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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존 윅4’ 아름다운 이별

<존 윅4>는 게임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급기야 1인칭 시점 운운하는 반응까지 나온다. 몇몇 신에서 내가 놓친 시점숏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하드코어 헨리>처럼 1인칭 시점이 강조된 영화가 아니다. 3시간 가까이 총을 쏘는 주인공의 몸을 내가 보고 있는데 무슨 시점숏이란 말인가. 그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도 마찬가지다. 게임에 들어왔다고 착각할 수는 있다. 여기서도 인물이 게임적 상황을 돌파하는 걸 바라볼 따름이지 내가 캐릭터의 시점이 되어 장애물을 통과하지는 않는다. <존 윅4>에서 게임을 표방한 부분은 제8구역의 한 건물에서 벌어지는 액션 시퀀스인데, 여기서 카메라는 지상에서 유리돼 계단을 따라 부상하며 부감숏으로 인물의 동선을 일목요연하게 따라가며 보여준다. 거대한 설계도 위로 인물이 안무하듯 총을 쏘는 장면은 전형적인 객관적인 숏이다.

<존 윅4>가 게임 같은 이유는 윅(키아누 리브스)이 속한 세계에서 기인한다. 우스갯소리로 아끼던 개가 죽어서 그렇게 총질을 하느냐지만, 윅의 거창한 여정은 그가 속한 킬러의 세계와 그것을 지배하는 최고회의의 룰에서 출발한다. 그 세계는 완벽하게 보일 뿐 여느 허구의 그것처럼 허술하고 엉뚱하면서 매혹적이다. 이게 말이 되냐고 생각하면서도, 그 룰에 맞춰 움직이는 인물을 따라 4편까지 도착한 관객이라면 시리즈의 게임 세계를 이미 인정했을 터다. 윅이라는 인물 자체도 현실의 선악 개념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에 우리 편처럼 느껴질 따름이지 윅은 선한 무엇을 위해 싸우는 전사가 아니다. 최고회의가 지배하는 킬러들의 세계라고 해봤자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에 찬 악의 세력이 아니며, 그들의 룰에서 벗어나지 못해 바동거리는 윅의 몸짓은 게임이 아니라면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만의 룰으로 운영되는 판타지의 세계, 그래서 ‘<존 윅> 시리즈’는 게임처럼 보이는 영화이다. 그러나 그럴지언정 이 시리즈는 게임에 앞서 영화다. 수천발의 총알을 피해 살아남는, 그리고 수많은 인물을 죽이고도 윤리적 지탄을 받지 않는 윅은 게임적인 인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영화라는 세계에 속한 존재다. 죽었다가도 재접속하면 총을 들고 상대방을 죽이러 나서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정당하게 죽어야 하는 순간을 향해

‘악당은 죽어야 한다.’ 이것은 영화사의 100년 동안 장르영화가 지켜온 룰이다. 그가 설령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의 손을 놓을 순 없다. 여기서 악당이라고 함은, 선과 악 중 악의 편에 속한다는 것과 다른 의미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삶을 부지한다면 그는 존재론적으로 죽어야 한다. 존 포드가 그렇게 사랑했던 서부 사나이의 최후는 죽음과 소멸임을 기억하라. 에이블 페라라, 기타노 다케시 같은 장르의 대가들로 이어진 그 전통을 채드 스타헬스키는 저버리지 않는다. 감독 데뷔 이후 줄곧 킬러를 주인공으로 한 네편의 영화에 매달려온 그가 꿈꾼 엔딩은 죽음이다. 윅은 살기 위해 도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정당하게 죽어야 하는 순간을 향해 달리는 존재다.

