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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스즈메의 문단속’, 애도의 방법으로서의 반복
김철홍(평론가) 2023-04-12

이유 없이 열리는 문이 있다. 혹은 문이 열렸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건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이 그리는 세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사람이 죽는 일이 있다. 혹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의 선율이 되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선율’은 나의 표현이 아니라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표현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자신의 영화를 직접 소설화한 책 <스즈메의 문단속> ‘작가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38살 때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내가 직접 피해자가 된 건 아니었으나 그 일은 내 40대를 관통하는 일상을 지배하는 선율이 되었다. (중략) 왜. 어째서. 왜 그 사람이. 왜 내가 아니라. 이대로 끝인가. 이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계속 모르는 척하고 살 수 있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신카이 마코토는 이처럼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의 답을 찾기 위해 <너의 이름은.> 이후부터 이번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같은 작업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그의 작업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유 만들기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이른바 재난 3부작은, 이유 없는 죽음이라는 결과에 대항하기 위해 신카이가 만든 세개의 (이야기라는 형식의) 이유다. ‘왜’, ‘어째서’라는 질문에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그는 시간과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름을 말하는 이야기(<너의 이름은.>)와, 날씨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에 관한 이야기(<날씨의 아이>), 마지막으로 문을 단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스즈메의 문단속>)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단지 자신의 선율에 응답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었을 뿐인데, 수많은 사람의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고 있다. 이 또한 우연일까? 이 문이 열린 것에도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일까? 흥미로운 건 <스즈메의 문단속>을 향한 반응에는 긍정적 환호뿐 아니라 비판적인 목소리 역시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동어반복

신카이 마코토를 향한 가장 쉬운 평가는 그가 동어를 반복하는 스토리텔러라고 말하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신카이가 3부작으로 창작한 세 이야기는 각각 서로 다른 형태의 재난을 상정하는 등 다른 작품과 차별점을 지녀보려 노력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그건 무엇보다 신카이의 세상을 변호하려는 마음이 모든 작품의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계속해서 통할 리 없는 무모한 변호를 이어가고 있다. 우연히 일어난 재난을 필연적인 것으로 설명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중 그가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변호 전략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는 재난을 예견해 결과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했으나, 그 능력이 하필 미성숙한 아이들에게 전해져 어쩔 수 없이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을 모두 아이로 설정하며 배심원들의 선처를 바란 것은 나름 영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같은 전략을 고민 없이 재탕한다면 역효과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동어반복은 과연 비판받아야 하는 무언가일까? 고려해야 할 건 신카이가 자신의 반복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작가 후기에서 그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까지 한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똑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다른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이번에야말로 더 잘해보려고, (중략) 계속 쓸 것 같다.”

이에 따르면 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n부작은 3부가 끝이 아닐 확률이 높다. 그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발표한 이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앞으로도’, ‘되풀이’해서, ‘계속 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 잘해보’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물론 이 단서는 창작자로서 의례적으로 뱉은 말일 수 있지만, 이 말을 보고 든 생각은 ‘더 잘할 필요가 있나’였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유 만들기 작업’의 결과로 탄생한 이유들간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나아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들에 대하여,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무모하게 그 이유를 창작하는 사람에게 더 잘하라고,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대라고 요구하는 것은 마땅한 반응일까.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세상이 살 만한 곳임을 이해시키기 위해 비슷한 이야기를 재차 반복할 때, 이 반복은 같아서 아쉬운 무언가가 아니라 오히려 같기 때문에 숭고하게 느껴지는 기도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애도의 방법으로서의 반복

그 이야기들 중 <스즈메의 문단속>이 가장 돋보이는 이유는, 숭고한 반복의 결과로 만들어진 이 영화가 그리는 것이 바로 숭고한 반복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 영화의 구조다. 단순하게 말해 <스즈메의 문단속>은 ‘문이 열린다-문을 닫는다’의 반복이다. 지진이 일어나는 장소와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같다. 스즈메와 소타는 그곳이 어디든, 자신이 얼마나 위험하든, 아무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문을 닫는다. 열리는 문들을 영원히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이 덧없고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신에게 기원한다. 마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듯,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선율이 그러라고 시킨 듯 말이다. 그렇게 영화 속 여정이 끝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남은 문들을 닫겠다고 말하는 소타의 후일담과 신카이 마코토가 적은 후기가 겹쳐진다. 이제 남은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반복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반가이 맞을 것인가 아니면 문전박대할 것인가.

살다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무의미’를 맞닥뜨린 사람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묻기 위해 신을 찾는다. ‘고통의 무의미’ 또한 나의 표현이 아니라,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표현이다. 신형철은 저서 <인생의 역사>에 수록한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신이 탄 생하는 순간에 대해 서술한다. 이 글에 따르면 이유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은, 무죄한 이들의 죽음이 곧 신이 없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하는 증거라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신을 믿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 모든 일에 차라리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 재가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게, 그들의 마음에 도리어 안정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글의 요지다. 물론 정확한 이유를 찾아주는 것이, 제대로 된 진상을 규명해 일어난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이야기해주는 것이 더 마땅한 애도인 것은 확실할 터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을 때.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 일어났을 때. 그때는 누군가의 애틋한 반복이 신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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