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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유야] 시대와 사회가 내뿜는 공기에서 영화가 나온다

<이별까지 7일> 이시이 유야 감독

외모도 영화도 자못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시이 유야는 작품을 통해 현대 일본 사회를 향한 “화와 분노”를 슬그머니 드러내온 신진 연출가다. 수편의 실험적인 단편을 연출하다 오사카예술대학졸업작품인 장편영화 <무키다시 닛폰>(2005)으로 피아영화제 대상과 음악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국내엔 <행복한 사전>(2013)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별까지 7일>(2014)은 그의 아홉번째 장편영화다. 최근 <이별까지 7일>의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고자 한국을 찾은 그의 발길을 잠시 붙들었다.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이시이 유야의 말끝엔 젊은 작가의 예리한 칼날이 숨어 있었다.

-하야미 가즈마사의 소설 <이별까지 7일>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이번에 처음 작업해보는 나가이 다쿠로 프로듀서에게 제안 받았다. 원작에서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하더라.

-원작을 각색할 때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겠다고 생각했나.

=두 가지는 반드시 지키자고 생각했다. 하나는 하야미 가즈마사가 갖고 있는 가족에 대한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말자는 것. 그는 30대 초반에 이 소설을 썼고, 지금 나는 그때의 그와 엇비슷한 나이다. 그 시점까지 고려하고 싶었다. 또 하나는 원작을 읽고 난 독자의 감상과 영화를 본 관객의 감상이 같았으면 하는 거였다.

-동생 슌페이(이케마쓰 소스케)가 아침에 텔레비전에서 행운의 색과 숫자를 보고 난 뒤 긍정적인 결말이 찾아온다는 등의 디테일까지도 살려냈다.

=그걸 꼭 살리고 싶었던 이유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슌페이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 의지할 것을 만들어주고 싶었달까. 원작엔 없지만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장면도 있다. 형제가 언덕 위를 마구 올라가며 우리 뭔가 제대로 해보자고 의기투합하는 장면이다. 원작에선 형 코스케가 다소 일방적으로 추궁당하는 중에 슌페이가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형에게도 굳은 의지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 그 장면을 추가한 거다.

-<이별까지 7일>에서 드러나는 가족의 모습이 현대 일본 사회의 가족 문제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나.

=내가 그려낸 형태가 일본의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다만 부분적인 조각은 겹치지 않을까 한다. 가족 내 구성원끼리도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지 않나. 그들 사이에서 거리감이 생기는 부분과 가까운 가족의 문제이기에 미루면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들을 담으려 했다. 이러한 부분은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을까 싶다.

-레이코(하라다 미에코)의 시한부 판정이 영화 초반에 가족의 고민거리로 제시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열심히 무언가를 해볼 의지를 갖게 된다는 설정에 집착하는 편이다. 레이코의 시한부 판정을 계기로 변해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일본에 절실한 태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때로 당신의 영화는 강인한 여성 캐릭터가 끌고 간다. <이별까지 7일>에서도 레이코는 집안의 남자들이 모르는 사이 어느새 집의 바탕과 중심이 되어 있는 캐릭터다.

=내가 강한 여성에게 끌리는 건 확실하다. (웃음) 남성이 알고 보면 약한 존재라는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인 것도 같다. 내가 알 수 없는 여성성에 의지하려는 면이 있다.

-하라다 미에코는 여리지만 심지가 굳은 어머니로 적역이다. 기억을 잃으며 그녀가 보여주는 소녀 같은 모습도 대단히 사랑스러운데 당신은 그녀에게 어떤 기대를 가졌나.

=그녀가 보여주는 소녀다움은 단순한 귀여움이 아니다. 아이 같은 천진한 표정도 있지만 그녀는 남자 셋이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드는 사람이다. 치매 증상 때문에 본인도 모르게 자기 생각을 마구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해 속내를 털어놓는 것 같기도 한 모호함 역시 하라다 미에코가 완벽히 표현해주었다. 가장 어려운 역할인 동시에 내가 가장 기대한 역할이었다. 물론 아주 성공적이었고.

-반면, 남성 캐릭터들은 대체로 덜 자란 느낌이다. 특히 <이별까지 7일>의 세 남자에게서 그런 면모가 가장 크게 드러난다.

=세명의 남성 캐릭터를 만들며 가장 의식한 부분은 셋 다 각기 다른 캐릭터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거였다. 술에 약하다든가 성격적인 부분이 비슷하지 않나. 레이코를 구해야 한다는 목적을 공유해야 함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세 남자가 ‘우리 상황이 이러니 서로 힘을 합치자!’라고 자연스럽게 화합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각자 뭔가 해보려고 하지만 사실 그들 개개인의 능력이 출중하지 못하고, 노력하는 중에 ‘어찌어찌하다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네?’ 하는 인상을 심고 싶었다. 이 ‘얼떨결’의 뉘앙스를 꼭 강조해달라. (웃음)

-얼마 전 진행한 서면인터뷰(<씨네21> 988호)에서 쓰마부키 사토시는 이케마쓰 소스케와 캐치볼을 하며 우애를 쌓았다고 했다. 연출자인 당신이 둘의 관계를 조율한 부분도 있나.

