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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입니다

OUR PRESIDENT

2017 한국 12세이상관람가

다큐멘터리 상영시간 : 119분

개봉일 : 2017-05-25 누적관객 : 1,854,867명

감독 : 이창재

  • 씨네216.50
  • 네티즌8.83
국회의원, 시장 선거 등 출마하는 선거마다
번번이 낙선했던 만년 꼴찌 후보 노무현이
2002년 대선 당시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도입된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에 당당히 출사표를 던진다.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도시에서 치러진 대국민 이벤트.
쟁쟁한 후보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제주 경선 3위, 울산 1위, 그리고 광주까지 석권한
지지율 2%의 꼴찌 후보 노무현이 전국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지지율 2%의 꼴찌 후보에서
대선후보 1위, 국민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2002년 전국을 뒤흔들었던 노무현, 그 기적의 역전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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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별점 (4명참여)

  • 6
    박평식그 투혼과 감격으로 적폐청산!
  • 5
    이용철아름답게 피었던 노란꽃, 그에게 쓴 연서
  • 7
    황진미‘노무현 정신’의 본질을 일깨우며, 초심을 촉구하다
  • 8
    김성훈자꾸만 떠오르는 그때 그 사람
제작 노트
P R O L O G U E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고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다.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저희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노무현, 2002년 대통령 후보 출마 연설 中


S T O R Y

국회의원, 시장 선거 등 출마하는 선거마다 번번이 낙선했던 만년 꼴찌 후보 노무현이 2002년 대선 당시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도입된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에 당당히 출사표를 던진다.
제주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도시에서 치러진 대국민 이벤트. 쟁쟁한 후보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제주 경선 3위, 울산 1위, 그리고 광주까지 석권한 지지율 2%의 꼴찌 후보 노무현이 전국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지지율 2%의 꼴찌 후보에서 대선후보 1위, 국민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2002년 전국을 뒤흔들었던 노무현, 그 기적의 역전 드라마

2002년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제

국민경선제는 정당의 당원이 아닌 일반 유권자(국민)들이 각급 선거의 공직 후보 선출 과정에 직접 참여해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는 제도이다. 2002년 전까지는 정당의 대의원이 대선 후보를 선택하였고 곧 이는 당 내에서 확보한 계파의 크기와 비례하는 결과를 낳았다. 새천년민주당이 2001년 10월 재선·보궐선거에서 참패한 후 미국의 예비선거를 차용한 국민참여경선제를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2002년 2월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선거인단 중 50%를 기존의 당원이 아닌 일반국민으로 구성했다. 대의원 20%, 당원 30% + 일반국민(신규 공모당원) 50%로 인원은 총 7만여 명. 2002년 3월 9일 제주를 시작으로 4월 20일까지 16개 시도를 돌며 주말과 휴일에 치러졌으며, 최종 58%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대의원과 당원은 1인 2표의 가중치를 두었다. 2002년 노무현 후보가 66.5% 득표율로 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S T O R Y

● 2002년 국민참여경선 ●

왜 2002년 경선인가? 그해 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2002년 국내 정치사상 최초로 도입된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제는 민주당세가 결집된 이인제와 김대중 대통령의 적자 한화갑, 그리고 DJ의 복심으로 등장한 김중권, 세 후보간의 대결로 점쳐지던 상황. 그때 지지율 2% 안팎의 지지를 받고 있던 노무현이 등장한다. 단 한 달 만에 무명에 가까운, 국회의원도 연거푸 낙선한 그가 어떻게 중앙정치에 뛰어들게 되었을까?

국민경선은 곧 노무현에게 가능성을 열어주는가?
2002년 국민경선의 도입은 곧 노무현의 승리로 연결 가능한가? 전혀 그렇지않다. 50%의 당원 및 대의원은 국회의원의 하부조직으로 당내에서 의원과 지구당 위원장을 가장 많이 확보한 후보가 가장 유리하다. 그런 측면에서 노무현은 50%의 가능성을 접고 시작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노무현에게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줄을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주경선 즈음 합류한 천정배, 이재정이 거의 전부였다. 이 같은 역전드라마는 한국 정치사상 전무후무한 결과였다.

광주경선에서 1등을 했다…?
2002년 경선은 당시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다. 왜일까? 세 번째 경선이었던 광주경선은 정치사적으로 최초로 지역주의를 넘어선 선거였다. 영남은 영남후보를 충청은 충청후보를 호남은 호남후보를 찍는 철저한 지역주의의 한계를 부순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그 신호탄은 금새 꺼지고 만다.

지역주의로 돌아온 대전 충남
울산과 광주에서의 선전은 지역주의의 극복이라 표방되었으나, 이어진 대전과 충남에서는 무시무시한 지역색이 반기를 든다. 그 결과 노무현은 제주, 울산, 광주에서 1,018표 대 885로 앞서갔지만, 대전 충남에서 몰표를 받은 이인제에 의해 완전히 압도되어버린다. 이인제가 누적 3,211표를 받은데 반해 노무현은 반도 안되는 1,514표로 뒤지기 시작한다. 노풍은 잠시 착시를 일으킨 미풍인가? 이인제 대세론이 다시 자리를 잡는 걸까?

무승부 그리고 팽배한 접전
무승부가 된 강원도에 이어 다시 경남에서 1,713표대 468표로 노무현이 1위를 하지만 대전충남에서의 실점을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시 이어지는 대구에서의 승리와 박빙의 인천, 경북에서의 탈환 등 지역주의와 통합주의, 진보와 보수, 철새 정치인과 정통 야당후보, 색깔론이 나오고 음모론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보수세력의 결집과 조선일보의 등장
이회창 캠프에서는 애초 노무현을 상대로 여기지 않았기에 언급을 자제했다. 하지만 문화일보와 SBS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회창 대 이인제 대결시에는 압승으로 나오는데 이회창 대 노무현은 오차범위 내에서 열세로 나온 것이다. 이에 조기 노풍을 진압하기 위해 한나라당이 나서기 시작하고, 서서히 조선일보가 전면적으로 노무현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주류의 통일전선이 형성된 셈.

