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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남기지 않고
윤덕원(가수) 2023-03-16

특별한 일 없이 보내는 주말이 있다. 어디 한번 나가볼까 하다가도 그냥 집에 있기를 선택하는 나는 이럴 때 냉장고를 뒤져보곤 한다. 그동안 묵어 있던 냉장고 속 재료를 먹어버리려는 것이다. 마침 음식을 포장할 때 받은 콜라가 남아 있고, 요리할 타이밍을 놓쳐 얼려두었던 토막닭이 있다. 급한 대로 모서리를 잘라 썼던 간 마늘 얼려놓은 것들을 꺼내서 주사위 모양으로 썰어둔다. 칼이 잘 들지 않지만 뜨거운 물에 담갔다 빼면 체중을 싣는 것만으로도 무리하지 않고 잘라낼 수 있다. 청양고추 썰어놓은 것이 두 봉지가 있길래 하나로 합치고 일부를 간장, 콜라, 마늘 그리고 기타 양념들과 섞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얼어 있던 닭이 적당히 녹고 나서 양념에 재운 후 에어프라이어에 돌리니 먹을 만한 닭구이가 되었다. 두끼 정도를 닭을 먹으니 살짝 물리는 감도 있었지만 그래도 꽤 맛있었고, 재료를 버리지 않아도 되니 기분이 좋았다.

애초에 먹을 만큼만 구입하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것들이 있게 하려면 무엇인가는 필요 없게 되는 때가 있다. 음식이 아니라도 그렇다. 공간이 많이 있고 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하고 생각해본 적도 있었으나 살아보니 거의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았다. 닳고, 해지고, 기능을 상실하고. 남는 것은 기억뿐이라는 생각이다. 무엇인가를 새로 사고 들이는 것들에 주저하게 된 것도 그래서다. 베이스 기타를 한대 구입할까 몇달을 들여다보던 것도 어느새 시들해졌다. 이 예쁜 악기를 내가 또 구입해서 무엇할까 이미 사용할 것은 차고 넘치게 있는 것을. 한때라도 많이 이것저것 사고 마음껏 소비하다가 그런 것도 아니고 조바심 내고 덜덜 떨면서 큰마음 먹고 할인하는 것을 구입하는 상황이었다가 갑자기 이렇게 또 세상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마냥 구는 것도 우습다. 하지만 다 먹지 못하고 버려지는 음식들과 쓰지도 않은 물건이 소위 프리미엄을 업고 가격이 올라가는 세상에서 어떤 선택을 해도 패배자가 되는 기분이다. 그저 지금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들만 챙기는 것으로 소비하면 무승부에 도전할 수 있으려나.

생산자로서 느끼는 감정도 양가적이다. 수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노래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새로운 것들을 디밀어 내야 할 것 같은 마음과,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녹음되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채로 누군가의 인생의 몇분간을 채운 채로 여운으로 살아가는 향기로운 음악가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는 생계가 어려워지거나 음악도 흩어질 뿐이겠지? 이것이 음악을 직업으로 길게 하는 것의 고민이 될 줄은 시작할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시작은 했고, 10여년의 시간은 흘렀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지속될 것 같고. 책장에 놓인 CD들을 가끔 꺼내 들어본다. 음원 서비스가 보편화되기 전의 음반들은 이제 따로 들어볼 곳이 없는 경우도 있다. 아직 재생이 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어느 날 재생이 되지 않으면 그날로 안녕이 될 수도 있다 (그전에 백업을 해두면 좋겠지만). 사실 어디선가 파일을 구할 수 있고 정식으로 스트리밍 서비스가 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더이상 듣지 않으면 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내가 만들어낸 것들을 남기지 않고 다 잘 정리하고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혹시나 나중에 새로운 노래를 만들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그걸로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이상 활동의 동력을 갖지 못하는 음악가들이 조금씩 뜸해지고 활동을 쉬거나 해산하고 언젠가 잊히게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단종된 제품의 서비스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고 할까? 가끔은 원곡과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연주와 노래를 들려줄 수 있고 이렇게 저렇게 잘 살고 있으며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은 채 그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고 그때를 회상하게 할 수 있다면, 그다지 화려하지 않아도 꽤 괜찮을 것 같다.

<김성호의 회상> - 김성호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지. 그녀는 조그만 손을 흔들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의 눈을 보았지.

하지만 붙잡을 수는 없었어. 지금은 후회를 하고 있지만. 멀어져가는 뒷모습 보면서, 두려움도 느꼈지.

나는 가슴 아팠어.

때로는 눈물도 흘렸지. 이제는 혼자라고 느낄 때. 보고 싶은 마음 한이 없지만, 찢어진 사진 한장 남질 않았네.

그녀는 울면서 갔지만, 내 맘도 편하지는 않았어. 그때는 너무나 어렸었기에, 그녀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네.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한두번 원망도 했었지만, 좋은 사람이었어.

하지만 꼭 그렇진 않아. 너무 내 맘을 아프게 했지. 서로 말없이 걷기도 했지만, 좋은 기억이었어.

너무 아쉬웠었어.

때로는 눈물도 흘렸지. 이제는 혼자라고 느낄 때. 보고 싶은 마음 한이 없지만, 찢어진 사진 한장 남질 않았네.

그녀는 울면서 갔지만, 내 맘도 편하지는 않았어. 그때는 너무나 어렸었기에, 그녀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