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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식] “부딪히고 저질러야 나아갈 수 있다”

특유의 제작방식으로 주목받는 <프랑스 영화처럼> 신연식 감독

각본과 연출은 기본이다. 저예산영화 <러시안 소설>(2012), <배우는 배우다>(2013), <조류인간>(2014)을 연달아 연출해온 신연식 감독은 작품마다 각본, 연출 외에 제작과 제작투자, 배우 캐스팅 등에 깊숙이 관여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이래저래 바삐 활동하지만, 신연식 감독의 포부는 소박하다. 제작비 1억~2억원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선에서, 뜻이 맞는 스탭, 배우들과 함께 원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 김기덕, 홍상수 감독의 제작 시스템이 연상되는 그의 작업은 늘 이 목표 아래 진행되어왔다. 신연식 감독이 제작하고,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동주>(2월18일 개봉예정) 역시 콤팩트한 신연식 감독의 제작방식에 맞춘 작품이다. 그는 이 ‘소박한’ 작업을 위해서는 스타 캐스팅 시스템에서 벗어나 새로운 배우를 발굴하는 과정이 선결되어야 하며, 배우들 역시 이런 기회를 통해 연기자로서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고 믿는다. 바로 거대 자본의 틈새에서 서로 윈윈하는 전략이다. 네편의 영화로 구성된 옴니버스영화 <프랑스 영화처럼>은 이렇게 단단하게 구축해온 그의 의지가 응집된 의미 있는 프로젝트다.

-네편의 작품을 한데 엮은 옴니버스영화다. <프랑스 영화처럼>을 구상한 계기는 무엇인가.

=둘 다 고등학생 때 쓴 단편이다. <맥주 파는 아가씨>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시나리오다. 시나리오가 뭔지도 모를 때 써서 문제가 많다. 신 구분도 없고, 관념 과잉에 연극적인 상황이 주를 이룬다. 두 번째로 쓴 작품이 <프랑스 영화처럼>이다. 몇번 영화화하려고 시도했는데 번번이 안 됐다. 두 작품 모두 본의 아니게 아이돌 가수나 신인배우 트레이닝, 교보재용 대본으로 썼다. 나한테 레슨을 받은 배우들은 모두 이 두 시나리오를 안다.

-워낙 대본을 왕성하게 쓰는 스타일로 알려졌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습작을 한 결과인가 보다.

=사실 어린 마음에 그때는 영화라는 매체를 무시했다. 소설을 쓰는 게 꿈이라 하루 100장씩 소설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TV <명화극장>에서 아카데미영화상 수상작 시리즈를 본 거다. 에미르 쿠스투리차, 마틴 스코시즈 감독들의 작품이었는데, <대부2>(1974)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감독이 돼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쓴 게 아니라 그날 이후 자연스럽게 그냥 글을 쓰는 포맷이 소설에서 시나리오로 바뀌어버렸다. 영화로 만들려고 한동안은 담임 선생님한테 돈을 꿀까, 아버지한테 달라고 할까 고민도 했다. (웃음) 20년 후에 이렇게 찍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때의 시나리오를 ‘기어코’ 영화로 만드는 데는 매력도 있겠지만, 사실 민망함도 없지 않을 것 같다. (웃음)

=살짝 낯 뜨겁고 쑥스럽기도 한데 묘한 느낌도 들었다. 우연히 시작한 프로젝트지만 개인적인 애정이 많은 작품이다. 영화를 시작하고 때려치우기를 반복하던 스무살의 기억을, 말 그대로 20년이 지나 풀어놓은 거다. 스페인어를 전공한 터라 스무살 때 세달 정도 멕시코에 연수를 갔다 왔는데 지난해 멕시코영화제 참석차 다시 그곳에 가니 하숙집이나 다니던 곳들의 풍경이 그대로더라. 두편의 작품을 보는 기분이 그때와 좀 비슷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뜨겁게 사랑했던 상대를 오랜 세월 후에 덤덤히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두편 외에 <타임 투 리브> <리메이닝 타임>이 포함되는데, 이 네편을 아우르는 접점은 무엇인가.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시간에 대한 태도다. 내가 볼 때 내 영화 모두가 어떤 순간에 대한 인식인 것 같다. 네편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떻다는 관념 속에 살다가 그게 아니다라고 인지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어떤 사건이나 플롯이 배제된 상태에서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보고 싶었다. 장편이면 하기 힘든 실험이다. 가령 <프랑스 영화처럼>에서 주인공은 자기가 가진 비현실적인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같은 프랑스영화를 보더라도 자기가 인식하는 프랑스영화와 상대가 인식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리메이닝 타임>은 사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2014)가 나올지 모르고 해보려고 시도한 작품이다. 자막에 ‘2년 후’로 나오는데 실제로 배우들과 2년 후에 연결해서 찍는 거다. 그걸 세월이 흘러 장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보이후드>가 나와버렸으니…. (웃음) 후속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영화에 대한 생각도, 스타일도, 기술도 달라졌겠지만, 그때 쓴 작품이 신연식이라는 창작자의 에센스이기도 하다. <프랑스 영화처럼>에는 <러시안 소설>과 비슷한 장면도 있다.

