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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류승완이 김기영의 ‘이어도’에서 ‘밀수’한 것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한 한국영화 베스트 10편을 꼽는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베스트 목록은 어쩔 수 없이 뻔해지기 마련이지만, 나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었다. 시대를 고루 반영하기 위해 지난 베스트 목록을 살피며 연도별 대표 영화를 꼽아보거나 빼놓을 수 없는 감독의 이름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은 ‘누가 봐도 괜찮은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그럴 수 없다’ 사이에서 나의 한계와 부끄러움을 드러낸 목록을 제출했다. 베스트 목록에 포함하진 못했지만, 1970년대를 생각할 때 떠오른 작품은 김기영의 <이어도>(1977)였다. ‘이어도’라는 환상의 섬에서 벌어진 실종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영화 안에서 누구라도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1970년대를 발견한 듯 느끼게 된다. <이어도>가 가진 에너지는 민자를 연기한 이화시 배우의 존재감으로 능히 환원된다. 이화시가 연기한 민자는 뭍에서 온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대상이지만, 그 역시 상대를 간파하는 하나의 시선으로서 이어도의 현현이기도 했다.

<밀수>를 보면서 <이어도>를 떠올린 계기는 단순했다. 1970년대 중반이라는 시간대, 물질하는 장면의 배경에 놓인 섬의 모양새가 아니라 최후의 출항 장면에서의 고민시 배우 때문이다. 이름부터 이화시를 연상시키는 고민시는 마담 고옥분의 화려한 색채를 벗어던지고 이제는 그저 소복처럼 보이는 빨간 꽃무늬 한복을 입은 채 죽음의 사자같이 어선에 동승한다.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불려 나온 이질감과 눈물에 번진 마스카라로 엉망이 된 얼굴이 증폭하는 체념의 정서가 클로즈업 장면만이 아니라 흐릿하게 보이는 원경에서도 또렷하게 감지됐다. <이어도>에서 민자는 다홍색 치마와 다홍색 저고리를 다른 한복과 섞어 입은 차림으로 등장하지만, 실종된 천남석의 시신이 바다에서 발견됐을 때만큼은 흰색 한복 차림으로 바다로 달려온다. 민자가 바닷가에서 죽은 남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할 때, 배 위의 고옥분은 논개 전법으로 이장춘(김종수)을 죽음으로 끌고 들어간다. <밀수>의 조춘자(김혜수)와 엄진숙(염정아)의 물질 시퀀스에서 한명은 내려가고 한명은 오르며 자리를 바꾸는 인상적인 교차 장면처럼, <밀수>와 <이어도>를 번갈아 볼 때 서로 내리고 오르며 각자의 힘이 증폭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밀수>와 <이어도>를 나란히 들여다볼 때, 의외의 지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화학공장 폐수로 인한 바다 오염이 두 영화에서 사건을 추동하는 최초의 원인 자리에 놓인다. <이어도>가 만들어질 당시인 1970년대에 공장 폐수는 근대화가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의미화되곤 했다. <밀수>는 1970년대 군산과 인천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군천’이라는 가상의 어촌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것이 과거의 재현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오늘날 핵폐기물 방류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지역과 도시의 대결 구도는 이제는 국제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위험으로 확장됐다.