이런 아내를 버려야겠습니까?
이인제와 민주당의 보수세력, 한나라당, 조중동이 합세하여 노무현을 집중 포화하는 가운데 급기야노무현 장인의 좌익활동이 대서특필되기 시작한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가 합작해서 입을 맞춰 헐뜯는 것 방어하기도 힘이 듭니다. 제 장인은 좌익활동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해방되는 해 실명해서 앞을 못 봐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지만, 결혼 한참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고도 결혼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 잘 키우고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이런 아내를 버려야겠습니까? 그러면 대통령 자격이 생깁니까?” 단 한번의 정면돌파로 노무현은 부활한다.


H O T I S S U E 0 1

2002 월드컵보다 뜨거웠던 국민참여경선
그 기적의 대역전 드라마!

2002 한일월드컵은 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참여 열기를 끌어낸 시민들의 자발적 축제였다. 대한민국 축구팀은 48년간 5번의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지만, 4무 10패의 처참한 성적의 팀이었다. 그런 팀이 꿈에 그리던 첫 승을 거두고, 승승장구해 4강까지 갔으니 얼마나 신이났겠는가? 이 국민적 열광은 기본적으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던 꼴찌의 반란에 그 동력이 있었다. 특히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신화는 스포츠사의 업적을 넘어, 시민들의 폭발적인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21세기 문화혁명이었던 셈이다. 그 붉은 6월의 열기에 3개월 앞서 대한민국 정치사에도 그에 견줄만한, 아니 그 보다 더 뜨겁고 드라마틱하게 펼쳐진 40여일 간의 16부작 흥행 드라마가 있었다. 2002년 3월 9일부터 4월 20일까지 전국 순회를 통해 16차례 열린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이 바로 그것.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당원이 아닌 일반 국민에게 경선 문호가 개방된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제는 이른바 ‘민심(일반 국민 지지도)과 당심(당원 지지도)’의 대결 양상을 띠며, 극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후 2017년 현재까지 각 정당들의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이 있어 왔다. 하지만 2002년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처럼 지지율 2% 안팎의 꼴찌 후보가 50% 지지율에 육박한 1등 후보를 꺾은 예는 전무하다. <노무현입니다>는 그 2002년 국민참여경선에서 지지율 2%의 만년 꼴찌 후보 노무현이 골리앗 같은 지지율의 대세 후보 이인제를 누르고, 대선 후보 1위가 되는 과정을 담은 휴먼 다큐멘터리다. 부연하면, 자신을 지지하는 단 한 명의 국회의원, 계파도 하나 없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정치인 노무현. 그리고 그를 국민 후보로 만들어낸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바람이 이뤄낸 승리, 그 기적의 대역전 드라마를 다룬 작품이다. 혹자는 2002 월드컵의 승리가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기적이었다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가 되어 그 보다 더 롤러코스터 같은 궤도를 돌고 돌아, 비로소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클라이맥스를 생각한다면, 2002년의 국민참여경선의 파급력은 과연 블록버스터급이 아닐까? 각본 없는 드라마, 전무후무한 역전의 레이스, 영화보다 더 극적인 스토리, 2002년 봄의 기적을 담은 영화 <노무현입니다>는 오는 5월 25일 극장에서 관객들과 짜릿한 승리의 기쁨을 함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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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 전회 매진! 개봉예정영화 검색어 1 위
2017 전주국제영화제 최고 화제작!

2017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선정작 <노무현입니다>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첫 공개됐다. 2002년 국민참여경선, 지지율 2%의 꼴찌 후보가 1위 대선후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담은 영화 <노무현입니다>는 공개와 동시에 많은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이를 입증하듯, 전주국제영화제 상영 전회(3회) 매진을 기록하고, 개봉예정영화 일간검색어 1위(포털사이트 다음,2017.05.02 기준)에 등극하는 등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최고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노무현입니다>는 국회의원, 시장 선거 등에서 번번이 낙선했던 ‘노무현’이 2002년 대선 당시, 대한민국 정당 최초로 치러진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에서 2%의 지지율로 시작해 어떻게 대선후보 1위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되짚는 작품. 특히 그의 어떠한 점이 국민들의 자발적 지지를 이끌어냈는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역동적인 경선 현장의 감동적인 연설, 시민들의 생생한 유세 영상과 함께 다양한 인터뷰이들의 증언을 통해 세밀하게 들려준다. <사이에서>(2006), <길 위에서>(2013), <목숨>(2014) 등을 통해 인간에 대한 남다른 시선과 깊이 있는 연출로 휴먼 다큐멘터리의 새 지평을 열어온 이창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던 ‘사람’ 노무현을 내밀하게 소환한다.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영화가 공개되자 관객들은 “저 먼저 전주영화제에서 봤습니다. 참아왔던 무엇인가가 터져나왔습니다... 꼭 보시길... “(zoto****), “역시 가슴이 뜨거워지는 영화입니다. 비주류 노무현이 어떻게 민주당 경선과정에서대선 후보가 되었는지, 노무현과 그 주위 사람들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영화가 전개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리워지는 영화네요~”(mrdu****) 등 추천을 아끼지 않고 있다. 언론 또한 “양지를 박차고 험지로 내려가 좌절과 아픔을 겪었지만 시민의 힘으로 부활해 우뚝 선 노무현의 모습은 감동과 벅차오름 속에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100분의 상영 시간이 모자라게 느껴질 만큼 노무현에 대해 세밀하게 기록한 영화다”(오마이뉴스 성하훈 기자), “웃는 장면에서도 눈물이 난다”(한겨레 구둘래 기자),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객석 곳곳이 눈물바다가 됐다. 지난해 개봉했던 <자백><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 이어 또 한번의 정치 다큐멘터리 열풍이 예상된다”(맥스무비 차지수 기자)는 다양한 시선의 리뷰를 전했다. 전주국제영화제 첫 공개 후 뜨거운 호평 이끌어내며 최고의 화제작으로 등극한 <노무현입니다>는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기대를 모으며, 오는 5월 25일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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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되기까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몰랐던 ‘사람’ 노무현 이야기!

