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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Offret - Sacrificatio The Sacrifice

1986 프랑스,영국,스웨덴 15세이상관람가

드라마 상영시간 : 149분

개봉일 : 2024-08-21 누적관객 : 39,248명

감독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출연 : 엘란드 요셉손(알렉산더) 수잔 플리트우드(아들레이드) more

  • 씨네219.00
  • 네티즌8.88

절망으로 향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망의 씨앗을 심다

스웨덴 남부 발트해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
생일을 맞이한 작가 알렉산더는 실어증에 걸린 아들과 함께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며 현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알렉산더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들이 집에 찾아오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제3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한
지구의 종말 소식을 듣게 된다.
충격에 휩싸인 알렉산더는 처음으로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신에게 절박한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믿음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신에게 맹세한 약속을 감행하기로 한다.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세상을 구원하려면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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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별점 (7명참여)

  • 8
    박평식영원히 간절하게, “불쌍히 여기소서”
  • 9
    임수연도스토옙스키적 수난에서 니체의 회귀 사상을 거쳐 도달한 인간 구원의 시적 이미지
  • 10
    김소미“이것이 과연 기적일까? 이것은 진실이기도 하다”(<시간의 각인>)
  • 10
    오진우희망과 기적에 관한 타르콥스키의 최후의 영화
  • 8
    이자연다음 세대로 유유히 전이되는 형형색색 슬픔의 팔레트
  • 10
    김신한치의 과장도 없이 말하건대, 이것이 바로 영화사 정점의 비주얼
  • 8
    김경수백치가 되어서라도 영화로 멸망할 세계를 구원하겠다는 숭고한 의지, 혹은 뼈아픈 죄의식
제작 노트
죽은 나무에 3년 동안 물을 주어 꽃을 피웠다는 전설에 대한 어느 노작가의 믿음이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세계를 구하고 어린 아들의 실어증을 치료한다. 그의 아들이 처음으로 말하며 묻기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아빠! 그게 무슨 뜻이죠?”

희생이라는 이름의 사랑의 메시지
시보다 더 간결하고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영상미의 극치
천재 영화 시인 타르코프스키의 최고의 걸작

<희생>은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으로, 자신의 아들 안드류샤에게 바쳐졌다. 폐암으로 1986년 12월 29일 영화 거장으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마감하기까지 그가 만든 7편의 영화들은 단 한 편의 평작도 없는 20세기 최고의 걸작들로 꼽히고 있다. 그 중 그의 유작이 되고만 <희생>은 깐느 영화제 사상 유례 없이 4개 부문 - 그랑프리(특별 심사위원), 최우수 예술공헌상(촬영상), 기술상, 국제 비평가 협회상 - 을 휩쓸며 세계의 찬사를 받은 작품으로 더욱 유명하다. 깐느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 이 작품은 타르코프스키가 일관적으로 추구하였던 작품 세계가 최고로 응축되어 표현되었다는 격찬과 존경을 받은 작품이다.
문명과 혼탁해진 영혼에 대한 비판, 인간 양심과 도덕에 대한 반문 등 심오한 내용 이외에도, 작고한 문학 평론가 김현이 얘기한 것처럼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완벽한 카메라 움직임이나 그 안에 담겨진 영상미를 음미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 <희생>의 감동은 충분히 새롭고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희생>은 시간과 공간 그 자체에 매혹되게 만드는 타르코프스키 영화 세계의 정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희생>이 우리에게 경이로 다가오는 이유, 다섯 가지