해녀를 재현하는 방식

두 영화는 오염에 대한 각자의 대응 양상을 보여준다. <이어도>에서 해녀의 물질이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을 때, <밀수>는 끈질기게 물질을 이어갈 방법을 찾는다. <이어도>에서 물질을 포기한 뒤에도 평생 섬을 떠날 수 없는 해녀들은 유령처럼 그곳에 남아 마을 일에 관여하며 분쟁을 심판하거나 응징한다. <밀수>에서 해녀들은 생계 수단을 잃은 뒤에도 세관의 눈을 피해 물속에 던져놓은 밀수품을 건지며 물질을 계속한다. 대상이 해산물에서 밀수품으로 이동하면서 생성되는 낙차가 서사에 탄력을 부여하지만, 그보다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부분은 밀수품이 해녀의 몸짓을 보존하기 위해 마련된 하나의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밀수품을 운반하는 해녀 이야기가 논픽션에 기반을 둔 것이라 해도 그것이 재현의 영역으로들어온 의미는 적지 않다. 그 의미는 대중 서사에서 해녀가 어떤 방식으로 재현됐는가를 돌아볼 때 더 분명해진다. 재현 대상으로서 해녀는 얼마간 관음의 대상이었다. 몸에 밀착된 간편한 옷차림이 젊은 배우의 육체와 만나 유혹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았다. 한 젊은 과부가 마을 남자의 끝없는 추행을 견디다 무너진 <갯마을>(1965)이 그 한 사례다. 해녀는 어촌 지역과 끈질기게 달라붙어, 마을 바깥이 의미하는 근대화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을 달래며 과거의 향수를 간직한 대상으로 남아야 했다. 다른 한편 1970, 80년대 여성 캐릭터는 남겨진 존재가 아니라 도시와 적극적으로 결탁하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했다. 이 경우 시골에서 도시로 온 순진한 여성이 겪는 고초와 타락을 주로 다룬다. <밀수>에서 조춘자가 식모살이 중 주인 남자에게 강간당할 위험에 처하자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살인하고 도주한 과거가 서술되는데, 이같은 서사를 지닌 당대의 영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재현의 대상에서 한동안 멀어졌던 해녀가 다시 주목받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00년대 초 딸이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 여행을 그린 <인어공주>(2004)를 시작으로,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과 해녀의 몸짓 사이 친연성을 통해 세대를 잇는 <인어전설>(2016) 등 역사적 행위를 현재화하는 시도가 있었다. 해녀가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참았다가 물 위에 떠올라 길게 숨 쉬며 내는 숨비소리를 신비화하는 경향과 맞물린 논픽션 작업이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빛나는 순간>(2020)처럼 역사와 결합해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상처를 꺼내놓는 울분이 섞인 목소리와 만나기도 했다. 논의의 폭을 넓히면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2022)처럼 지나친 의미화를 경계하고 생계 수단으로서 여전히 지속되는 해녀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경우도 있다. 류승완은 의미 부여 대신 생계형 노동을 강조하는 한편, 리얼한 묘사에서 극적인 것으로 방향을 튼다. 장르와 결탁한 해녀의 물질은 신비화의 굴레나 노동의 고단함에서 탈출해 가벼움과 분방함을 입는다.

해녀의 물질은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분리된다. 처음에는 해산물을 캐기 위한 행위였다면, 이후에는 세관의 눈을 피해 밀수품을 운반하는 행위로 이동한다. 마지막으로는 식인 상어가 출몰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장도리(박정민)에 의해 억지로 물속에 들어가야 하는 죽음과 생존 사이의 물질이 된다. 해녀 몰살을 지시받은 장도리의 수하들이 무거운 산소통을 멘 채 칼을 들고 잠수해 해녀들을 위협하는 액션 시퀀스에서 물속에서 오래 숨 쉬는 능력과 물길을 안다는 해녀의 장점이 적극적으로 발휘된다. 도구 없이 맨몸으로 잠수한 해녀들은 전복 껍데기의 날을 칼 대신 이용하거나 두꺼운 몸으로 통과할 수 없는 좁은 길로 유도하거나 해산물에 걸리게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그들의 액션은 화려하지 않아도 단순하고 솔직하다.

