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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현 교수의 <고양이를...> 비판에 대한 반론
2001-12-05

`예술영화냐 상업영화냐` 낡은 이분법은 버리자

한편의 영화가 공개적으로 다양한 논의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라는 점에서, 김경현 교수의 정성스런 비판(<씨네21> 329호)을 받은 <고양이를 부탁해>는 아직도 행운이 끝나지 않은 영화다.

김 교수의 비판 요지는 이 영화가 상업영화의 구조 안에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영화의 기본 원칙을 위반했다는 점이다. 그는 상업영화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게임의 법칙”으로, 극장 안에서조차 피곤한 질문에 맞닥뜨리는 것을 싫어하는 관객의 속성을 감안해서 “유치한” 질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가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그가 내린 중요한 결론은 <고양이를 부탁해>가 예컨대 “주인공이 언제 섹스를 할까”와 같은 종류의 포장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상업영화의 구조 밖으로 나가서 “예술영화”로 만들어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좀더 “리얼리즘”적인 질문과 스타일에 천착했더라면 “한국영화의 대안이자 미래”로 추앙받을 수 있었으리라고 진단한다.

한국영화 안에서 예술영화는 어디에 서 있는가?

비평이란 일정한 주관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다양한 주관성의 충돌은 텍스트 자체의 의미를 풍요롭게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비평가의 주관성이란 비평하고자 하는 텍스트에 주를 달고 해석한다는 기본적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를테면 축구 경기를 해설하려고 앉아 있는 사람이 ‘저런 풀밭 위에서는 골프를 했어야 했다’고 말한다면 듣는 이는 김이 샐 것이다.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르기 전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층위를 좀더 검토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나는 텍스트 내부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텍스트 바깥의 조건이다. 후자의 문제부터 말하자면, 한국영화계에는 이른바 ‘예술영화’가 자립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을 만한 시장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김경현 교수가 몸담고 있는 미국의 현실과 다른 부분일 것이다.

한국영화계에서 유럽의 각종 국제영화제(최근의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를 중시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런 경로는 국경을 넘어서서 자기 영화의 관객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감독들에게는 중요한 위로가 되고, 제작자들에게는 새롭고 작은 영화들에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 유럽의 메이저급 국제영화제들이 할리우드영화에 잠식당하지 않은 소규모 시장의 연합체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국제영화제 효과’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미미하며, 더욱이 국내의 비평 기류와 외국시장의 반응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업영화말고 예술영화를 만들라’는 조언은 자칫 상업영화계로부터 진지한 영화를 추방하고 국제영화제용 영화나 만들라는 선언으로 통할 우려가 있다.

한편으로 국제영화제가 한국영화계, 특히 젊은 감독들에게 미치는 미학적 효과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검토해볼 때가 되었다. 유럽의 영화제가 선호하는 제3세계 영화들을 보면 토착사회의 역사적·문화적 특수성에서 소재를 취하되 유럽적인 영화미학으로 포장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유럽의 영화제 전문가들이 씌워준 월계관을 머리에 쓴 영화들은 각각 제 나라로 되돌아와 그 지역을 대표하는 예술영화로 간주된다. 이 부류들은 자국의 상업영화와 그 관객에 대해서 종종 경멸적인 절망의 제스처를 표하곤 한다.

우리는 이제 유럽의 영화제들이 ‘고급 예술’이라는 빌미로 제3세계를 문화적으로 식민화하는 효과도 아울러 우려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최근에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대안적 배급망’에 대한 논의는 자국 내의 예술영화를 비롯한 소수자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시장을 형성시키자는 취지에 다름 아니며, 이는 산업 및 미학 측면에서 주류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분열증을 치유할 수 있는 대안으로 기대받고 있다.

리얼리즘영화만이 예술영화가 될 수 있나?