<노무현입니다>는 2002년 국민참여경선의 드라마틱한 대역전의 클라이맥스와 더불어 인간 노무현을 오롯이 증언하는 영화다. 자연인 노무현은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노무현’이라는 콘텐츠는 그가 조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가 되고,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국회의원, 대통령이 되어 정치인으로 살았던 시절을 지나, 서거 8주기를 맞은 현재까지 그 어떤 정치인보다 깊고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세상에 존재한다. 시중에 출간된 故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수백 가지의 도서들만 보아도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의 다양한 층위의 콘텐츠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다시 노무현인가. 왜 아직 노무현인가. <노무현입니다>는 노빠도 아니었고, 참여정부의 정책 기조 전반에 비판적이었던 시민의 한 사람인 이창재 감독이 여전히 애도 혹은 추모를 멈출 수 없는 대통령, 아니 한 인간의 품성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한 영화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인 공과를 떠나 왜 많은 시민들은 그를 가장 좋아하는 전직 대통령(호감도 1위, 48.7%, 2017년, 프레시안/리서치뷰)으로 손꼽는 걸까.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공격을 받았던 전직 대통령이 아니었던가. 모든 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라는 우스개소리가 유행이었던 시절이지 않았나. 과연,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 노무현을 아무도 몰랐던 게 아닐까? 이창재 감독은 <노무현입니다>의 기획 단계에서 40여 권 가량의 노무현 대통령 관련 도서와 수많은 영상을 보고 그를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식 인터뷰 촬영 개시와 함께 모든 게 무너졌다고 고백했다. 알면 알수록 규정할 수 없는 깊고 넓은 품성의 ‘노무현’이라는 콘텐츠를 인터뷰들을 통해 실감했다는 것. 이창재 감독이 무당, 비구니, 호스피스 병동의 시한부 환자들과 성직자 등 신과 인간,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인간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파고들었던 휴먼 다큐멘터리스트이기에 그의 전언에 미더움이 실린다. 더불어 <노무현입니다>가 노 전 대통령의 일생 중 2002년 국민참여경선을 중점으로 다룬 까닭은 경선이 시작된 3월부터 마감된 4월까지의 그 해 봄이 정치인 노무현의 가장 화려한 순간이었다는 생각에서라고 이창재 감독은 밝혔다. <노무현입니다>는 변호사, 국회의원, 대통령이었던 노무현과, 애틋한 친구, 권위를 내려놓은 상사였던 노무현에 관한 생생한 증언들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람’ 노무현을 스크린 너머로 되살려낸다. 정치인 노무현의 일생 중 가장 드라마틱한 시절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인간 노무현을 증언하는 영화 <노무현입니다>는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8주기인 5월 23일 이튿날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A B O U T M O V I E 0 1

● 희망 ●
노무현은 바보다, 희망이다
노무현이라는 콘텐츠의 힘

“경선 중에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자기가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들판을 건너가고 있다고.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해놓고는, 제가 이길 겁니다. 그 말을 꼭 하시거든요” 노무현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소설가 김수경이 건넨 말 속에 <노무현입니다>가 만들어진 단초가 들어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노무현이라는 콘텐츠가 가진 결연한 희망 혹은 단호한 낙관이다. 더불어 어떤 고난과 불의에도 굴하지 않고 무릇 정치는 대의를 가져야 한다는 원칙과 소신으로 노무현이 얻은 ‘바보’라는 별명. <노무현입니다>는 바보와 희망으로 상징되는 노무현이라는 콘텐츠의 힘을 담아낸 작품이다. <노무현입니다>는 故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이창재 감독의 개인적인 애도로 시작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본격적으로 주변인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노무현이라는 콘텐츠가 어떤 패러다임에 가둘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담론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꼴찌 후보였던 노무현이 대선 후보 1위가 된 2002년 국민참여경선의 대역전 드라마를 영화의 테마로 결정하자, 그가 노무현에 대해 영화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보다 명확해졌다. 그것은 노무현이라는 콘텐츠가 세상에 던진 희망과 낙관의 메시지 그리고 불가능에 가까웠던 노무현의 도전에 희망을 걸고 그를 자신들의 대표로 이끌고 기어코 국민의 대통령까지 만들어낸 시민들의 드라마였다. 멈추지 않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드라마 <노무현입니다>는, 많은 시민들이 함께 공유했던 희망과 승리의 기억을 소환하는 영화다. 혹자는 기획단계에서부터 대선을 앞두고 선동하려는 영화가 아니냐 우려를 비추기도 했지만, <노무현입니다>가 궁극적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국민경선’이라는 정치 이벤트의 드라마틱한 재미와 참여라는 행위의 즐거움이다. 희망과 열정, 참여를 통해 눈부신 승리를 거둔 노무현과 시민들의 기적의 역전 드라마 <노무현입니다>는 5월 25일 관객들에게 그 끝나지 않은 희망의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A B O U T M O V I E 0 2