1. 수상 경력
- 깐느 영화제 사상 유일하게 4개 부문 동시 수상!
제 39회 깐느 영화제 시상식장은 경이와 감동의 도가니였다. 병상에 누워있는 러시아의 천재 감독,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 4개 부문상 - 그랑프리(특별 심사위원), 최우수 예술 공헌상(촬영상), 기술상, 국제 영화 비평가 협회상 - 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깐느의 자존심도 타르코프스키에게만은 극찬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영상
- 시보다 간결하고 그림보다 아름다운 영상미의 극치
영화사상 유례없이 전 작품 중 한 편의 평작도 없는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 <희생>에서 그의 영화적 역량을 최고로 발휘한다. 타르코프스키적 시공간을 독특하게 창출해면서 영상을 시적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기적과 같은 영화적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3. 스토리
- 세상의 구원을 테마로 하여 완벽한 구성으로 짜여진 만 하루 동안의 이야기
이 영화는 알렉산더라는 인물 주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실제 일어난 일 같기도 하고 꿈 같기도 하며, 아니면 한바탕의 굿 같기도 하다.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주인공 알렉산더는 세계의 구원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그 주변의 인물들도 그러한 알렉산더로 인해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며 세상 역시 그 전날 아침처럼 평온해진다. 완벽한 구성 속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내면 연기는 우리들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시종일관 긴장의 물결 속으로 몰아간다.

4. 촬영
- 당대 최고의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의 절묘한 카메라 워크
그가 담아내는 세계는 넉넉하다. 그 넉넉함 속에 깃든 관용과 깊이는 그가 만들어낸 세계를 부드럽게 감싸, 다소 무거운 주제가 보편적인 정서로 우리 마음에 자리하게 한다. 그래서 스웨덴의 대표적인 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거의 전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쳐 영상화되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희생>에서 타르코프스키와 닉비스트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스벤 닉비스트는 우리에게 <화니와 알렉산더>와 <프라하의 봄>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하며 베르히만 감독의 <화니와 알렉산더>와 <외침과 속삭임>으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두 번 수상하였고 <희생>으로 칸느 영화제에서도 촬영상을 수상하였다.

5. 음악
- 영혼에 감동을 전하는 중후한 고전음악
<희생>에서 우리는 바하의 마태수난곡과 스웨덴의 신비한 민속음악과 피리 음을 만날 수 있다. 그 느낌은 영혼에 감동을 전하는 중후한 깊이로 다가온다.

About Movie

<희생>의 제작 동기

작품 활동의 자유를 찾아 자신의 작품 활동을 박해하는 고국 소련을 떠나 서방 세계로 망명해야만 했던 타르코프스키에게 운명의 여신은 끝까지 미소 짓지 않았다. <노스텔지아>를 촬영하는 도중에 쓰러져 의료 검사를 받은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이 폐암에 결렸고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노스텔지아>가 완성되자마자 그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가 될 작품을 선정하는데 몰두한다. 그는 자신이 전 인류에게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희생>의 제작에 들어간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눈물겨운 투병 생활

<희생>을 촬영하는 동안 타르코프스키는 병세가 악화되어 촬영 도중에 입원해야 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영화 제작진들과 그를 아끼는 모든 이들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눈물겨운 투병을 하는 타르코프스키를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그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까봐 걱정하였다.
몇 번의 입원 생활을 거치면서 가까스로 촬영을 마친 타르코프스키는 편집 등의 후반 작업을 아예 병실에 누워서 마무리해야만 했다.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 등 스태프들이 그의 병실을 방문하여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면서 후반 작업을 진행했다. 죽음을 마주한 그는 암과의 고통스러운 마지막 싸움 속에서도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은 채 집요하게 <희생>을 완성해내고야 만다.

깐느로부터 전해진 감동의 드라마

타르코프스키가 암과 투병하는 동안 “나의 병이 더 진행되어 악화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혹시 나의 아들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라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한 저널에 실린 적이 있었다. 타르코프스키는 아들 안드류샤를 몹시 사랑하고 있었고 망명한 이래 러시아에 남겨둔 아들을 줄곧 그리워했다. 타르코프스키의 망명 선언에 분노한 소련 당국은 타르코프스키의 아들 안드류샤의 출국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부자는 몇 년간을 만날 수 없었다. 타르코프스키의 병세가 악화되자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안드류샤의 방문을 주선하기 시작하였다.
<희생>이 깐느 영화제 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4개 부분을 수상하게 되자 소련 당국도 미테랑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의 소원대로 아들 안드류샤가 상을 대신 받기 위해 러시아에서 날아온다. 소련 당국도 그의 출국을 금지할 더 이상의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병상에 누운 타르코프스키 대신 그가 <희생>을 헌사한 안드류샤가 깐느 영화제 시상식 무대에 올라 4개의 상을 대리수상한다. 이 시상식은 영화사상 가장 감동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는 전하고 있다. 깐느 영화제의 참석자들은 그 감동적인 드라마와 타르코프스키의 비극적 운명에 눈시울을 적셔야했다.

