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강원도의 인적 드문 계곡에서 원신연 감독은 행복해 보였다. 점심으로 나온 육개장 국물을 숟가락으로 뜨면 모조리 바람에 날려갈 정도의 혹독한 추위가 계속됐지만,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를 만드는 그 현장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이는 수십명에 이르는 제작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독의 지독한 열정을 배우며 스탭에게 온전히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완성될 영화에 대한 호기심은 현장 취재 이후에 더욱 커졌다. 그로부터 몇 개월의 후반작업 기간. 여제자를 꼬시겠다는 일념으로 서울 변두리를 찾은 음대교수와 이들을 접대하는 동네 토박이들이 벌이는 폭력의 난장판이라는 만만찮은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의 편집본이 구타가 아닌 구토를 유발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뒤. 5월31일 개봉을 앞둔 <구타유발자들>이 시사회를 통해 공개됐다. <구타유발자들>의 시나리오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 우수작으로 선정된 지 2년. 자신의 장편 데뷔작이 될 뻔했던 두 번째 영화를 완성한 원신연 감독은 여전히 검은색 옷을 고집했고, 여전히 아쉬움이 많았으며 여전히 새로운 영화를 부지런히 생각하고 있었다.
-기분이 어떤가. 다른 사람이 쓴 시나리오로 작업했던 <가발>에 비해서 <구타유발자들>은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않을까 싶은데. =아쉬움은 여전하다. 2시간22분짜리 편집 버전이 있는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생각했던 것들이 거짓말없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영화를 계속 줄여나갔다.
-이런 영화는 짧고 간결한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애초에 생각할 때부터 러닝타임이 2시간30분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편집 도중에 비밀 모니터 시사를 여덟번 정도 했다. 아는 사람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해서 사람을 소개받거나, 학원에 전화해서 모니터 요원을 구했는데 “한국영화의 전설이 될 것이다”는 식의 힘이 되는 이야기부터 “욕밖에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이렇게 비호감인 영화는 처음”이라는 반응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번은 전통예절 학원 분들이 모니터를 했는데, 정말 그때 점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웃음) 극단적으로 안 좋게 본 사람과 극단적으로 좋게 본 사람의 중간을 찾으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재밌는 건 러닝타임이 1시간30분이든 2시간55분이든 관객의 체감시간은 같다는 거다. 다른 건 후반부에 봉연이 호되게 구타당할 때 관객이 봉연에게 이입하는 감정의 크기였다. 2시간30분 버전에서 관객이 굉장히 많이 울더라. 거기에는 봉연이 변화하는 지점이 다 살아 있었다. 처음 인정을 만났을 땐 떨려서 말도 잘 못하고 참 순수하다. 영선의 차를 빼주려고 할 때도 그의 선의를 보여주는 디테일이 담겨 있고. 후반부에 현재나 문재에게 당할 때도 폭력에 의해 파괴된 영혼의 모습이 슬프게 느껴진다.
-가장 큰 거부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장면이 어딘가. =오근, 홍배 등이 억지로 쥐를 먹는 장면. 어찌나 리얼하게 찍었는지 편집실에서 스탭들이며 편집기사들도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녔다. 기가 막혀서 웃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 악의적인 표현이 아니라 쥐를 먹어야 하는 인물들의 처절함이 느껴지는 장면인데, 일반 관객은 일단 쥐꼬리를 드는 순간부터 안 보더라. (웃음)
-극장 버전에 포함된 컷이 모두 몇개인가. =1500컷이 조금 넘는다. 2시간22분 버전에서는 3천컷. 2시간51분짜리는 4800컷.