● 사람 ●
노무현과 함께, 울고 웃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혹은 관객, 1:1 교감의 시간

<노무현입니다>의 인터뷰이들에게 인터뷰어인 이창재 감독이 건넨 주요 질문은 크게 네 가지였다. “당신에게 노무현은 어떤 사람이었나? 그의 무엇이 당신을 움직였나? 당신은 왜 그를 잊을 수 없는가? 당신은 그를 만나고 어떻게 변했나?” 단, 인터뷰이들에 따라 2002년 경선 과정에 대한 질문이 추가되었고, 노 대통령의 서거를 직면한 순간의 감정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모든 질문은 감독이 영화를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노무현입니다>의 네 가지 질문은 인간 노무현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는 증언이자,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스스로의 고백을 이끌어낸 두 가지 층위의 미덕을 갖는다. 특히 이를 배가시키기 위한 이창재 감독의 내적 전략은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1:1 내밀한 교감이다. 이는 故 노무현 대통령의 대화방식 혹은 소통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노무현이 언제나 당신 자신과 상대방 1:1, 맨투맨 관계를 중시했고 ‘나와 당신’이라는 관계맺음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더불어 이를 스크린 너머의 관객이 인터뷰이와 직접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Face to Face 촬영방식으로 선택했다. 흔히 방송이나 영화 등의 각종 매체에서 사용하는 1/4 각도의 측면 인터뷰가 아니라서 카메라를 보고 말하는, 즉 관객과 눈을 맞추는 방식이다. 이는 낯설고 파격적인 스타일이지만, 오히려 인터뷰이의 주관성을 더욱짙게 만들며 관객에겐 진정성 어린 호소가 되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내용적으로는 인터뷰이와 감독이 1:1로 교감하면서 담겨진 이야기이지만, 외적으로는 인터뷰이가 관객과 내밀하게 교감하게 되는 것. 이창재 감독의 이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다. 관객은 인터뷰이 들이 들려주는 노무현과의 일화나 그에 대한 소회를 오롯이 대면하게 되며, 자신이 알았던 노무현을 확인하거나 또는 미처 몰랐던 노무현을 깨닫는 등 각자 자신에게 스며있는 그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는 적극적 감정의 확장을 도모하며, 그에 대한 애도의 작은 매듭을 짓게 된다. 39명이 들려주는 <노무현입니다>에서의 인간 노무현의 여러 면모에 대한 증언과 고백은 그가 간단하게 규정할 수 없는 매우 깊고 넓은 품성의 인간이었음을 확인시킨다. 동시에 그러했기에 한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이 있었고, 그러하기에 또 지금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노무현입니다>는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사람 노무현을 세상에 다시 부르는 영화다. 5월 25일, 우리는 세상에 다시 말을 걸기 시작하는 노무현을 만나게 될 것이다.


A B O U T M O V I E 0 3

● 기록 ●

노무현의 사람들에게 노무현을 듣다
72 명, 12,000 여분의 구술, 45 분의 선택!

취재 인터뷰이 리스트만 200여 명, 2002년 민주당 국민참여경선과 故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들은 전방위적으로차고 넘쳤다. 오히려 그들을 찾는 것보다 대표성 있는 인물을 추려 인터뷰이들을 확정하는 것이 제작진의 고충이었다는 후문. <노무현입니다>를 위해 인터뷰한 인물들은 최종 72명이었고, 여기에서 영화의 콘셉트와 맥락에 맞게 최종적으로 편집되어 본편에 짧게나마 등장하는 인터뷰이는 총 39명. 109분의 러닝타임에서 45분 가량을 차지한다. 유시민 작가, 안희정 충남도지사, 명계남 노사모 대표일꾼부터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감시한 정보국 요원 이화춘과 변호사 시절의 운전기사 노수현까지 노무현의 삶을 총 망라해 다양한 층위의 시선으로 노무현을 들려주는 인터뷰이들이 등장한다. 39명의 인터뷰이들은 크게 인간 ‘노무현을 만든 사람들’과, 꼴지 후보 ‘노무현을 이끈 시민들’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주로 노무현과 함께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그의 품성과 인간적인 고뇌, 정치인 노무현을 다각도로 증언한다면, 후자는 즐겁고 보람찼지만 전쟁을 방불케 한 국민참여경선 과정의 눈물겨운 분투를 가감없이 세밀하게 회고한다. <노무현입니다>는 한국 정치의 가장 큰 폐단인 지역주의의 벽을 허물기 위해 4번의 낙선에도 굴하지 않고, 동서화합의 선봉에 선 정치인 노무현을 바보라 부르며 그의 유일한 세력이 되고, 계파가 되어 2002년 국민참여경선에서 기어코 자신들의 대표로 우뚝 세운 시민들의 이야기이다. 한 편의 영화 안에 72명, 12,000여분의 구술을 모두 담는 건 불가한 일. 하지만 제작진은 차후, 이 12,000여분의 인터뷰 기록을 잘 다듬어 도서로 출간할 계획이며, 또한 건립 예정인 노무현기념관에 인터뷰 영상 전체를 사료로써 영구 기증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노무현입니다>는 故 노무현 대통령 사후 그를 기억하고, 증언하고, 기록한 다양한 시도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물과 방대한 분량의 인터뷰를 담은 콘텐츠이자, 구술 사료로써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가 모아진다. 만년 꼴찌 후보 노무현을 국민의 대통령으로 만든 시민들의 이야기 <노무현입니다>는 진영 논리를 뛰어넘어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만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가꾸어갈 수 있는 유일한 보루임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A B O U T M O V I E 0 4

● 애도 ●

노무현을 위해,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다짐하다
‘ Goodbye (안녕)’가 아닌 ‘ Hello (안녕)’라는 ‘애도’