제작 에피소드

촬영의 제일 마지막 단계는 알렉산더가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씬의 촬영 동안 감독뿐만 아니라 제작진 전원이 충격을 받을 사건이 발생했다.
집 전체를 전소시키는 장면이기 때문에 단 한 번 밖에 찍을 수 없으므로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다. 무사히 촬영을 끝내고 난 후 모두들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촬영감독의 말 한 마디는 모두를 경악시키고 말았다. 필름이 엉켜서 제대로 찍혀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촬영 감독을 바라보는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표정은 절망적이었다.
다시 찍을 것인가 아니면 촬영된 필름을 가지고 편집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제작진들은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타르코프스키 감독에게는 이 문제는 고민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연히 재촬영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인 그의 장인 의식은 암의 고통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결국, 제작진들을 설득한 타르코프스키는 똑같은 집을 다시 세울 것을 지시한다.
불철주야 작업한 끝에 전과 똑같은 집이 불과 며칠 만에 만들어진다. 모두들 며칠 만에 다시 집을 지은 것을 기적이라고 했다. 재촬영 시에는 두 대의 카메라가 동원된다. 만일에 대비한 조처였다. 이 장면의 재촬영은 초긴장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두 차례나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벤 닉비스트도 긴장으로 인해 이 장면의 촬영동안 떨고 있었다. 마침내 이 장면의 재촬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이 장면의 촬영을 마친 후 아직도 불타고 있는 집을 향해 혼자 걸어가 생각에 잠긴다. 결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된 <희생>의 마지막 장면, 금세기 최고의 감독으로 추앙받고 있는 감독 타르코프스키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마지막 순간에 찍은 이 장면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었다.

소련에서의 상영

죽기 전에 아들을 만나 한을 푼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소원은 <희생>이 소련에서 개봉되는 것을 살아서 보는 것이었다. 그의 이 소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희생>은 1987년 그의 생일날인 4월 4일, 소련에서 소개되었다.

테마

이 작픔의 중심 테마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희망과 믿음을 갖고 자신을 희생하려는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알렉산더는 세상의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러면서 그는 죽은 나무에 3년 동안 물을 주면 그 나무에서 꽃이 피어나게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의 희생의 의식이 끝난 후, 그의 아들은 목소리를 되찾는다. 이것은 세상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

희생의 의미

희생을 통해 그가 의미하려는 것은 타르코프스키가 <노스텔지어>에 대한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에서 추론해 볼 수 있다. “자신을 버리고 희생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부탁할 것이 없다.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답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대답을 못 보고 죽음을 맞는다면 그야말로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대 최고의 두 거장이 만들어낸 영상미의 극치

촬영 기법
이 작품은 당대 최고의 두 거장인, 감독 타르코프스키의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가 만들어낸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들의 특출한 촬영술로 인하여,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아이의 단순한 쇼트조차도 눈부신 광채를 발하게 된다. 카메라는 극의 액션을 담아낼 뿐만 아니라 마치 곤충의 더듬이처럼 섬세하고 민감하게 인물들의 내면 세계를 담아낸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희생>의 명장면, 두 개의 시퀀스 샷.

1.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오프닝과 클로징 장면
영화의 첫 장면과 끝 장면은 해변이라는 동일한 무대에서 일어난다. 첫 장면에서 알렉산더는 자신의 생일날 어린 아들과 함께 해변에 나무를 심는다. 그는 옛날 한 수도승과 그의 제자가 죽은 나무에 3년 동안 물을 주어 꽃을 피우게 하였다는 전설을 어린 아들에게 들려준다. 목 수술을 받아 말을 할 수 없는 어린 아들은 묵묵히 그의 얘기를 듣기만 한다.
마지막 장면. 아버지 알렉산더가 병원에 실려간 후 어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심던 해변에서 무거운 물동이를 낑낑거리며 옮겨다가 그 나무에 물을 준다. 그가 나무 아래 누워 처음으로 말문을 연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아빠, 그건 무슨 뜻이죠?” 그가 누워서 올려다보는 시선을 따라 카메라는 하늘로 수직 이동하면서 마른 나뭇가지들을 보여준다. 그 섬세한 카메라 움직임과 배경에 깔리는 바하의 음악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나무에서 마치 꽃이 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든다. 영화를 시와 철학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 명장면이다.

