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 다른 이름Michael Courtice;Michael Kertes;Michael KertÉsz;MihÁly KertÉsz;마이클 커티즈
- 직업감독
- 생년월일1886-12-24
- 사망1962-04-10
- 성별남
소개
대표작 <양키 두들 댄디>, <밀드레드 피어스>, <아버지의 인생>, <화이트 크리스마스>
마이클 커티스는 비평가들을 혼동시킨다. 그는 앨프리드 히치콕이나 오슨 웰스처럼 분명한 기호나 선호하는 장르가 없었으며,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처럼 일관된 스타일이나 프로 근성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가장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서도 일정 수준의 영화를 만들어낸, 영화에 관한 한 빈틈없는 실용주의자였다.
헝가리에서 태어나서 부다페스트의 왕립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는 배우로 영화에 입문했으며 곧 감독으로 전향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오스트리아로 정치적 피신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줄곧 감독생활을 하면서 영화 연출에 관한 역량을 쌓아갔다. 20대 초반 내내 영국, 프랑스, 스칸디나비아에서 감독일을 했는데 <소돔과 고모라>처럼 그의 감독생활에 중요한 몇편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 영화들은 대부분 소실됐거나 크레딧에 이름조차 올라 있지 않은 것이 많다.
1929년 38살의 커티스는 할리우드로 옮겨와 워너브러더스를 위해 일하면서 <노아의 방주 Noah’s Ark>를 토키영화로 만들어 일약 흥행감독의 자리를 굳히게 된다. 1930년대 들어 그는 애럴 플린을 허세스런 검객 영웅으로 만들어준 로맨틱 모험물들 <블러드 선장 Captain Blood>(1935), <바다매 The Sea Hawk>(1940), <로빈훗의 모험 The Adventures of RobinHood>(1938)을 감독했고 그간의 흥행 실패를 보충할 수 있었다. 1940년대 들어 그는 자신의 영화인생에 기념비가 될 만한 세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것들은 아주 특별하고 각각 뚜렷하게 다른 장르를 대표하는 동시에 나름의 영화적인 시간과 공간을 획득한 작품들이기도 하다. 가장 미국적인 연극인이며 감독인 조지 코핸의 전기를 영화화한 <양키 두들 댄디 Yankee Doodle Dandy>(1942)는 제임스 캐그니를 앞세운 미국의 버라이어티쇼와 뮤지컬 무대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당시 워너브러더스에서는 뮤지컬 형식으로 포장한 전기물이 유행하고 있었고 이러한 붐에 편승해 마이클 커티스는 <양키 두들 댄디> 외에도 <이것이 군대 This Is the Army>(1943)(어빙 베를린의 전기) <밤과 낮 Night & Day>(1946)(콜 포터의 전기)을 만들었는데, <양키 두들 댄디>야말로 헝가리 이민자인 마이클 커티스가 미국의 초기 뮤지컬과 대중음악 형태에 관한 이해를 얼마나 훌륭히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토착적인 영화이기도 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미국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영화 속에 녹여냈다. 현재까지도 꾸준히 상영되는, 할리우드가 세계의 관객들에게 선사해준 가장 낭만적인 영화 중 하나인 <카사블랑카>는 앤드루 새리스 같은 평론가들에게 할리우드 시스템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우연한 행복한 사고’ 정도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 중 하나는 <카사블랑카 Casablanca>(1943)가 1943년 당시 메가 히트를 기록한 영화였고, 이 작품으로 커티스 자신도 그해 각종 최우수 감독상을 휩쓸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전적으로 동시대적이고 심지어 시사적인 것이며,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는 매력 외에 커티스 감독의 영화적 감수성도 무시할 수 없는 기여를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커티스 감독은 1945년 미국사회의 물질주의와 섹스, 부자관계에 대해 어둡고도 복합적이며 신랄한 비판을 가한 필름누아르의 걸작 <밀드레드 피어스 Mildred Pierce>(1945)를 만들어낸다. 제임스 케인의 소설을 각색한 <밀드레드 피어스>는 어떻게 보면 미국적인 부자관계에 대한 자신의 은근한 애정을 담아낸 <아버지의 인생 Life with Father>(1947)의 그림자 같은 영화이기도 할 것이다. <밀드레드 피어스>에서 드러나는 가족관계는 그만큼 기형적이고 쓰라린 것이었으며 페미니스트 영화학자들은 재빨리 조앤 크로퍼드가 분한 캐릭터가 2차대전중 남성들의 역할을 떠맡은 강한 미국 여성들에 대한 은근한 경계심을 반영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1950년대 들어 할리우드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그는 워너사를 떠나 다른 제작사에서 일했고 이에 비례하여 그의 영화의 질들도 급강하하기 시작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듯 마이클 커티스의 30∼40년대 작품들은 워너브러더스의 스튜디오 시스템 자체를 대변하는 듯 보이며 그의 170편에 달하는 영화목록 자체가 하나의 미스터리일 것이다. 그는 거의 모든 종류의 장르를 섭렵하면서 영화를 만들었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고집하기보다는 하나의 체계적인 시스템에 자신을 맞춰나가는 감독이기도 했다. 그의 독선적인 작업 방식은 그와 일하는 스탭이나 배우들 모두 그를 싫어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나 효율성의 면에서는 최상의 것이었다. 커티스의 영화적 양식에 대한 이해와 통제는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나올 법한 규격화된 작품들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었으며, 오늘날도 그의 영화들은 미국의 가장 인기있는 영화목록에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b>[씨네 21 영화감독사전]</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