<노무현입니다>는 노무현의 육성, “안녕하세요? 노무현입니다”로 영화의 문을 닫는다. 영화가 노무현의 그 담담한 인사로 끝나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마치 인간 노무현이 지금 이렇게 영화로 다시 살아나, 정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희망이 실현되는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안녕을 묻는 것도 같다. 한편으론 그가 흥얼거리는 노래 [선봉에 서서]의 가사처럼 씩씩한 걸음으로 영원히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도 같다. 이렇듯 <노무현입니다>는 우리에게 실컷, 노무현의 앞모습과 속살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는 표정 없는 묵묵한 뒷모습을 흐릿하게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노무현입니다>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노무현이라는 인간, 콘텐츠, 바람 혹은 시대에 인사를 건네라고 말을 거는 영화다. 애초 이창재 감독이 마음에 그렸던 <노무현입니다>의 플롯은 한국사회에 지대한 담론을 던지고 떠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과 죽음, 그시작과 끝 이른바 생성과 소멸이 테마였다. 완성된 본편의 소멸의 플롯은 거의 생성의 절정에서 명멸하는 한 점처럼 담겼다. 오히려 그런명멸의 순간이 인간 노무현이 견디고 쟁취한 드라마틱한 삶을 보여주는 최상의 플롯이었다. 이창재 감독은 노무현의 생성의 절정을 대한민국 정치사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2002년 경선의 대역전 드라마로 보았다. 특히 색깔론, 지역주의, 정치모략 등이 판치는 한국정치의 축소판이자 확장판이면서 동시에 언론과 정치인들이 좌지우지하던 선거라는 참여정치에서 국민들이 가장 첨예하게 등장한 최초의 민란이라고 생각했다. 노무현은 그렇게 최초의 민란, 시민들을 유일한 동지로 삼아 대통령 후보가 되고,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자조했고, 스스로 자연의 한 조각으로 돌아갔다. 2017년 5월 23일,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8주기다. 혹자는 ‘언제까지 노무현이냐’고 힐난하고, 또 어떤 이는 ‘아직 노무현이다’라고 항변한다. <노무현입니다>는 유시민의 말을 빌어 전한다. 떠나 보내려고 한다고 해서, 떠나 보내지는 게 아니라고. 떠나 보낼 때가 되면 저절로 떠나가는 거라고. 노무현에 대한 애도가 마감되는 건 사회가 바로 잡혀질 때 종료되리라고 본다고. 그렇다. 사회가 바로 잡혀질 때가 본디 노무현이 말하던 ‘노무현의 시대’였을 게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입니다>는 그와 우리가 함께 꿈꾼 시대와의 아름다운 조우를 간절히 촉구하는 영화다. 그리하여 ‘굿바이’의 안녕이, 아닌 ‘헬로우’의 안녕으로 맞이하라고, 그렇게 그의 애도를 마감하자는 영화다. 노무현의 시대를 넘어서 다시 ‘희망’을 꿈꾸는 영화 <노무현입니다>는 5월 25일 우리 모두에게 “안녕하세요?”의 인사를 건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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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의 친구 ●

“머릿속에서 늘 유서를 생각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를 아주 외롭게 두었다”

문재인
현 19대 대통령 / 전 참여정부 비서실장

1982년 노무현과 부산에서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했다. 2002년 대선 당시 부산선대위 본부장을 지냈고, 참여정부의 민정수석비서관,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서 스스로가 대통령 감이 된다, 라고 말했을 만큼 20년 신뢰로 쌓은 동업자이자 일생의 지기다. 그 관계의 깊이와 밀도가 故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 낭독과 짧은 소회를 통해 오롯이 드러난다.

“낭랑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어떨 땐 쌍욕하는 소리. 싱거운 농담하는 그런 게 항상 머릿속에서 안 떠나요”

이화춘
중앙정보부 12기 공채요원

80년대 노무현, 문재인, 김광일 등 부산지역 운동권 변호사들의 동향보고 및 감시활동으로 노무현을 처음 만났다. 노무현 변호사에게 5월 광주민중항쟁의 기록 도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관련 영상물을 건네 받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재야의 운동권 요주의 인사와 감시자인 적대적 관계로 만났지만, 평생 서로의 인품과 신뢰를 바탕으로 깊은 우정을 나눴다.

“중학교 월사금이 없어서 선생께 뺨 맞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그 애를 토닥거려 주고 싶었어요”

김수경
작가 / 기업인

1987년 6월 항쟁 때 부산 서면의 한 집회에서 연설하는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처음 봤다. 이후 몇 차례 지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만났고, 1993년 법률 사건의 의뢰인으로 만나 평생 친구이자 후견인이 되었다. 혁명아로서의 노무현의 어린 시절을 마음 깊이 공감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장 솔직한 사람’으로 기억하며, 자신의 인간관계에서 100% 믿는 유일한 존재라고 인간 노무현을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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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의 동지 ●

“화를 내는데 그 밑에 슬픔이 든 게 보이면 영구 중독돼서 못 빠져나오죠.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자기 가슴을 먼저 열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매료 당해요”

배갑상
선거 전문가

1987년 6월 항쟁 때 첫인상이 ‘장비’같았던 노무현을 처음 만나 인간적으로 반했다. 그후 노무현이1988년 부산 동구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을 때 정치 참모로 활약했다. 1992년 개인적인 이유로 정치 현장을 떠났으나,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노무현이 아닌 상대방 문정수 시장 캠프에 참여해 노무현의 낙선에 이바지했다. 이후 배신자로 낙인 찍혀 노무현이 출마한 모든 선거에 공식 합류하지 못했지만, 노무현은 그를 비공식적으로 그의 모든 선거에 중용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랑스러운 분이었고요. 뭔가 해주고 싶은 분이었어요”