=이후 영화들에서 가져다 쓴 부분들이 좀 있긴 하다. 그런데 그사이 시나리오가 워낙 여러 버전이 나왔다. <맥주 파는 아가씨>의 남자주인공이 원래는 시 쓰는 장애우였는데, 지금은 그 한명을 장애우와 시 쓰는 대학생 두명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프랑스 영화처럼>에서는 사소하지만, 안국동에 헌혈소가 있고 휴대폰에 불 들어오는 설정 같은 옛날의 흔적들을 살렸다. 사실 작품만 놓고 했다면 민망해서 못했을 텐데, 레슨을 꾸준히 해왔고 그 연장선상에서 기획된 프로젝트라 더 뻔뻔하게 할 수 있었다.

-배우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다는 계획을 내비쳤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기획이 연결되는 건가? 다솜, 전지윤, 스티븐 연, 소이, 신민철 등 젊은 배우들이 대거 참여한다.

=연기에 뜻이 있는 배우들이 도움을 청하러 많이 온다. 기획사가 멤버 모두의 미래까지 내다보고 투자하는 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연기에 욕심이 있는 아이돌을 비롯해 기존 배우들은 따로 살길을 찾는 거다. 상업영화에 출연한 배우들도 특정 이미지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 역시 자신이 해오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어 한다.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이 배우들도 좀 다른 연기가 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말로 설득하기는 힘들지만 작품으로 보여주는 거다. 장편을 작업하는 건 서로 여건상 힘들지만 2~3회차 촬영이라면 매달려볼 만하다. 순제작비 2억원 이하의 프로젝트들을 기획해서 손익분기만 맞춘다면 그 안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신인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번 작품을 기획했다.

-그중 씨스타의 다솜은 드라마에 출연하며 연기에 대한 의지를 꾸준히 보여줬는데,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맥주 파는 아가씨>와 <프랑스 영화처럼> 두편에서 다른 이미지로 신선하게 다가온다.

=원래는 네편 모두에 다솜을 출연시키려고 했다. <타임 투 리브>를 통한 앙상블 연기, <맥주 파는 아가씨>를 통한 정극 연기, <리메이닝 타임>을 통한 코믹 연기, <프랑스 영화처럼>을 통한 이미지 연기. 이렇게 네편을 통해 각각 다른 연기를 보여주는 거다. 이 영화를 통해서 바라는 건 다솜이 <배우는 배우다> 때 (이)준이만큼만 배우로 주목받았으면 좋겠다. 그때 준이도 투자사와 같이 진정한 신인배우를 발굴하자는 합의하에 출연시켰다. 대한민국 기획사에 소속된 모든 신인들을 만났고, 준이도 아이돌 가수가 아닌 그런 신인배우로서 만났다. 아이돌 산업이 워낙 크게 성장하다 보니 원래 배우가 꿈인 아이들도 아이돌 가수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가 흥행이 되지 않더라도 배우들이 잘되면 뿌듯하다. 돈을 벌거나 상을 받으려면 이런 프로젝트를 시도하지 않았을 것 같다.

-네편 모두 다솜이 했더라면 좀더 지금 말한 기획적인 의미가 커졌을 것 같다.

=그 부분은 나도 좀 아쉽다. 원래 <리메이닝 타임>의 점쟁이 역할로도 생각했는데, 스티븐 연과 시간이 안 맞아서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고, 그러면서 다솜은 두편에만 출연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원래 뭔가 갖추어 놓고 일을 벌이는 게 아니라 그냥 시작하고 보는 성격이다. 이런 기획도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다가 흐지부지되는데, 저질러야 진행된다고 생각한다. 아, 정말 저런 프로젝트를 시도하는구나, 인지가 되는 거다. 일단 시작하니 중간에 콘텐츠 판다에서도 배급을 제안하더라.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지금도 만족한다. 제작사나 투자사나 감독이나 늘 현장에 배우 없다고 하지 말고 서로 손해 안 보는 선에서 함께 노력해보자는 거다. 상업영화 투자 메이드를 가능하게 해주는 배우가 점점 더 많아졌으면 한다. 지금도 하정우를 기다리는 감독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정우씨가 워커홀릭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웃음)

-IPTV, 웹 드라마 등 플랫폼의 다양화로 최근에는 그나마 배우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신인배우 발굴도 활발해진 측면도 있지 않나.