김경현 교수의 글은 또한 비평이 빠지기 쉬운 전형적인 함정을 반복하고 있다. 그의 논지를 구성하는 핵심 근거인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이분법이 바로 그것이다. 상업영화의 규칙이란 반복적으로 훈련된 관객 반응을 일정한 관습으로 정립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상업영화의 본질 자체가 고정불변이 아닐뿐더러 그 경계 역시 조금씩, 그러나 쉬지 않고 변경되어간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영화들, 특히 김 교수가 집중적으로 경험하고 있을 할리우드영화 안에서조차 경계 자체를 살짝살짝 건드리려는 불온한 호기심, 때로는 경계를 통째로 무시하는 시도들이 꾸준히 있어왔다. 경계 위에 서서 경계를 위반하려는 불온하지만 경쾌한 욕망, 이것이야말로 <고양이를 부탁해>를 직조하는 핵심 주제이다. 이 영화가 상업영화판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 기초하고 있다는 김 교수의 지적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창작의 동기도 결국 나르시즘적 자기애라면 누가 그런 욕망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만약 김 교수의 글이 “피곤한 질문을 하고 싶을 때에는 유치한 질문의 가면을 씌우라”거나 “관객은 연출자가 미워하는 캐릭터가 바로 자신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순간 설명할 수 없이 기분이 언짢아진다”는 등, 이 영화가 상업영화로서 실패하게 된 이유들을 지적하는 데서 그쳤더라면 드물게 보는 흥미로운 글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영화계에서 예술영화라는 호명은 여러 가지로 의심스러운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서구의 미학과 비평 담론을 직수입하는 식민주의적 편집증, 혹은 특정한 방식의 영화만을 ‘고급’으로, 심지어 ‘문화’ 그 자체로 간주하는 부르주아적 계몽주의의 유령이 아직도 이 땅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창작 못지않게 비평의 동기 역시 나르시즘이고 보면 비평가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가를 문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와중에 비평가의 선택과 지지를 관객이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비평가는 관객의 ‘저속’ 취향을 탄식하는 상호 불신이 심화되며, 상업영화와 관객간의 상호작용으로부터 가치있는 의미를 캐내려는 노력을 방기하는 비평가의 무지와 게으름에 면죄부가 발부되고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비평계를 향해 제기되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쟁점은 리얼리즘과 예술영화를 사실상 동일시하는 경향인데, 이것을 미국에 있는 한국인이 반복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영화사의 성립과 발전의 조건에 기인한다. 한국에서 영화가 태동하고 그 형식과 내용이 정립되어가는 시기 자체가 일제 식민치하였으며 이후에도 대부분의 시절을 군사독재 아래에서 보냈기 때문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리얼리즘의 경향은 철저히 봉쇄당했다. 그러므로 영화사가인 이영일의 지적대로, 한국에서 리얼리즘은 현실비판적인 작가들에게 최후의 저항선이라는 의미를 지녀왔고 이같은 전통 위에서 <아리랑>(1926, 나운규)과 <오발탄>(1961, 유현목)으로 이어지는 걸작의 계보가 권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영화를 옥죄었던 정치적 검열은 사실상 완전하게 사라졌다고 말해도 좋다. <박하사탕>(1999, 이창동)조차도 당대의 현실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바로 직전의 역사에 대한 회고적 속죄의식을 수행한 것이며, <거짓말>(2000, 장선우) 파동은 정치적 검열이 아니라 윤리와 풍속의 검열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아직도 리얼리즘만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그것도 “경제적 계급”을 재현하는 형식이라는 믿음은 무엇에 근거하는 것인가? 이러한 태도는 영화사적으로 이만희의 <마의 계단>(1964)이나 김기영의 <하녀>(1961)와 같은 이질적인 전통의 걸작들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고, 당대의 관점에서는 젊은 감독과 제작자들에게 불필요한 압박감을 가져다줄 뿐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관념적 좌파나 미국 내 아카데미에 유폐되어 있는 좌파에 공통된 징후인 것 같다. 경제구조나 일상생활, 의식과 문화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들에 대해 좌파로서의 긴장관계나 문제의식을 생산하기 어려울수록 낡은 패러다임에 더욱더 환원론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정말 태희는 일본영화적인 캐릭터인가?

텍스트 내부에 관한 김경현 교수의 논점 중 가장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은 태희(배두나) 캐릭터를 “주로 일본영화에서 등장하는 엉뚱하고 깜찍한 인물” 계열로서 “동화책 삽화” 같다고 말한 부분이다. 필자가 보기에 태희는 <고양이를 부탁해>가 가진 문제의식을 가장 크게 짊어지고 있으며 섬세한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형상화된 인물이다. 태희는 아버지와 남동생을 축으로 하는 남성중심적 공동체인 가족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고 거기에 반발하는 반면, 단 한번의 에피소드로 등장할 뿐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다르다.

가족주의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광신에 가까운 한국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전체의 이름하에 구성원들의 개별성이 무시되고, 특히 여성이 지닌 내면성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성(otherness)으로 간주되어 배척당하기 쉽다. 그것을 알고 있는 태희는 친구를 명분 삼아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일한 딱 그만큼 돈을 훔쳐내서 집을 나선다. “한국의 딸에겐 그렇게 운명이 무겁다.”(김승희, 시선집 <남자들은 모른다>, p.25)

배두나는 단순히 널리 알려진 스타일뿐만 아니라, 이처럼 여성적 주체(female subject)로부터 여성주의적 주체(feminist subject)로 서서히 탈바꿈해가는 태희를 심각한 체 폼잡지 않고 표현해내기에 적역인 연기자다. 또한 태희를 구상하는 데에 영감을 주고 영화 전체의 개념을 잡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일본영화 <비밀의 화원>이나 한국영화 <첫사랑>이 아니라 어느 한국 여성 시인의 시 한편이다.

“그는 난간이 두렵지 않다/ 벚꽃처럼 난간을 뛰어넘는 법을/ 아는 고양이 (중략) 고양이는 난간에 섰을 때/ 가장 위대한 힘이 솟구침을 안다/ 그가 두려워하는 건/ 늘 새 이슬 떨구어내는 귀뚜라미 푸른 방울꽃/ 하느님의 눈동자 새벽별/ 거듭나야 하는 괴로움/ 야옹/ 야옹.” (박서원, ‘난간 위의 고양이’)

항상 자기 주위의 경계(=난간)를 배회하면서 조용한 발자국으로 야옹거리던 태희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지 않는가?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