유시민
2002 대선 당시 노무현 캠프 자원봉사자

노무현이 초선의원이던 1988년 당시, 5공 청문회와 국회 노동위원회 활동에서 강렬한 첫인상을 느꼈고, 유달리 강한 정의감과 소통능력에 매료당해 미래의 대통령으로까지 마음에 담았다. 국민통합, 동서화합, 지역감정 극복의 시대적 명분에 가장 맞는 후보라는 판단으로 2002년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노무현 캠프의 참모는 아니었지만, 공식적으로 2002년 국민참여경선부터 자칭타칭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의 임무를 해왔다. 노무현이 학습능력, 언어능력, 소통능력에서 발군의 정치인임을 증언하지만, 무엇보다 인간 노무현이 사랑스러웠고, 뭔가 해주고 싶은 사람이었다고 가슴 뭉클하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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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캠프 참모 ●

“아주 성질이 있는 사나이에요. 한성질 하시는데 너무 슬퍼서 그걸 자꾸 이제 잊고 싶은 거죠”

안희정
노무현 캠프 참모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사무국장으로 노무현과 처음 일을 시작했고, 2002년 경선, 대선을 거쳐 대통령 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으로 활동했다. 이광재 전 국회의원과 더불어 좌희정, 우광재라 불리운 최측근이며 정치인 노무현의 곁을 지킨 오랜 참모다. 대선자금 문제로 고충을 겪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거리낌없이 동업자이자 동지라고 부르며, 마음에 빚이 있다고 말한 아픈 손가락. 정치인으로 인간으로 깊은 교감과 신뢰를 나눈 동지다.

“나라를 바꾸기 위해서 대통령의 자리가 필요했던 거죠”

이광재
노무현 캠프 참모

1988년 국회의원 노무현의 첫 보좌진으로 시작, 2002년 대선 당시 ‘눈물 흘리는 노무현, 기타 치는 노무현’을 만들며 노무현 캠프의 기획팀장으로 활약한 가장 오래된 참모다. 1992년 총선 낙선 후 안희정을 찾아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자고 결의했다. 대통령 당선 후 청와대에 입성해 대통령비서실 비서관, 국정상황실 실장 등을 역임했고, 2004년부터 2010년까지, 17대, 18대 국회의원, 35대 민선 5기 강원도지사에 당선됐다. 기획력과 아이디어가 탁월해 노무현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돈 없이 정치 할 순 없나? 이게 나한테 가장 숙제다. 돈 안 드는 정치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거냐. 그러시면서 우시는 거예요”

서갑원
노무현 캠프 참모

1992년 낙선한 노무현의 보좌진으로 시작, 2002년 대선까지 노무현 참모로 활동했다. 노무현 캠프의 유일한 호남 출신 보좌관으로 그 누구보다 동서통합을 정치적 비전으로 내세운 노무현에 대해 깊은 고마움과 존경을 품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의 전비서관, 정무1비서관을 지냈고, 2004년부터 2011년까지 17대, 1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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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의 지인 ●
“6월 민주화항쟁시, 시민들에게 나눠줄 유인물을 새벽 두 세 시에 자다 일어나 비밀 인쇄소에서 찾아, 당신 차로 늘 손수 배달해주셨어요”

고호석
부림사건 피해자 / 고교 교사

1981년 부산 용공 조작 사건인 일명 ‘부림사건’의 고문 피해자로 재판에서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다. 이후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선 노무현 변호사가 리더로서의 역할 외에서 시민들과 함께 실질적인 비밀 활동을 했음을 증언했다. 자신의 성격 탓에 노무현 변호사의 선의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회환을 고백하며 눈물을 삼켰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변호사님이 매일 청원경찰에게 15도 인사를 해요. 늘 먼저 하시기 때문에 황송해서 벌써 밖에 나와 있어요”

노수현
운전기사

1982년부터 1987년, 노무현 변호사가 초선의원이 되기 전까지 운전기사로 6년간 근무했다. 그에게는 첫 직장이었다. 소탈한 성격과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자세, 교통법규를 지키는 원칙 등 변호사 시절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 노무현의 품성을 증언했다. 입사 다음날에 노무현 변호사에게 [민법 대의]와 [민법 총칙] 두 책을 선물 받았고, 운전 외에도 변호사 사무를 도왔다. 그가 증언한 무궁무진한 노무현 변호사와의 에피소드는 본편에 겨우 두어 개 실렸지만, 마음 속 깊이 ‘깨어있는 시민이어야 한다’고 증언하는 대목은 그가 시민으로서 노무현의 시대정신을 유산으로 받았음을 절절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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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참모 ●
“이렇게 하셔야 대통령님 지지도가 올라갑니다. 이게 저희 실수였던 것 같아요. 노무현을 제가 제대로 몰랐던 거죠”

조기숙
교수 / 선거 분석가

2002년 민주당 국민참여경선 당시 선거 분석가로 활동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청와대 입성을 제안 받았으나 사양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삼고초려 끝에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참여정부의 홍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인터뷰를 진행한 총 72명 중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인터뷰이라는 후문. 최근 출간한 저서 <왕따의 정치학>을 통해 진보언론의 노무현에 대한 비판을 다양한 근거를 들어 낱낱이 분석했다.

“대통령한테 혼나면 도망갈 데가 없습니다. 그렇게 안 혼내셔도 무서운데...”