기원적 몸짓

수중에서 벗어나 물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 때, <이어도>에는 있고 <밀수>에는 없는 결정적 차이처럼 보이는 것은 무녀의 존재다. 고전 영화에서 해녀 곁에는 무당이 존재했다. 먼바다로 출항하는 어부들이 풍랑을 만나 실종되는 경우가 잦았기에 마을의 무당을 불러 굿하며 죽은 이의 몸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갯마을>의 무녀가 딱 예상만큼만 쓰였다면, <이어도>에서 배우 박정자가 연기한 무당은 마을에 감도는 죽음의 기운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한 것처럼 인물과 사건을 예리한 시선으로 꿰뚫으며 시체 위에서 뛰논다. 무당은 액터이자 커넥터로 미지의 존재와 교신하며, 자신에게 보이는 것을 해석하고 몸으로 표출하는 존재다. 재현의 대상으로서 무당과 무속 신앙은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를 독식하며, 해녀가 재현의 대상에서 멀어진 와중에도 세계 속에 한국적인 것을 욕망하는 제작자들을 꾸준히 유혹해왔다.

<밀수>에서 무속은 진숙의 아버지가 배 근처에 소주를 뿌리며 안전한 출항을 기원하는 차원으로 축소돼 있다. 반면 실제적 흔적을 그러모으는 대신, ‘무엇이 무속을 대체하는가?’의 관점에서 보면 다시 보이는 것들이 있다. 무녀를 교신자와 전달자로 이해할 때, 그의 자리를 대체하는 인물은 정보통으로 기능하는 마담 고옥분이다. 고옥분의 다방은 서로 다른 입장에 놓인 인물들이 교차하면서 서로에게 숨겨야 할 정보가 오가는 장소다. 통신기기의 발달이 비교적 더뎠던 어촌 마을에서 구두로 전하는 말이 더 중요해진다. 옥분은 세관원, 장도리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정보를 캐내거나 흘린다. 고옥분의 뒤에서 아이디어를 짜고 구상하는 조춘자에게도 정보는 생존과도 같다. 권 상사(조인성)의 환심을 얻고 관계를 지속하는 데 중요했던 것은 정보다. 춘자는 권 상사와의 첫 대면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자, 숨비소리를 내뱉듯 다급하게 군천항 정보를 흘린다. 표층의 차원에서도 고옥분과 조춘자는 무녀의 다른 버전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내통하는 도중 상대편이 들이닥쳤을 때 낯빛과 목소리를 바꾸거나 과장된 고옥분의 몸짓이나 권 상사를 대할 때 한껏 톤을 높인 조춘자의 말과 행동은 무당이 굿판을 벌일 때 과장된 몸짓으로 사람들의 혼을 빼고 믿게끔 만드는 것과 동일한 목적을 지닌다.

확장하자면 고옥분과 조춘자는 극 안에서도 탁월한 배우다. 고옥분은 세관원과 함께일 때는 비교적 원숙한 차림으로 그를 맞는 한편, 장도리와의 관계에서는 다시 다방 종업원 시절로 돌아간 듯 발랄하고 가벼운 태도를 취한다. 조춘자의 가발은 그의 변신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도구다. 군천을 떠난 이후 춘자는 내내 긴 웨이브 머리를 고수하는데, 그것이 가발이라는 사실은 어느 밤 훌렁 벗어던지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 가발은 교도소에서 진숙이 노동 교화 시간에 만들었던 가발을 떠올리게 한다. 면회 온 동료들에게 춘자의 배신 소식을 들은 진숙은 만들던 가발에다 분풀이한다. 덧붙여 춘자의 가발은 그가 과거를 숨기고 새로운 인물이 되었다는 변신의 지표만이 아니라 여전히 과거를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발이나 샤워 후 머리카락을 가린 수건은 어쩐지 물질할 때 쓰던 두건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방점이 되는 액션 시퀀스 역시 무속의 변주로 읽을 여지가 있다. 권 상사와 장도리 일파간에 벌어진 호텔 액션 시퀀스는 합을 맞춘 액션이면서도 날것의 느낌을 포기하지 않는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몸과 도구의 충돌 가운데 애꾸눈이 맨몸으로 칼을 맞는 순간의 묘사는 원시적이고 잔혹해 마치 신에게 바칠 짐승을 사냥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권 상사의 액션 시퀀스는 배우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칼춤을 추듯 유려하게 이어진다. 이때 배경으로 흐르는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는 꽹과리와 장구로 대표되는 굿판의 음향을 대체하며 액션의 쾌감을 강화한다.