-단순히 컷을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버전이 바뀌면서 리듬도 달라졌다는 얘기인데. 지금보다는 영화의 리듬이 훨씬 빠르고, 클로즈업에서 갑자기 풀숏으로 빠졌을 때의 뜨악함 같은 급작스러운 사이즈 전환에서 오는 재미도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더라. =이야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빨리빨리 이야기를 진행시키려 했고, 점프컷도 굉장히 많다. ‘저 감독, 영화를 기본적으로 배우긴 한 거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쨍하는 공간에 세수도 안 한 것 같은 애들이 등장하는 극단적인 이야기이라 부드러운 연결보다는 필름으로 찍은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과 상황의 점프가 많으니 그 사이의 상황까지 그런 식이면 정말 혼란스러운 아마추어 영화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했고, 컷의 연결 자체는 정교하게 가야 했다. 물론 짧게 줄이다보니 점프는 많이 남고, 정교함은 줄어드는 상황이 돼버렸지만. (웃음)
-전체적인 공정에서 볼 때, 결론적으로 포기한 것은 별로 없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요즘은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의 데이터를 뽑아서 거기에 맞게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다. 배우는 인형이고 감독은 상품을 찍어내는 사람 같다. 대중영화이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개봉 버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 최선이면서, 대중영화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한계라고 본다. 시사회를 보고 지인이 “하고 싶은 얘기는 결국 다 했네”라고 했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
-데뷔작 <가발>의 경험이 <구타유발자들>을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친 것 같나. =시나리오는 <가발>을 만들기 전에 썼으니 내용적인 영향은 거의 없다. 예전에 독립영화를 할 때 전투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인물이나 형식에 파고드는 태도가 더 집요해진 것 같다. 아무래도 데뷔작 때는 처음 경험하는 시스템이라 아쉬움이 많았는데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는 단편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즐거웠다. 영화 속에서 내가 재미를 유발하고 싶다고 의도했던 부분에서,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일반 관객이 실제로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위안도 많이 됐고 기분도 좋았다.
-관객이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한 부분이 있었다면. =처음에 영선이 흰 벤츠 안에 있고, 홍배가 그 위에 커다란 돌을 들고 올라가서 낑낑대는 장면에서 굉장히 재밌어하더라. 희한한 게 그 벤츠에 관객이 굉장히 민감하다는 거다. 그 비싼 차가 영화가 진행될수록 박살이 나면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거기서 잠깐 빠져나오면 기분이 나빠한다. 아마 차를 사 본 사람은 그 기분을 알 텐데 사람들이 그 차를 자기 차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아이고 저 벤츠 하얀 건데, 아직 임시번호판도 안 뗐는데” 이러면서. (웃음)
-실제로 그런 차가 시가로 몇 억원에 달한다던데. =그렇다. 실제 벤츠긴 한데 중고를 3천만원 정도에 사서 튜닝을 한 거다. 내부의 고급 오디오를 바꾸고, 외관을 흰색으로 바꾸고, 거기다 촬영 중간중간에 계속 수리를 하느라고 결국은 1억원 가까이 든 셈이다. 처음에 제작사에서는 굳이 진짜 벤츠를 쓸 필요가 있겠냐고 했지만, 나는 진짜 벤츠가 실제로 박살나기를 바랐다. (웃음) 카메라를 그 차 주변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있는 그대로 보여주니까 관객도 그렇게 반응했던 게 아닐까.
-배우들 역시 어디로 숨을 구석이 없어서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촬영 때 여덟명의 등장인물 모두가 한번쯤 주인공이 되는 장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을 했었는데, 이런 영화는 편집 및 후반작업으로 배우의 연기를 얼마든지 살려줄 수 있었을 텐데. =관객이 실제로 그 공간에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좋은 시스템의 극장에서는 느껴질 텐데, 그 계곡에 인물이 한명씩 등장할 때마다 한번씩 그 공간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운드를 이용했다. 공간에 어울리는 인물의 아우라가 느껴지도록 울림을 달리 줬다. 재미를 주기 위해 음성을 약간 변조하기도 했는데, 오근이가 봉연과 눈싸움하다가 슬그머니 말꼬리를 내리는 장면에서는 오근을 좀 더 비굴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배우들이 워낙 잘해줬다. 자기 분량이 아닐 때는 따뜻한 곳에 피신해 있을 법도 한데 현장에서 늘 함께 얼음 깨고 눈 치우고.