강원국
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으로 8년동안 대통령의 말과 글을 쓰고 다듬었다. 근무 초기 1년간 올리는 모든 연설문마다 계속 혼나서 심각하게 퇴직을 고민했고, 당시 혼날 때의 솔직한 심정의 고백은 관객들을 여지없이 빵 터지게 한다. 인터뷰이 중 유일한 웃음 담당자라는 후문. 가장 인상 깊은 연설문은 2006년 4월 25일 발표한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땅입니다”로 시작하는 [한일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문]으로, 이는 노대통령이 직접 초안을 쓴 것. 이 연설문을 계기로 그분이 나를 가르쳐주셨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가졌던 대통령 가운데 가장 국민에게 책임 있게 하려고 했던 대통령으로 기억합니다”

양정철
당시 노무현 언론보좌역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언론보좌역으로 시작해, 대통령 당선 후 참여정부에서 5년간 국내 언론비서관을 거쳐 홍보기획비서관으로 근무했다. 노 대통령 퇴임 후엔 봉하로 내려가 대통령의 연구 작업을 보좌하다가 서거를 맞았다. 이후 노무현재단 설립 작업을 맡아 초대 사무처장을 지냈다. 가장 민감하고 어려운 사안에 대해 국민 앞에 직접 나서 책임 있게 해명하려 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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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
“우리나라 정치 안된다. 노무현 같은 사람이 또 떨어지는구나...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저런 사람이 우리의 일꾼이 되어야지 하는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명계남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정치 1번지 종로 현직 국회의원이 김대중당 딱지 붙이고, 지역구도를 없애겠다고 2000년 16대 총선에 부산 북강서을 후보로 출마한 노무현을 돕기 위해, 일면식도 없이 부산에 내려가 그를 처음 만났다. 진정성 있고 진솔한 말로 하는 노무현의 연설에 충격을 받고 단박에 매료당했다. 노무현의 4번의 낙선 후 국내 최초 정치인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생겼고, 초대 대표일꾼이 되어 2002년 국민참여경선을 시작으로 대선 기간 내내 열정적으로 활약했다.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이었습니다. 그들이 참여였고, 그들이 노무현이었습니다”

김진향, 김철, 김헌태, 나호주, 문성근, 박흥서, 신규용, 심화섭, 이상호, 오영애, 조슬기, 황의완 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2000년 4월 13일, 정치인 노무현이 지역주의에 희생되는 것을 목격하며 그를 온라인상에서 ‘바보’라 칭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은 더는 이러한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온라인에서 뜻을 모아 노무현을 지지했고, 이를 오프라인 전국 모임으로 확대해나갔다. 이것이 국내 최초 정치인 팬클럽이자 순수한 시민 모임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시작이다. 지지율 2%의 만년 꼴찌후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수천 수만, 아니 수백만의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사모’에 가입하고 회비를 내지 않았어도 2002년 대한민국엔 노무현을 바라고 기대하고 응원하고 가슴 조렸던 이름 모를 수많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저 노사모는 드러난 이름이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런 사람들이 한 표의 힘으로 덤빈 것, 그것이 역사를 바꾼 것이다’라는 것이 ‘노사모’들의 생각이다. 2002년 국민참여경선의 드라마틱한 전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증언한 가장 큰 역할 역시 이들의 몫이었다. 이들의 증언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H E L L O
P R E S I D E N T

● 노무현 ●
1946년 9월 1일 경남 진해 봉하 출생
1975년 4월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1977년 ~ 1978년 대전지방법원 판사, 변호사
1978년 ~ 1987년 법무법인 부산 인권변호사
1988년 ~ 1991년 제13대 국회의원(부산 동구) / 통합민주당 VS 민정당 허삼수
1992년 낙선 - 제14대 국회의원(부산 동구) / 통합민주당 VS 민자당 허삼수
1993년 민주당 최고위원
1995년 낙선 - 부산시장 출마, 제1회 지방선거 패배 / 통합민주당 VS 민자당 문정수
1996년 낙선 - 서제15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 통합민주당 VS 신한국당 이명박
1996년 ~ 1999년 제15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보궐선거) /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2000년 4월 낙선 - 제16대 국회의원(부산 북강서을) / 민주당 VS 한나라당 허태열
2000년 8월 ~ 2001년 3월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
2003년 2월 ~ 2008년 2월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2009년 5월 23일 서거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으로 인해 어렵게 진영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였다. 졸업 이후 농협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그 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군 제대 후 1971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사법고시에 매진하였다. ‘빨치산 부역 혐의로 옥사한 장인’과 ‘불투명한 고시생’ 문제로 얽혀 양가가 티격태격한 결혼은 “판사 안하면 어떠냐”라는 노무현의 엄포로 풀렸다. 1973년 결혼하였으며, 네 번째 도전만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해,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1백억원대 소송도 연달아 수임하는 등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1981년 부림사건(대학생 독서서클 검거)의 변호를 맡으면서, 교도소에서 57일간 고문을 당한 한 학생의 시퍼런 몸과 겁에 질린 눈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이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변론에도 참여하며 투사로 탈바꿈했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으며 시민운동을 시작했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항쟁 후 재야 활동을 하던 그는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부탁을 받고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정치에 입문하였고, 1988년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에 입성한 노무현은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으며, 그해 11월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와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5월 광주 자위권 발동’ 연설 때 명패를 던지는 등의 행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이른바 ‘5공 청문회 스타’가 된 것이다. 1990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합당하여 민자당을 창당하기로 하자 노무현은 이를 부도덕한 야합이라는 이유로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고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이후 부산에서 3차례 총선과 시장선거에 나섰으나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2000년 4월,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하지만 이때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지지모임 ‘노사모’도 결성되었다. 국회의원 낙선 후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김근태,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한 국민참여경선제 끝에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이인제와 호남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한화갑을 모두 밀어낸 대이변의 승리였다. 하지만 지방선거와 재보선을 거치며 노무현의 지지율은 바닥까지 곤두박질 친다. 이에 ‘후보교체론’까지 나오는 등 입지가 위태로워지지만, 정몽준 후보와의 극적인 단일화로 부활했다. 그리고 결국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당선 이후,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퇴임 후에는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가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 꿈은 정치인생 후원자였던 소위 ‘박연차 게이트’와 함께 허물어졌다.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비판과 의심의 여론이 일었던 검찰의 수사를 통해 오랜 지인들과 가족들이 비리의 혐의를 받았으며, 그 자신도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은 세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이던 2009년 5월 23일 새벽,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갑작스런 서거 후 시민들의 추모 물결은 거대하게 일었다. 봉하마을을 찾는 조문객들은 몇날 며칠 끊어지지 않았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분향소가 마련되어 추모가 이루어졌다. 또한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 작업이 제기되면서 ‘노무현’과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새롭게 부각되었고, 노무현의 신념과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리고 참여정부가 시도한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들이 수면 위로 올라 왔으며, 참여정부가 ‘민주화’라는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에 있어서 어떤 역사적 지위를 가지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한 논의도 시작되어, 그는 사후에 더욱 의미 있는 조명을 받고 있다.