2. 알렉산더가 집을 불태우는 클라이맥스 장면
세상의 종말을 막아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던 신을 향한 자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알렉산더는 자신의 집을 불태운다. 불타오르는 집을 배경으로 실성한 듯이 뛰어다니는 알렉산더, 그를 붙잡기 위하여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그의 가족들, 그리고 막 도착한 정신병원 앰뷸런스에서 알렉산더를 붙잡으려는 정신병원의 간호사들. 이들은 한데 어우러져 알렉산더의 절망감과 세상의 혼돈을 효과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특히 중단됨이 없이 하나의 롱테이크로 그들을 포착해낸 촬영 기법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연출해내고 있다.

빛과 색채의 사용
<희생>은 빛과 색채, 그리고 사운드의 사용에 있어서 타르코프스키만의 독특한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빛은 밝음과 희망을 상징하는 메타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긴 그림자가 드리어져 있는 알렉산더의 집 내부에서 유일하게 빛을 받는 사람은 침대에서 평화롭게 자고 있는 고센이며 마지막 장면에서 나뭇가지에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은 죽은 나무가 기적처럼 소생하여 꽃피우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푸르스름한 진주빛과 어두운 녹색이 이 영화에서 사용된 주 계통색이다. 이 색들은 거의 모노톤에 가까울 정도로 채도가 낮게 사용됨으로써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고 이 영화의 주제를 강화시켜주고 있다.

인물 분석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가장 심도 있게 그려낸 감독이다. 타르프코스키의 인물들은 항상 나름대로의 깊이를 지니고 있어 그 성격이 단번에 드러나지 않고 극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드러나게 된다. 작품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편의상 우리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대략 두 가지 인간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비도덕적이고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이기적 인간형이다. 그들은 또한 대부분 이성주의자들이다. 알렉산더의 부인 아들레이드, 그의 딸 마르타, 그리고 주치의 빅터가 이런 유형의 인물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 물질적이고 속세적인 욕망을 지니고 있는데, 그러한 욕망은 출세하기를 스스로 포기한 알렉산더를 비난하는 아들레이드의 말에서, 그리고 호주 한 병원의 자리를 제안 받은 빅터가 알렉산더의 가족들을 버리고 호주로 떠나려는 사실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이자 어머니의 정부인 빅터를 유혹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의 주위를 맴도는 마르타의 행동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반면에 또 다른 유형은 도덕적이며 이타적인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아는 인간형이다. 오토, 마리아 그리고 줄리아가 그러한 유형에 속하고 있으며 그들은 희생적이고 이타적이며 타인의 고통에 동정할 줄 아는 인간들이다. 그들의 그러한 속성은 오토가 진귀한 17세기 유럽 지도를 알렉산더의 생일 선물로 주는 것이나, 고센을 깨우라는 아들에이드의 지시를 끝내 거부하며 깊은 모성애를 보여주는 하녀 줄리아의 모습에서, 혹은 한밤중에 자신을 찾아온 알렉산더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를 품어주는 마리아의 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인물들 사이에서 주인공 알렉산더는 자신과 세계의 현실을 깨달아간다. 전 인류와 그들의 문명은 근본적으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는 점점 더 심각하게 인식한다. 현대 문명은 공포와 폭력을 기반으로 건설되었고, 점점 더 물질적인 발전만을 추구하면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발전을 소흘히 해왔다. 결국 우리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끔찍한 불균형과 부조화를 겪는 인간들이라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결국 그는 죽은 나무에 3년 동안 물을 주어 꽃을 피어나게 하였다는 전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이해 범주를 초월하는 믿음과 희망이 필요하며 그러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자신을 희생할 때에만 세상은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간 분석
영화의 공간은 크게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알렉산더가 그의 아들 고센과 함께 죽은 나무를 심는 바닷가, 그리고 그들이 산책하는 숲, 그들의 집 실내, 집 앞의 정원, 마리아의 집 실내와 실외 그리고 알렉산더의 상상 속에서 보이는 폐허화된 도시이다.
바닷가는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무를 심는 희망과 믿음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하늘의 청아함, 땅의 포근함, 그리고 바다의 심오함이 함께 어우러져 하늘과 땅과 바다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공간이다. 여기서 그들은 희망과 구원의 메신저인 우체부 오토를 만난다.
그들이 산책하는 숲은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비행기의 폭격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불안하고 위협적인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고센은 장난을 치다 코피를 흘리게 되며 알렉산더는 기절하게 된다. 그러한 공간에서 그들은 비밀이 많으며 불안하고 이기적인 아들레이드와 빅터를 만나게 된다.
그들의 집 실내는 인간의 내면세계처럼 어둡고 모호한 공간으로 흡사 뫼비우스의 띠처럼 외면과 내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듯한 공간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는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호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즉, 꿈과 현실의 구분, 실제 이미지와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들의 분별, 일층과 이층의 경계는 파괴되고 있으며 이들은 이 공간 안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 감각의 상실의 느낌은 이동 카메라의 사용에 의해 더욱 강화되어지고 있다.
그들의 집 앞 정원은 부르주아 계급의 무의미하고 건조한 그러면서도 이기적이고 진실하지 못한 대화들이 오가는 공간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방향과 깊이를 잃어버린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부패한 영혼을 체호프적인 풍경 속에 성공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마리아의 집 실내는 알렉산더의 집 내부와 같이 어둡지만 다른 종류의 어둠을 지니고 있다. 그 공간은 인간이 휴식을 취하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부드럽고 따뜻한 어둠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집 외부도 마찬가지 공간으로 선량한 양떼들이 맑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한가로이 지나가는 평화로운 공간이다. 그리고 알렉산더의 상상 속 도시는 방향 감각을 잃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혼란과 공포의 공간으로 우리 시대의 문명의 자화상이다.
이 모든 공간들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알렉산더의 집 이층에 있는 고센의 방으로 주인공 알렉산더의 애정의 중심이기도 하다.

