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액터/액트리스
[김유정] 성숙의 기술

김유정

김유정의 감정은 단아한 형태였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연우가 곱게 차려입은 한복과 맞춤으로 어울리는 감정의 세기였다. 넓고 깊은 감정 폭으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만 정작 본인은 흐트러짐이 없이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았다. 내뿜기보다 속으로 깊이 삭이는 감정 표현은 <해를 품은 달>의 기구한 액받이 무녀 ‘연우’의 어린 시절을 한층 기품 있게 만들었고, <구미호: 여우누이뎐>의 구미호의 딸 ‘연이’를 비련의 캐릭터로 만들어주었다. 드라마 <메이퀸>과 <황금무지개>의 밝고 씩씩하고 착한 ‘캔디형’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김유정이 구사하는 군더더기 없는 숙련된 감정 표현은 그 진가를 발휘했다. 또래 아역배우인 김새론이 가진 감정의 기운이 자유롭다면, 김유정은 더 정제되고 기술적이고 대중적인 지점에서 평가할 부분이 많은 연기를 해냈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김유정은 지금껏 사용하던 감정의 ‘기술’을 철저히 내려놓는다. 중학생 소녀 천지(김향기)의 자살 이후 그녀의 언니가 ‘왕따’가 된 소녀의 외로운 시간을 다시 유추해나가는 과정에서, 김유정은 그 친구의 죽음에 가장 깊게 관여한 친구, 즉 가해자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아한 거짓말>의 ‘화연’은 지금껏 김유정이 해온 역할 중 가장 ‘못된’ 여자아이다. 감정을 삭여 우아함으로 치장할 일도, 쌍꺼풀 진 커다란 눈망울에서 맑은 눈물을 하염없이 뚝뚝 흘려야 할 일도 없는, 생애 처음의 파격적인 역할이다. 김유정이 맡은 역할이 자살한 ‘착한 아이’ 천지가 아니라는 건, 관객으로선 뒤통수를 한대 맞는 듯한 기분이 드는 캐스팅이다. “이한 감독님이 그러더라. 내 눈을 보면 참 순수하다고. 그런 아이가 친구를 못살게 굴면 오히려 더 잘 표현되지 않겠냐고. (웃음) 한번 잘해보고 싶었다. 나도 착한 역할이 아닌 다른 역할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어쩌면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간 가해자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민감한 성장기, 부모의 무관심으로부터 자신 역시 아픈 속내를 가지고 있는 소녀가 바로 화연이다. 촬영을 거듭할수록 김유정은 점점 그런 화연에게 동화되고 매력을 느꼈다. “원래 내가 답답한 걸 못 참는 성격이다. 울면서 참고 그런 걸 못하는데 하는 역할이 그러다보니 다들 실제 내 성격을 알고는 깜짝 놀란다.” 드라마 속 착한 역할을 할 때는 집에 가서 대본을 쌓아놓고 못된 상대역의 대사를 장난처럼 해보면서 즐거워했다고 하니, 제대로 감정을 분출할 기회를 만난 셈이다.

올해 16살인 김유정에게 <우아한 거짓말>은 물리적으로도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일단 전보다 부쩍 컸다. 귀엽다보다는 예쁘다라는 단어가 제법 잘 어울리는 소녀로 변신한 것이다. “주변에서 ‘김유정 폭풍성장’이란 말을 자꾸 써도 내가 뭘, 이랬는데 지금은 내가 봐도 달라 보인다. 그게 참 신기하다.” 김유정은 아역배우들이 성장하면서 어릴 적 간직한 매력을 잃게 된다는 그 ‘마의 16살’이라는 말을 이제 실감한다고 한다.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된 거다. 지금 잘 커야 하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안 되니까. 그런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웃음)” <우아한 거짓말>에서는 캐릭터의 성격도 있지만 그 변화를 반영하듯 중학생 또래의 멋내기를 시도했는데, 덕분에 김유정의 성장과 변화도 한층 눈에 띈다. 그녀는 “관심받고 꾸미고 싶어 하는 소녀 화연에게 딱 맞게 잘 차려입은 옷에 양말 하나조차도 알록달록하게 신었다. 팔찌며 시계며 장신구도 전에 없던 것들을 사용했다.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라고 한다. 물론 이런 외적 변화보다 지금 그녀는 지켜야 할 것이 더 많은 중요한 때라고 한다. “요즘은 허점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배우는 모든 게 보여지는 직업이다. 사소한 행동 하나로도 열심히 한 게 무너질 수 있는데 그러면 나뿐만 아니라 가족도 힘들어지니 더 조심하려고 한다.”