D I R E C T O R ’ S C O M M E N T

동료 작가의 일흔이 훨씬 넘은 모친은 그 세대 대부분이 그러하듯 철저히 여당 지지자였다. 작년 지인들과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봉하마을에 들르게 되었다. 다녀온 뒤 모친은 며칠을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말도 않고 가끔 혼자서 소리 죽여 우셨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 양반이그런 사람인 줄 알았나. 여기저기서 욕만 해대니 상판대기 보기 싫었단 말여. 죽어서도 엄청 욕을 해댔는데 가서 보니 아니더라고… 그런양반이 아니더라고… 내가 속고 산 것도 억울하고, 애꿎은 양반 욕한 것도 미안하고, 그런 양반이 죽어서 분하고… 생각이 떠나질 않네…추스를 수가 없어…” 관광 코스로 한두 시간을 둘러본 게 전부인데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얼 느끼고 왔길래 평생 지지하던 정당을 한 순간에 버리게 했을까? 나는 봉하마을도 다녀온 적도 없고 그저 광화문 영결식에 참석한 게 그에 대한 유일한 추모였다. 광화문에서 몇십 년 만에 광고회사 입사동기를 만났다.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고, 민망한 자리라 나는 얼떨결에 물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로?” 그는 “그냥 좀 미안하잖아…” 무엇이 미안하단 걸까? 정치색은 고사하고 삼성맨에 잘 부합되는 드라이한 그가 마음의 어떤 부분이 작동하여 검은 양복을 차려 입고 광화문까지 오게 만든 걸까? 마치 오래 전 헤어진 연인의 페이스북을 훔쳐보는 느낌이랄까? 서거 후 습관적으로 그의 책들을 읽고 그의 유튜브를 훔쳐보곤 했다. 도대체 떠나버린 연인을 되새기는게 무슨 의미인가? 그의 부재를 내가 인정하지 못하는 건가? 그의 완전한 부재를 애도를 통해 되돌릴 수 있다는 건가? 그렇지 않다면 왜… 기획단계에서 왜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평가를 배제하냐고 질문을 받곤 했다. 나는 정치와 정치인 노무현을 모른다. 내겐 그저 인간 노무현만 보였다. 정치라는 전략과 전술의 계산식에서는 그가 작은 패배에 굴복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전술적 모순이자 오류일 수 밖에 없다. 변호인 문재인은 단연코 무죄선고를 확신했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선택하는 게 현명한 결론이다. 나는 그가 평생을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정치인 나아가 정치꾼들은 그의 선택을 이해하거나 수용할 수 없을 것이고 그마저도 폄하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최소한 그의 마지막은 올바른 정치적 선택이 될 수 없으므로. 정치의 핵심으로 다가갈수록 본질은 왜곡되고 전술만 남는다. 많은 이들이 사람이기에 앞서 정치꾼이 되어버리곤 한다. 그는 88년부터 2008년까지 20년간 정치인으로 살았지만,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로 인해 노무현에게서는 정치인의 냄새보다 인간의 냄새가 더 짙게 풍겨난다. 나는 그의 찰나 같은 모습을 담았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찰나의 순간에 그의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다큐멘터리로 만든다면 단연코 정치인 김대중을 다룰 것이다. 김대중은 내게 있어 훌륭한 정치인이었다. 노무현은 내게 있어 훌륭한 인간이었다. 나는 무당, 스님, 호스피스 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영성(靈性)을 탐구해왔다. 논리적 맥락과 내면적 감성의 균형이 내가 추구하는 작품의 기본 방향이었다. 나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거 7년이 지나도록 그가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후 일년 이상 내 정신을 흔들어놓은 위인은 없었다. 나는 그를 제대로 떠나 보내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대붕역풍비(大鵬逆風飛), 생어역수영(生魚逆水泳).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즐겨 인용하던 글이다. 바람을 거스른 새는 어디까지 날아갔을까? 바람을 거스른 탓에 그가 너무 멀리 간 것일까? 그 바람 그 새의 실체는 무엇일까?


E P I L O G U E

선봉에 서서 하늘을 본다
고향집 하늘 위엔 굴뚝 연기가
투사가 되어 조국의 내일
이 몸과 이 혼으로 싸워나가리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
자랑스런 민주의 투사
영광의 장정 뿌려진 피땀
어머님의 눈물이련가
파도가 되어 피끓는 함성
민주 아~ 내 사랑아 싸워나가리

[선봉에 서서]

엔딩씬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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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와 스탭

감독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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