사운드의 이용
영화에서 사운드들은 설명이 안 되지만 진실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영묘하고 세심하게, 그리고 간접적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유리잔들이 떨리면서 내는 소리로 표현한 것이라든가 멀리서 들릴 듯 말듯 들리는 갈매기 소리나 새의 노랫소리들은 타르코프스키가 <노스탤지아>에서 시사한 우리의 영혼의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음악과 미술

-음악
이 영화에서 사용된 음악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이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된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마태 수난곡]은 주인공 알렉산더의 내면세계 속에 담겨있는 우수와 애절함, 그리고 절망 속의 희망, 또한 간절함을 절묘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간간이 들릴 듯 말 듯 들려오는 스웨덴의 구슬픈 민요 가락 역시 영혼의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 문명의 인류의 현실을 탄식처럼 들린다. 그리고 후반부에 사용된 일본의 현대 피리 음악은 현대 문명의 위기감을 역동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미술
이 영화에서 인용된 미술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 박사의 찬미]와 타르코프스키의 전작 <노스탤지아>에서 나온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성모 마리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은 인간의 운명을 예언하는 다분히 신비하고 다의적이며 세련된 작품이다. 이 그림의 주제, 즉 희생, 헌사, 겸허의 주제는 이 영화의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한편 [성모 마리아]는 소박하고 삶에 긍정적인 인생 태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체부 오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보다 [성모 마리아]를 더 좋아한다고 극 중에서 언급하고 있다.

체호프적인 전통, 그 유사점과 차이점
영화의 분위기는 흡사 체호프의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의상들과 실내 분위기, 그리고 가족 간의 미묘한 심리적 마찰의 표현이 플롯을 대신하고 있는 점 등이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타르코프스키의 이 영화에서 가족 간의 갈등은 체호프의 작품에서와는 달리 그 자체가 중심이 되지 않고 정신적인 세계의 갈망과 구원을 찾기 위한 탐색의 새로운 액션으로 진행되기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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