-비교적 초보자인 이병준은 생각보다 연기를 굉장히 느끼하게 잘하더라. 특히 인정과의 키스신은 정말이지 두고두고 언급할 만한 최고로 느끼한 장면인데. =그 장면 찍기 전에 배우들을 따로따로 불렀다. 인정에게는 최대한 입을 앙 다물라고 하고, 영선에게는 무조건 혀를 넣으라고, 하고. 여자는 그게 싫고, 남자는 그게 목적이니…. 촬영할 때 인정이 어찌나 놀라던지 좀 미안했다. (웃음) 편집기사가 영선만 나오면 너무 재밌다고 그럴 정도였다. 아무렇게나 어떻게 붙여도 다 붙는다고. (웃음)
-한석규의 경우는 <넘버.3> <그때 그사람들>을 잇는 비열한 역을 맡았는데 너무 잘 어울린다. =마지막 엔딩 찍으면서 한석규가 우스갯소리로 “이제 CF 다 끊겼다”고 말할 정도였다. 한석규가 연기한 문재도 악역처럼 등장하지만 그 안에 상처가 엿보이고, 그 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문재가 계속 침을 뱉는 버릇은 시나리오에 없었던 설정인데. =한석규가 처음 만났을 때 “문재에 관해서는 모든 걸 알아서 하겠습니다. 걱정말고 맡겨주세요”라고 했다. 근데 첫 촬영하는 날 갑자기 “감독님 어떻게 할까요”라는 거다. 이제 시작인데 준비를 하나도 안 했단 말인가 놀라기도 했고 약간 삐칠 정도였다. (웃음) 그때 했던 얘기가, 나중에 문재가 용각산을 먹는 설정도 있고 하니 호흡기가 좋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기침을 하고 침을 뱉는 버릇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렇게 잠깐 얘기를 나누고 촬영에 들어갔는데, 그대로 딱 문재가 보였다. 실은 준비를 많이 했던 거다. 시나리오를 읽은 첫 느낌을 그대로 간직했다가 표현한다는 느낌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 구타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총이나 칼처럼 다른 무언가가 중간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더 무섭게 여겨진다. 폭력이나 왕따문제를 다룬 각종 시사프로그램에서는 폭력장면은 직접 보여줄 수 없는데, 극영화에서 그런 식의 리얼한 폭력을 맞닥뜨리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는 사람이 실제로 맞는 것처럼 아팠으면 했다. 실제 왕따문제를 겪고 있는 이들의 상황은 영화보다 더 심한 것도 많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피해학생들에 대한 보고서와 그들을 상담했던 이들을 통해 취재를 했는데 영화에 나오는 현재의 대사들은 거기서 대부분 차용한 것들이다. 우리가 외면하고 숨기고 있어서 그렇지 폭력문제는 보기보다 심각하다. 사실 난 살면서 언제나 구타유발자들이었지 한번도 구타자가 되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피해자 입장에서만 다루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을 목격하게 만들면, 폭력에 대한 처절하고 가슴 찢어지는 절절한 시선을 가지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맞는 사람이 스스로 맞는 것을 즐기고 더 때려달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좀 과하게 느껴지기도 하던데. =매에 길들여진 사람은 매를 맞으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 맞고 때리는 장면을 그렇게 길게 찍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군대에서도 보면 잘해주는 고참보다 때리는 고참을 더 좋아한다. 만날 때리다가 하루 안 때리면 그게 더 무섭고 차라리 한대 맞으면 맘이 편하고. 일종의 동물 같은 감정인데, 폭력이 인간을 그 정도로까지 몰고 갈 수 있다는 거다.
-한 테이크로 존속살해범의 인질극을 다룬 블록버스터급 단편 <자장가>, 해직노동자가 자살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큰 일을 해내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여준 단편 <빵과 우유> 같은 전작들은, 내용이나 형식을 스스로 제약한 뒤 그것을 돌파하려는 힘으로 의미를 만드는 영화였다. <구타유발자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완성된 영화 같다. =이제 생각해보면 <가발>은 첫 번째 단편 <세탁기>와 비슷했고, <구타유발자들>은 <자장가>와 비슷한데, <자장가>는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구타유발자들>은 공간과 시간, 등장인물 등 구조와 형식을 제한한 일종의 마당극 같은 영화인데, 시나리오를 쓸 때 51신을 시작하면서 문득 여기서 모든 걸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야기를 끌어가다 어디선가 막히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문제를 벗어나게 마련인데, 다른 데로 도망쳐봤자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의 특징과 매력이 감소될 것 같았다. 그래서 굉장히 길어졌는데, 무려 41장에 걸쳐서 한신을 쓰다보니 또, ‘이 정도면 되지 않겠어?’(웃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잠깐 몇 발짝만 옮기지, 뭐. 그래서 바로 옆 공간으로 옮겨서 끝냈다. (웃음) 사실 그런 종류의 제약은 오히려 즐거움이다. 같은 이야기라도 형식만 조금 다르게 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감독의 의무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종류의 도전이 관객에게도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차기작은 어떤 것인가. =제목은 <바바리맨>인데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한 노동자의 고군분투기인데 <빵과 우유>와 비슷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의 절실함이 보는 사람에게는 묘한 웃음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판타지와 코미디, 액션도 많은 동화 같은 가족영화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