교차하는 표면들

믿을 수 없지만, <밀수>는 영화에 등장한 거의 모든 남성 캐릭터가 죽음을 맞는 영화다. 군천의 남자 대부분이 마치 제물로 바쳐지듯 바다에서 죽어간다. 남자 없는 섬을 그린 <이어도>의 출발점이 <밀수>의 도착지가 된 셈이다. ‘유쾌한 여름 영화’라는 타이틀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남자들의 죽음이 딱히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도리어 미스터리다. <이어도>에서 남성의 의미가 정자 상태와 동일한 원초적 의미로 축소돼 있다면, <밀수>의 남성과 이들의 죽음은 보다 추상적인 의미에 닿아 있다. 특히 이장춘과 장도리의 커넥션은 타락한 공권력과 이에 대한 굴종을 보여준다. 이들의 죽음은 권력에 대한 응징과 더불어 진숙의 아버지 대신 행해진 사적 복수의 의미도 있다. 아들처럼 생각한 장도리의 배신보다 뼈아픈 건 새마을운동 모자를 쓸 정도로 따랐던 국가의 두 얼굴일 것이다.

<군함도> <모가디슈> 등 역사적 사건을 연거푸 다룬 류승완은 <밀수>에서 1970년대 중반, 군천이라는 모호한 시공간을 설정하며 고증의 부담을 벗어버리면서도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 관계 맺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밀수>가 설정한 시공간은 이질적 요소들이 혼종적으로 뒤섞이는 장소다. 그것은 해외와 국내, 항구와 도시를 오가는 사람과 사물의 뒤섞임만을 뜻하지 않는다. 영화의 액션 시퀀스는 역사적 사건으로 번역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해녀들이 수면 아래서는 장도리 일당과 식인 상어에게, 수면 위에서는 엽총을 든 이장춘에게 공격받는 사면초가 상황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국내외에서 동시에 마주한 이중의 적대를 비롯해, 믿었던 국가로부터 배신당한 수많은 사건과 포개진다. 이장춘이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고옥분과 장도리를 구타하거나 고문하는 상황은 1970년대는 물론 그 이전과 이후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도 행해진 간첩 조작 사건을 비롯해, 국정원이 개입이를 염두에 둘 때, 애매하게 느껴지는 것은 식인 상어다.

분열된 두축을 모두 잠식하는 거대한 존재인 상어는 때맞춰 나타나 해녀들을 공격했던 일당을 하나씩 먹어 치운다. 이것을 잔인하다고 해야 할까,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상어는 <이어도>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두렵고도 무서운 물귀신의 형상화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상어는 영화 속 배경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1975)를 노골적으로 연상시킨다. (류승완 감독은 최근 <씨네21>에서 진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베스트 작품 다섯편을 꼽는 설문에서 <죠스>를 포함시킨 바 있다.) 그 존재는 류승완이 감독이 되기까지 ‘밀수’한 영화들의 영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가운데, 1990년대 후반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논쟁과 최근 다시 불거진 한국영화 위기론과 맞물린 세계영화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온다.

류승완의 <밀수>는 내가 거의 고민하지 않았던 ‘한국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촉발했다. 영화가 들려준 대답은 해녀의 물질이다. 수확물의 내용이나 목적이 달라져도 변치 않는 것은 아무튼 물질을 계속한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부터 밀수한 것, 이식된 것, 혼종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만, 한국영화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여기서 미지의 바다에 뛰어드는 몸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보석을 캘지 썩은 해산물을 캘지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떠날 수 없고 떠나더라도 다시 돌아오는 몸들만이 곧 한국영화다. 영화는 그 몸에 어떻게든 숨을 불어넣는 방법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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