스타헬스키는 시리즈의 4편에 이르러 액션영화로서는 금기일 3시간짜리 영화를 빚었는데, 4편의 큰 구조 안에서도 파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3개– 7구와 개선문, 8구, 성당 옆 계단– 의 액션은 각별하다. 섬세하게 이질적인 액션을 구사하는 3개의 파트는 전체 주제 아래 하나의 얼개를 완성함으로써 흡사 한편의 소나타처럼 완결된다. 그중에서도 세 번째 것은 4편짜리 시리즈의 종결부로 가히 코다라 불릴 만하다. 스타헬스키는 이 부분에 계단을 배치해 마침표가 될 것임을 선언한다. 킬러가 계단을 오를 때, 여기서 계단은 무엇을 의미할까. 1970년대를 대표하는 액션영화 <프렌치 커넥션>의 포스터는 악당을 전면에 뒀다. (주인공 진 해크먼, 로이 샤이더, 악당 페르난도 레이가 아닌) 한 조연배우는 지상철 계단 맨 위에서 맞는 죽음의 이미지로 영원히 기억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 그런 의미로서의 성당 옆 계단은, <존 윅> 시리즈가 속한 액션, 범죄 스릴러 장르의 위대한 작가 존 프랭컨하이머에게 바치는 오마주와 같다. 프랭컨하이머의 마지막 숨결이라 할 <로닌>의 엔딩은 (지금은 사라진) ‘블루 스카이 바’ 곁으로 난 가파른 몽마르트르 계단이 배경이다. 죽음과 배신의 능선을 지난 주인공이 그들만의 세계의 규칙을 읊으며 계단을 오른다.

스타헬스키는 구원이 필요한 킬러를 죽음으로 안내할 공간으로 성당 옆으로 난 좁고 긴 계단을 선택했다. 성당 앞으로 뻗은 넓고 영광스러운 계단은 킬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는 것을 그는 안다. 계단 파트에선 두 가지가 눈에 밟힌다. 하나, 거침없이 계단을 오르던 윅은 자신의 오른쪽 뒤편으로 총구를 돌려 악당을 쏜다. 그리고 바로 왼쪽으로 몸을 돌려 총을 쏘는데 거기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윅은 총 쏘는 자세를 취한다. 쁑쁑. 안무상 왼쪽에 등장하기로 한 배우가 실수로 못 나온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현실적인 안무를 짠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샤 기트리는 <포이즌>(La Poison)에서 미셸 시몽에게 헌사를 바치면서 “당신의 연기는 배우거나 가르칠 수 없다”라고 했다. <존 윅> 시리즈의 키아누 리브스도 그렇다. 다른 하나, 계단 맨 위 가까이 도달한 윅이 두번의 타격을 받은 후 222개 계단의 맨 아래로 떼굴떼굴 굴러간다. 엔딩을 눈앞에 둔 인물에게 가혹하면서 한편으론 불필요한 이 장면은 왜 삽입된 것일까.

얼마 전,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듣다 깨달음을 얻었다. 뮌슈, 뵘, 푸르트벵글러, 발터 등이 지휘한 전통적인 명반을 비롯해 수십여종의 음반을 듣다 보면 이상하게 4악장이 성에 차지 않는다. 4악장에서 보통 선호되는 경향은 피날레를 정점까지 밀어붙이는 유이며, 거기에 중독돼 내가 먼저 서두르다 실망하고 만다. 그러기를 수십년, 며칠 전 유튜브로 아벤드로트의 모노 녹음을 듣다 울어버렸다. 멀리 관악 소리가 잦아들면서 현악의 드넓은 품으로 뛰어들려는 때, 아벤드로트는 놀랍게도 내 발걸음을 슬며시 붙잡았다. 느리게, 여유 있게. 다른 세계를 보라는 그의 말씀에서 접한 우주. 어느새 내 마음은 브람스를 처음 사랑했던 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윅이 계단 맨 아래로 떨어진 때가 그랬다. 막힘 없이 피날레로 진격하기를 기대했던 내게, 스타헬스키는 윅이 긴 숨을 쉴 빈자리를 마련한다. 그는 영화의 또 다른 주제인 ‘친구 혹은 적’에 해당하는 캐릭터인 케인(견자단)의 손을 잡고 일어선다. 그리고 자기를 이해하는 친구이자 자신과 함께 사선에 설 존재와 함께 계단을 오른다. <존 윅4>의 계단 파트는 곧 삶의 마지막을 맞이해야 하는 인간에게 보여주는 진심 어린 예의와 다름이 없다. 그 시간이 있기에 그를 마침내 떠나보낼 수 있는 것이다. <존 윅>과 연계된 작품들이 발표된 지금, 캐릭터의 행방을 예측하기는 힘들다. 윅을 연기한 키아누 리브스는 연기를 잘한다는 말을 듣는 배우는 아니지만, 시리즈를 거치는 동안 적어도 인물과 그를 동일시할 정도가 되었다. 이쯤에서 시리즈를 끝내지 싶은 스타헬스키는 아름다운 이별의 인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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