이전보다 책임감이 더 커졌다는 걸 실감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간 <친절한 금자씨>에서 납치범 백 선생(최민식)에게 살해당하는 피해자 재경, <각설탕>에서 말 ‘천둥이’와 교감하는 임수정의 아역 시은,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마의 피해자인 미진(서영희)의 피살을 한층 아프게 하는 어린 딸 은지, 그리고 <불신지옥>에서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형사 태환(류승룡)의 아픈 딸 지은 등 2000년대 한국영화의 중요한 순간에는 김유정의 어린 모습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김유정의 연기는 매번 강렬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했던 캐릭터이기도 했다. 이번엔 그와 달리 ‘화연’, 그 자체로 극을 이끌어나가는 막중한 캐릭터가 되었다. “아역은 꽤 많은 작품을 해도 출연 분량이 많지 않다. 이번엔 3개월 동안 촬영장을 오가는데, 교복 입고 학교 가는 기분이 들더라. 분량도 많고 내가 극을 이끈다는 생각에 고민도 많았다. 다행히 함께 작업했던 분들이 영화 보시고 제일 힘든 캐릭터를 잘했다면서 칭찬해주시는데 정말 울컥하더라.”

<우아한 거짓말>은 김유정에게 그렇게 ‘배우로서의 역할’을 공고히 새겨준 작품이 되었다. 다시보기와 케이블 재방송이 가능한 시대에 시청률 40%가 넘는 기록적 신화를 세운 <해를 품은 달>이 그녀에게 인기와 연예인이라는 수식을 달아준 것과는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그전까지 연기는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라기보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하나의 생활이었다. “어릴 때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 4살 때부터 CF를 찍고, 아역 연기를 하고 이런 것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으니 그러려니 하는 거다. 연기를 할 때 많은 대사와 상황을 머리에 집어넣어야 하고 사람들도 기억해야 하니까 머릿속에 그 많은 걸 꾹꾹 눌러담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차니까 다른 건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게 된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부터 카메라 앞에 선 김유정은 연기를 하는 것이, 촬영장에 있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신났던 시절을 지나 최근 들어 그 당연함에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고 털어놓는다. “아역배우 선배 언니, 오빠들이 지금이 제일 위험한 때라고 하더라. 딱 이 나이 때 연기를 그만둬야지 생각했다고. 난 남들 학교 가는 것처럼 촬영장 가고, 남들 공부하는 것처럼 연기하는 게 내 생활이라고 여겨왔는데 얼마 전엔 학교생활이 너무 재밌고 촬영장 안 가도 불안하지 않은 생활이 지속되더라. 이런 고민은 엄마한테도 말 안 하고 혼자만 끙끙댔는데, 다행히 지금은 좀 마음을 잡은 것 같다.” 영화만 줄잡아 20편. 한해 2~3편은 기본인 데다 드라마와 단막극을 오가는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하는 김유정은 다작의 필모그래피를 소화해낸 배우다. “생각해보면 연기를 쉴 때는 나 자신도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한다. 쉬면 혹시 내가 배우로서의 감을 잃지 않을까 싶은 거다. 고민의 시간이 좀 있었지만 지금은 더 많이 다양한 연기를 하고 싶다. 연기가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

호기심도 많고 할 것도 많은 십대 배우 김유정이 찾은 해결책은 제법 합리적이다. “연극영화과는 안 가려고 한다. 그보다 연기 말고 다른 관심거리를 찾아서 그걸 깊이 파고 싶어졌다.” 김유정의 요즘 관심사는 요리와 사진과 건축디자인이다.

김유정은 최근 할리우드에 가서 단편 <room 731>을 찍고 왔다. 731부대를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서 그녀는 일본군 강제수용소에 갇힌 십대 소녀를 연기한다. “미국 스탭, 영어 대사, 이런 것들이 부담으로 다가오면서 촬영 때 너무 경직된 것 같아서 많이 아쉽다. 혼자 많이 끌어가는 역할이라 또 새로운 모습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우아한 거짓말>의 ‘화영 효과’는 있는 걸까? “여전히 착한 역할로 많이 찾으신다. (웃음) 그래도 지난해부터는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녀는, 27살 정도에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해서 사진을 찍고 그걸 전시하면서 요리도 먹어보는 ‘획기적인’ 사진전을 할 테니 꼭 오라고 했다. “꿈은 크게 꿔야 이루어진다고 하더라. 지금은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은 시간이다.”

<해를 품은 달>

magic hour

농도 100%의 슬픔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왕 이훤과 액받이 무녀 연우의 애틋한 사랑을 공고히 해주는 토대는 아역배우들의 신묘한 연기에서 비롯된다. 김유정은 상대역인 여진구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가슴 설레는 첫사랑의 떨림부터 안타까운 이별까지 폭넓은 감정의 변화를 오가는데, 특히 왕의 반대세력이 꾸민 음모로 인해 주술에 걸리고 훤과 헤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의 집약적인 표현력은 매우 출중하다. 수척한 얼굴로 훤에게 작별을 고하는 비극적 연기는, 김유정이라서 할 수 있는 100% 짙은 농도의 감정 연기였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