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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물안에서’, 결정되지 않는 이미지
김예솔비 2023-05-03

<물안에서>를 보는 내내 떠올렸던 것은 초점 없는 이미지를 이렇게나 신중하게 응시하는 경험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었다. 비경제적 이미지, 시행착오, 상영 환경에 대한 불신을 촉발하는 화면, 그리고 이 모든 혐의들과 평행선을 그리면서 그저 재생되고 있을 뿐인 영화. 그러나 이 글은 초점이 나간 채로 촬영되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물안에서>가 개봉될 수 있는 영화의 조건(그런 게 있다면)을 파격적으로 변절했다거나, 영화를 어렵게 만든다는 식으로 과장하는 반응들과는 거리를 두기로 한다.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이런 질문이다. 왜 하필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가 이렇게 촬영되어야 했을까. 스스로의 삶을 영화를 향해 굴절시키는 홍상수 감독의 작업 방식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거의 매 영화를 빼놓지 않고 출현하는 사건이지만 정작 영화 제작 현장은 영화를 둘러싼 반응들 속에서 불투명하게 남아 있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물안에서>에는 촬영 현장이 등장한다. 각각 연출자와 배우, 카메라맨을 연기하는 인물들의 여정은 영화의 프리프로덕션과 프로덕션 과정을 약간은 위태롭게, 그러나 충실히 따라 나간다. 어쩌면 영화 만들기라는 활동의 어떤 측면이 초점 나간 화면이라는 이미지의 상태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무관해 보이는 원인(영화-활동)과 결과(흐릿한 이미지의 상태)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것은 눈의 곤경이다.

눈에 달라붙는 영화

세르주 다네는 장자크 아노의 <연인>을 두고 “눈에서 미끄러지는 영화”(a m’est tomb des yeux)라며 비판하는 글을 쓴 적 있다. 깨어 있는 상태로 보기 힘든 영화를 칭하는 이 관용구는 다네에 의하면 영화가 두번- 스크린에 한번, 우리의 망막에 한번- 영사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에 매우 적절한 비유다. 다네는 <연인>의 카메라가 여자의 구두를 상업 광고처럼 자세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예로 들면서 이미지 제작이 영화를 대체하고 있으며, 이미지가 시각적 요소로만 나열되어 우리의 눈으로부터 미끄러진다고 말한다.

표현의 외피만 빌려온다면 홍상수의 <물안에서> 또한 “눈에서 미끄러지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네의 <연인>에 대한 비판이 암시하는 것은 우리의 눈을 영화에 붙드는 것이 충만한 가시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영화가 시각적 정보를 제한하는 것은 다네가 말한 의미의 영화적 소통방식- 기억, 시간, 몽타주를 통해 미스터리의 장을 형성하는 것- 을 가능케 한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물안에서>는 보이는 것과는 반대로 “눈에 달라붙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눈의 곤경이 종종 영화 전체의 불안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불안은 <인트로덕션>에서 예고된 적 있다. <인트로덕션>의 세 번째 파트에는 낫지 않는 눈병 때문에 괴로워하다 바다에 죽으러 온 여자가 등장한다. 눈의 곤경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죽음에 대한 관념이 등장하는 시각적 방식 중 하나다.

<물안에서>는 <인트로덕션>이 예고처럼 시도한 눈의 곤경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점 나간 화면뿐 아니라 영화가 ‘보기’를 둘러싼 문제를 잠정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남희(김승윤)는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정신 차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지만 소리를 지른 사람을 보지 못한다. 귀신의 소행인 걸까? 알 수 없다. 극 중 상국(하성국)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은 오로지 그것을 ‘보는 것’뿐이다. 이 말은 초점 없는 이미지를 뚫고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고 하는 시도는 헛된 것이며 지금 관객의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이미지일 뿐이라는 영화의 외침처럼 들리기도 한다.

보기에 관한 또 하나의 문제는 성모(신석호)가 만드는 영화와 관련이 있다. 성모는 절벽 아래에서 쓰레기를 줍는 여자를 만난 뒤 비로소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된다. 촬영 준비를 마친 남희는 하얀색 후드집업을 뒤집어쓴 모습으로, 앞서 성모가 만났던 여자와 거의 동일한 차림새다. 촬영 중 남희가 후드를 벗자, 성모는 촬영을 중단하고 남희에게 후드를 계속 쓰고 있어 달라 부탁한다. 이는 아마도 성모가 후드를 벗은 여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모의 재현은 그가 본 것을 초과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모가 만드는 영화는 여자에 대한 픽션이기도 하다. 성모의 영화는 어떻게 자신이 본 것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까?

무한한 반향

성모는 자신의 내밀한 속사정을 투영함으로써 이 문제를 돌파하려 한다. 잠시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위(해변)에는 삶의 유혹이랄까 이런 것에 빠진 사람들이고, 그 바로 밑 절벽 밑에는 어떤 여자가 땅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부산물을 치우고 있는 거지. 그 사이를 막 왔다 갔다 하는 남자가 그 여자를 보게 되고 감명을 받아서 내려오는 거야. (…) 근데 그러다가 땅 위로 올라가기 싫어져 이 남자가. 여자를 보고 나니까 더 가기 싫어지는 거야.”

이 픽션에는 관광객으로 찬 해변과 쓰레기를 줍는 여자, 그리고 두 세계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남자의 동선이 있다. 만일 남자가 땅 위로 올라간다면 여자를 놓치게 되고, 여자를 따라간다면 땅 위의 세속적인 삶과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고 말 것이다. 두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남자가 어느 한쪽에 발을 들이면 다른 한쪽이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점에서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결국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된 남자가 죽으려는 심정으로 바다로 향하는 것은 그의 우울 때문일 수도 있지만, 두 세계 가운데 어딘가에 확정적으로 존재하기를 유예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며 무한히 방황하려는 남자의 동선을 “영구적인 반향”(permenant reverberation)이라 말해보면 어떨까. 이는 사실 홍상수가 직접 쓴 적 있는 표현이다. 홍상수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1부와 2부로 나누어진 두 세계의 관계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한 모든 물음들이 살아 있을 수 있다며, 그 상태가 영구적인 반향과도 같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물안에서>의 남자가 처한 상황은 홍상수 자신이 설명하는 영화의 구조에 대한 설명과 유사하게 들린다. 두 세계 사이에서 영원히 방황하는 남자의 동선은 홍상수의 영화-활동이 필연적으로 향하게 되는 곤경에 대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방황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 결국 홍상수의 영화-활동에 끼어드는 것은 죽음의 문제인 셈이다.

영화-활동과 눈의 곤경은 모두 죽음이라는 불안으로 수렴한다. 영화가 흐릿한 이미지로 찍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영화를 만드는 활동과 죽음, 그리고 눈의 위기가 서로 분리 불가능하게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성모일 수도, 성모의 영화 속 인물일 수도 있는 남자는 수평선에 점점 가까워지지만 끝내 물안으로 완전히 가라앉지 않는다. 죽음과 생 사이,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결정되지 않는 차이들의 총체로 남아 있으면서 의미들 사이를 무한히 반향하는 것. 우리가 본 것은 그 상태를 붙드는 가장 정확한 영화의 표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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