다를 떨어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장단점이 알게 모르게 카렌에 입혀졌다.

-<미스트리스>가 시즌3까지 오면서 시리즈가 장기화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맞다. 시리즈가 오래가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시즌3부터 배경을 캐나다 밴쿠버로 옮긴다. 그래서 사바나를 연기한 알리사 밀라노가 합류하지 못하게 됐다. 최근 둘째아이를 낳아 양육 때문에 밴쿠버로 가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시즌제에선 이런 일들이 종종 있다. 연기만큼이나 개인 삶도 중요하니까.

-이제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게 익숙해졌겠다.

=매주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한 작품 마무리한 뒤 넘어가는 거라 거리가 먼 것 말고는 힘든 건 전혀 없다. 한국영화와 미국 드라마에서 요구하는 연기 톤과 리듬이 각각 달라 활력소가 된다. 미국에서 드라마를 찍더라도 2년마다 꾸준히 한국영화 한편은 찍으려고 한다. 쭉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작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 주로 하는 일은 뭔가.

=영화 감상. 너무 일반적인 대답인가. 직업이니까. 개봉작은 극장에서 거의 다 챙겨본다. 책 읽는 것도 좋아한다. 감옥에서 출산하거나(<하모니>) 아이를 살리기 위해 감옥에 있는 살인범을 빼내는 것(<세븐 데이즈>)처럼 경험해선 안 되는 것만 연기를 하고 있지 않나. 상상력을 유지하기 위해 소설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2007년 출간된 자서전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에서 작품과 결혼에 대한 목표를 비중 있게 밝힌 바 있다. 30대 때 세웠던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룬 셈이다. 40대가 된 지금,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쉬리>를 찍을 때만 해도 신인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시선이 있었다. 지금은 그 나이 때 시작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데…. 나이를 먹어가는 것도, 그것 때문에 캐스팅에 제한을 받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민한다고 해서 바뀌는 문제가 아니잖나. 그저 잘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최고인 것 같다. 열심히 작업하고, 폐 끼치지 않는 연기를 꾸준히 하면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한다. 오랫동안 열심히 연기를 하고 싶다.

“감독님, 얘기 좀 해주세요. 왜 저를 영자에 캐스팅했는지.” (웃음) 카페 위층에서 인터뷰를 끝낸 뒤 안부 인사를 나누기 위해 내려온 윤제균 감독에게 김윤진이 물었다. 윤제균 감독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김윤진 예찬론’을 펼쳐 보였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연기력을 갖춘 배우이기 때문이다.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누가 영자를 연기할 것인지가 정말 중요했다. 또 하나는 (김)윤진씨가 로맨틱 코미디를 한번도 안 해봤다. <쉬리> 때보다 훨씬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김)윤진씨는 정말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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