=물론 본인들 생각보다 기회가 많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기회를 얻기가 쉽지는 않다. 알려지지 않은 신인배우가 상업영화에 출연하는 건 예전보다 어려워졌다. 투자사에서 작은 배역까지 체크를 하니 시선이 더 보수적이고 엄격해졌다. 모험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좁아진 거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지 않나. 누군가는 이걸 깨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나 역시 지금까지 영화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시도를 해왔다. 주변에서 미쳤다고 하는 일도 저질렀다. 신인배우가 연기에 목마르다고 말만 하고 투쟁할 의지가 결여된 걸 볼 때면 안타깝더라.

-그간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만드는 자급자족 시스템을 구축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도 그렇지만, 신연식 감독과의 작업이 주는 시너지가 이제는 캐스팅에 어느 정도 메리트로 작용할 것 같은데, 이를 체감하나.

=지금까지 일관되게 작품을 해온 방향이 있으니 배우들 사이에서 인지된 측면이 있다. 물론 홍상수, 김기덕 감독님 같은 경우 국제적으로 입지가 구축되고 시스템을 마련했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평가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보다 더 제작에 치중하려고 한다. 수익을 위해 상업영화도 지금보다 더 하려고 하고. 2월에 개봉할 영화 <동주>에는 제작자로 참여했다. 연출을 맡은 이준익 감독님과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준익 감독님이 좋은 배우들이 많은데 잘 챙기지 못한다고 하시더라. 3~4년에 한번씩 작품을 하게 되니 좋은 배우도 상황이 안 돼서 같이 못하게 되는 거다. 그런 배우들을 많은 프로젝트를 가동해서 대중이 인지하게 만들고, 그 배우들이 상업영화에서 관객과 더 많이 만나게 해주고 싶다.

-<동주> 제작을 시작으로, 그런 제작 프로젝트를 더 확장하는 건가.

=일종의 ‘아티스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동주>가 시리즈의 첫 작품이고 두 번째 작품으로 이미연 감독과 가수 이난영을 소재로 한 작품을 준비 중이다. 시나리오를 완성해 캐스팅을 진행 중이다. 박정범 감독과는 일제강점기에 풍자와 해학으로 인기를 얻은 월북 코미디언 신불출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 중이다. 이명세, 이정향 감독 등도 의사를 밝혔고, 나도 한편 정도 연출해서 총 열편의 시리즈를 구상하고 있다. 이준익 감독이 <동주>를 한 것처럼 네임 밸류가 큰 감독일수록 오히려 저예산 작품을 하는 게 도전일 수 있겠더라. 감독님이 내가 1억원으로 제작 시스템을 구축한 걸 보고 본인도 호기심을 갖고 도전해보고 싶어 도움을 요청하셨다. 감독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배우들뿐만 아니라 감독들 역시 산업 논리에서 벗어난 작품을 해보고 싶은 욕망을 다들 가지고 있다. 아티스트 기획도 그렇게 시작했고 모두 재밌겠다며 반기고 있다.

-대상이 되는 열명의 아티스트는 모두 정해졌나, 기억에서 사라진 인물들을 이렇게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 다 정해지지는 않았다. 사실 신불출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그는 당시에도 급진적인 아티스트였다. 이 작업으로 왜 그가 당시에 개그를 하려고 했는지 밝혀 현재의 시대상과 접목하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이난영이라는 존재도 한국 사회에서 탈근대를 이루지 못한 인물이다. 해소할 수 없으니 끊임없이 나가려고 시도했던 거다. 열명의 아티스트를 조명함으로써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근원을 찾는 단초를 제공하고 싶다.

-<조류인간>을 촬영하면서 <동주>의 시나리오를 썼고, 지금도 쉬지 않고 시나리오를 생산하고 있다. 그런 생산력의 원동력이 어디 있나.

=오전에 한 타임, 오후에 한 타임, 그리고 저녁에 한 타임 계속 시나리오를 쓴다. 뭘 오래도록 쥐고 있는 걸 못 견디는 성격이라 빨리 하고 손을 놓는다(신연식 감독은 인터뷰를 진행한 정동의 한 카페에서 하루 종일 시나리오를 쓴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막 40대로 진입하고 보니 힘이 좀 달린다. 하루 종일 매달려 있다 보니 요즘은 몸에도 부담이 오더라. 몇주 전에는 위경련으로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 아직 내 몸이 청년의 몸인 줄 알고 너무 달리고 있더라. 내가 그동안 너무 발굴의 의미, 대의명분으로 하는 작품들만 많이 만드는 게 아닌가 반성도 들었다. 작품 수가 그런 시도적 측면에서만 많아지니 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말만 그렇지 이 의미를 버리지는 못할 것 같다. 오지랖이 넓은 걸 수도 있는데 아직 젊을 때 이런 시도를 해야 내 인생의 후반기가 아름답지 않을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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