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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두번의 추락에 대하여,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오진우(평론가) 2023-09-13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불가능에 도전한다. 영화는 스탈린의 ‘피의 대숙청’ 시기라 불리는 1938년을 배경으로 한다. 반역 세력을 색출해 처형하는 일을 진행하는 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NKVD) 소속 볼코노고프 대위(유리 보리소프)는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피해자 유가족들을 방문한다. 가해자인 그가 과연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영화는 볼코노고프의 발걸음을 통해 아직도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은 스탈린 시대의 감춰진 역사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선다. 나탈리야 메르쿨로바, 알렉세이 추포프 부부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역사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을 차용한 ‘환상적 우화’에 가깝다고설명한다. 때론 완벽한 고증을 거친 역사적 재현보다 우화적 재현이 역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틈새를 만든다.

도망에서 구원으로

영화에 이러한 틈새를 만드는 두번의 추락이 있다. 볼코노고프는 출근길에 직속상관인 그보즈데프 소령(알렉산드르 야첸코)의 투신을 목격한다. 상관의 자살로 인해 부하 직원들이 재심사를 받게 되는데 볼코노고프는 자기 차례가 오기 전 무고하게 숙청된 사람들의 명단을 들고 엔카베데 본부에서 탈출한다. 탈출은 하지만 희망이 없는 발걸음이다. 희망이라면 볼코노고프의 탈출을 통해 엔카베데의 악행의 보고서가 흘러나온 것이다. 무언가가 흘러나오기 위해선 열림이 필요하다. 열림을 통해서 영화는 스탈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찢는 시도를 선보인다. 그 시작이 그보즈데프 소령의 투신이다. 내부 숙청의 두려움으로 택한 그의 투신은 내부 고발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위한 이기적인 선택에 가깝다. 오히려 그의 추락보다 엔카베데 조직이 내부 균열을 봉합하는 것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보즈데프의 시체는 빠르게 치워진다. 그가 뛰어내린 열린 창문을 지카레프 대령(블라디미르 에피판체프)과 대원들이 메우고 볼코노고프에게 함구하라고 명령한다.

죽음을 피해 삶을 택했지만 그보즈데프 소령처럼 자신의 안위를 생각했다는 점에서 볼코노고프의 탈출 역시 이기적이다. 여기에 변화를 이끄는 인물은 친한 동료인 베레텐니코프(니키타 쿠쿠시킨)다. 볼코노고프는 애인의 밀고로 길거리를 배회하다 강제노역으로 차출된다. 숙청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를 묻는 일을 하다 베레텐니코프의 시체를 마주한다. 무덤이 된 땅을 헤집고 베레텐니코프가 갑작스럽게 올라온다. 영화는 두번의 추락 사이에 한번의 상승을 심어놓는다. 이때부터 영화는 일종의 심판극의 형태로 변모한다. 베레텐니코프는 볼코노고프의 내장을 꺼내 지옥의 고통을 선사하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용서를 받으라고 말한다. 이 미션은 하나의 세계를 열어버린다. 죽음 너머의 세계 말이다. 이에 따라 심판관도 스탈린 체제에서 신으로 바뀐다. 이로 인해 볼코노고프는 자신을 쫓아오는 엔카베데의 추격에도 한층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의 발걸음은 단순한 도망에서 종교적 색채를 띤 속죄와 구원의 여정으로 바뀐다.

볼코노고프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시체를 마주하게 된다. 너무 많이 등장해 무감각하게 여겨질 정도다. 가족, 친구, 동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잡혀갔던 피의 대숙청 시기의 감각은 다름 아닌 ‘마비’다. 무고한 사람을 총살하는, 아마도 총을 처음 써보는 베레텐니코프의 몸짓에서 영화는 그 당시 사람들이 겪었던 스탈린 시대의 마비 증세를 체화한다. 바로 쏘지 못하고 총을 쥔 채로 굳어버린 몸, 흐르는 눈물과 주위의 눈치를 보며 애써 지어보는 웃음. 영화는 베레텐니코프의 머리 옆에 총이 놓인 구도를 연출함으로써 타인을 향한 총구지만 실상 자신을 향한 것임을 드러내며 파멸하는 인간성을 표현한다. 이러한 마비 증세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드러난다. 감정을 숨기고 굳은 표정을 한 사람들은 산송장과 다를 바 없다. 이와 달리 머릿속은 복잡하다. 피해자 유가족은 볼코노고프의 방문을 사상검증의 절차로 여긴다. 서로를 향한 불신은 비난할 수 없는 생존본능에 가깝다. 겉과 속이 분열된 이 시기에 대화로 용서를 구하기는 요원해 보인다. 영화는 말보단 비언어적 방식으로 용서를 구하기에 이른다.

볼코노고프를 쫓는 골로브냐 소령(티모페이 트리분체프)은 피해자 유가족 모두를 체포하는 초강수를 둔다. 용서를 구할 곳이 전무한 볼코노고프는 절규하기 시작한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둘 불을 끄고 창문을 닫아버린다. 열려 있지만 완전히 닫힌 공간에서 그는 완전히 고립된다. 다음날 그는 자신의 명단에도 없는 한 사람을 만나고 굳은 몸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딸이 체포되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채 다락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볼코노고프는 피골이 상접한 그 사람을 업고 씻긴다. 그 순간 그 사람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볼코노고프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의 품에서 죽는다. 피에타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숭고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것은 손쉬운 마무리다. 베레텐니코프가 다시 등장해 천국을 가게 된 볼코노고프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환상으로서 등장하는 베레텐니코프는 볼코노고프의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할지 모른다. 자신을 쫓아온 골로브냐 소령에게 짓는 천진난만한 웃음은 자신의 과오를 반성은 했는지 의심스럽고 심지어 천국으로 간다는 안도감마저 느껴진다.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을 담다

방점은 볼코노고프의 추락에 있다. 첫 번째 상관의 추락은 볼코노고프의 여정의 문을 열었다. 두 번째 추락은 어떤 문을 열었을까? 볼코노고프가 스스로 간다고 믿고 있는 천국의 문 대신 영화는 다른 문을 연다. 실제 역사라면 숙청당했을 피해자 유가족들이 풀려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낸다. 영화는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종교의 힘에 기댄다. 손쉬운 해결책이기도 한 이 설정은 영화가 처한 곤경이자 영화가 재현하는 시대의 곤경이기도 하다. 그 힘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이 마지막 문은 절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스탈린 체제는 영화가 재현하는 1938년 이후 1952년까지 유지된다. 탈출구가 없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일말의 희망을 종교적 구원으로 보여준 것은 픽션의 역량이자 러시아 출신 감독의 윤리적 반응이다.

하지만 이 마지막 장면에서도 비정하게 문은 다시 닫힌다. 엔카베데 대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간 텅 빈 처형장에 영화의 첫 부분을 몽타주하고 싶다. 대원들은 공놀이를 비롯한 신체 활동을 활력 넘치게 선보인다. 영화는 숙청된 피해자들을 향한 용서만큼이나 가해자가 된 청년들의 신체가 경직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경직화 현상은 2023년 러시아에서 현재 진행 중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우크라니아 전쟁.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가 스탈린과 푸틴을,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을, 영화와 현실을 몽타주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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