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에서 쏟아져나오는 인파 속 누군가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자신만만하고 이성적인 이 목소리의 주인공, 장(파스칼 그레고리)은 자신을 둘러싼 완벽한 철옹성을 소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은 가브리엘(이자벨 위페르)이 편지 한통을 남기고 집을 나간 걸 알게 된다. 그러나 그가 충격을 미처 소화하기도 전에 가브리엘은 다시 돌아온다(가브리엘의 가출보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귀환이고,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귀환의 이유다). 이제 영화는, 10여년간의 완벽한 결혼생활을 순식간에 산산조각낸 아내에 대한 증오로 몸부림치는 장과 자신이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시키고 싶어 안달이 난 가브리엘의 감정적인 전면전을 다룬다. 이들의 호화로운 저택 안에서 진행되는 폐쇄적인 심리극은, 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자막과 음악, 고속촬영과 프리즈 프레임, 흑백 화면의 교차 등 다양한 비주얼적 효과를 통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이것은 스스로가 육체를 지닌 존재임을 망각했던 오만한 이성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존재를 건 싸움이다. 그리고 이 싸움의 링 안에는 이들 부부의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챙겨주는 무표정한 하녀들도 함께 있다. 카메라는 종종 똑같은 옷과 표정, 태도로 유령처럼 이들의 주위를 맴도는 하녀들의 미묘한 얼굴, 부엌과 같은 이들만의 일상 공간을 베르메르를 연상시키는 태도로 응시한다. 이곳에선 육체만을 사용하는 이들은 명상을 하고, 이성과 감성이 유일한 무기인 이들은 서로를 부숴버린다. <가브리엘>이 묘사하는 세계는, 올해 베니스의 그 어떤 영화보다 새로웠다. 파트리스 셰로는 그렇게, 또 다른 극단에 도달했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