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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릴레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 정성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한 것은 도대체 왜 전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라크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홉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의 원작 동화를 읽어보았다. 영국의 동화작가 다이애나 윈 존스가 1986년에 발표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의하면 이 모든 사건은 사라진 왕자를 둘러싼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 동화를 읽고 나면 그 다음에는 도대체 왜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제외한다면 동화의 줄거리와 영화는 거의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권으로 된 이 동화의 전편만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사물에게 말을 걸면 생명을 불어넣는 재주를 가진 18살 소피는 그저 소녀일 뿐이다. 멋진 청년 왕실 마법사 설리만은 아줌마 마법사가 되어버렸고, ‘몸짱’인 황야의 마녀는 ‘몸꽝’이 되었다. 게다가 소피의 두 여동생 레티와 마사도 사라졌다. 미야자키는 이 동화에서 로맨스 부분을 필사적으로 삭제해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희생만이 마법을 풀수 있다? 환상에만 내맡기는 게 아닌가

물론 미야자키의 공중부양의 신기는 여전히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고(특히 소피와 하울의 첫 번째 상공비행!), 쿵쾅거리면서 그 가느다란 네 발로 아슬아슬하게 돌아다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귀엽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여기는 지금 19세기 말 지도상으로 알 수 없는 지명의 전쟁터. 다이애나 윈 존스의 동화에서 남은 것은 전쟁뿐이다. 비행선들은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고, 사람들은 피난길에 여념이 없다. 일체의 저항도 없는 무자비한 폭격. 그 잔인한 공격은 예외 없이 시종일관 밤에만 이루어진다. 만일 장면의 스펙터클 효과를 노린다면 그렇게 밤으로만 이루어진 불바다를 다룰 필연적인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그 전쟁 장면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이 이미지들이 어디서 많이 본 것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건 텔레비전을 통해 위성 중계방송 된 이라크 바그다드 시내의 불바다다. 문만 열면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그 모든 추적으로부터 자유로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어쩔 수 없이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를 생각나게 만든다. 이 국적불명의 전쟁은 사실상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전쟁에 대한 알레고리다. 그러나 비유는 거기까지다. 그 다음은 물론 미야자키의 (유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겹도록) ‘착한’ 왕국이다.

미야자키는 세계의 전쟁을 자기의 왕국으로 끌어들인 다음 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 할머니와 소녀의 일인이역 소피를 보낸다. 이 90살의 소녀는 자기 자신의 저주를 푸는 일에 관심이 없다. 소피는 자기를 희생하면서 하울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건다. 마법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진심이다. 오직 그것만이 그 모든 마법을 무효화한다. 그 진심이 심장을 되돌려주는 것으로 표현된 것은 더도 덜도 아닌 숭고함의 행위다. 진심의 표현이라는 행위, 거기에 담긴 반성할 것이라고 가정된 세계라는 주체. 그 순간 심금을 울리는 주제곡 ‘세계의 약속’이 흐른다. “시간이 시작될 때부터의 세계의 약속, 결코 끝나지 않는 세계의 약속” 하지만 여기 그러나, 라는 단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희생이 기적을 만드는 것은 환상에 세계를 맡기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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