=형제간의 정이나 연결고리를 만들게끔 내가 그들 사이에 끼어든 건 없다. 둘 사이에서 빠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심지어 이케마쓰 소스케에게 ‘쓰마부키 사토시가 대단한 배우이지만 너도 할 수 있으니 그에게 지지 말라’고 하며 갈등을 부추기기까지 했는데. (웃음) 남자 형제 사이는 서로에 대한 대립의식을 보이는 게 더 어울린다. 덧붙이자면, 평소 나는 쓰마부키 사토시와 이케마쓰 소스케가 서로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쓰마부키 사토시야 워낙 훌륭한 배우이니 캐스팅에 대해선 물어볼 게 없지만, 슌페이 역을 이케마쓰 소스케에게 맡긴 이유는 궁금하다.

=그렇다고 해서 둘을 대하는 내 태도에 큰 차이는 없었다. 이케마쓰 소스케에 관해서만 얘기하자면 심지어 나는 그를 천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웃음) 그가 천재여서 그랬다.

-이케마쓰 소스케의 어떤 점이 그토록 천재적이던가.

=응? 사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웃음) 20초만 기다려달라. (정확히 20초 뒤) 나보다 네다섯살 어린데도 그는 같이 일하는 파트너로서 신뢰할 수 있는 타입이다. 그는 연출자의 모든 생각을 지지하고 믿어주는 편이다. 영화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연기도 아주 훌륭하다. 확신할 수 있는 건 그의 마음 깊은 곳엔 어떠한 분노와 야심이 단단히 자리하고 있다는 거다. 반면 상당히 순수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이 이케마쓰 소스케의 연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당신의 영화는 대체로 느리게 호흡한다. 영화의 리듬을 짜는 데엔 어떤 고민을 하나.

=그래, 빠른 것 같진 않다. (웃음) 특히 최근 찍은 영화 셋(<행복한 사전> <이별까지 7일> <밴쿠버의 아사히>)은 더더욱 그렇다. 이것도 봐라, 저것도 봐라 하는 식으로 연출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끊임없이 관객에게 주입하는 영화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나는 하나를 보여주더라도 제대로 보여주고 관객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도록 하고 싶다. 특히 <이별까지 7일>처럼 가족과 관련된 영화라면 마음 한쪽에서 내 가족은 어떠한가 하고 가족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쉼없이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미츠코, 출산하다>(2011)와 <행복한 사전> 사이에는 얼마간 시간이 비어 있다.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

=왜 그랬을까? (웃음) 동일본 대지진이 발발해 그사이에 약간의 정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꾸준히 뭔가 일을 하긴 했다. (한국엔 방영되지 않은) <WOWOW>의 2부작 드라마 <엔딩롤>과 <TV아사히>의 8부작 드라마 <망상수사~ 구와가타 고이치 준교수의 스타일리시한 생활> 중 두 에피소드를 연출했다.

-<행복한 사전> 이후 당신 영화의 성격이 조금 바뀌었다는 생각도 든다. 원작 각색 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청춘들의 주변적인 이야기를 주로 만들다가 <행복한 사전> 이후 작품엔 보편적인 드라마까지 얹혔다.

=사실 원작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고 연출자로서 내 태도가 달라진 것도 아니다. 너무나 명백한 답변이지만 프로젝트의 성격이 달라진 게 가장 큰 이유다. <행복한 사전> 이전의 영화는 제작비도 적었고, 그만큼 내가 알아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또 그걸 관심있는 사람만 봐도 좋았다. 하지만 <행복한 사전>부터는 제작비도 늘어났고 영화도 더 폭넓은 관객이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꾸준히 영화를 만들 힘을 얻는다”고 지난 인터뷰(<씨네21> 647호)에서 말했다. 여전히 그런가.

=불만이라기보다 내가 피부로 느끼는 사회에 대한 위화감에 가깝다. 이 시대와 사회가 내뿜는 공기, 나는 그 안에서 호흡하며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공기에서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작품을 구상한다.

-지금 가장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일본 사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한국 매체에서 직접적으로 이런 얘기를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에둘러 말하자면 위기를 안고 있는 일본 사회는 점점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악화되는 부분은 정치나 경제 면에서 여러 가지가 있다. 그보다 문제인 것은 그 위기를 일본인들이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가치가 낮아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현재 일본에서 상영 중인 신작 <밴쿠버의 아사히>는 쓰마부키 사토시, 이케마쓰 소스케와 또 한번 만난 영화다.

=두번 같이 작업하니까 더 어렵다. 기존에 했던 것들을 일부 부정하고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낀다.

-배경이 1938년부터 1941년까지인데, 이 정도까지 옛날로 간 시대극은 처음이다.

=전쟁 이전의 캐나다가 배경이다. 오히려 재밌다고 느낀 건 그래서였다. 국내에서가 아니라 외국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일본인 거다. 캐나다에서 사는 일본인이 일본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더 갖고 있고, 모국의 장단점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모습들이 흥미로웠다. 이민자로서 겪는 갈등과 차별 역시 현대 일본의 사회문제와도 통한다고 생각했다.

-프로덕션상의 차이도 크게 느꼈겠다.

=(질문 끝나자마자) 너무너무 힘들었다! (웃음) 캐나다 현지 촬영은 어려워서 일본에 당시를 그대로 재현한 세트를 지었다. 길거리는 물론이고 야구장까지 모두 만들었다. 만들 땐 힘겨웠지만 일단 만들고 나니 스탭과 배우가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건 쉬웠다.

-새해도 밝았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내 안에는 화와 분노가 굉장히 많다. 20대 중반까지는 그게 영화를 만드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됐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런 감정이 더 격렬해져서 이걸로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이 괜찮은지 생각하게 됐다. 앞뒤 생각 없이 달려오기만 한 상황이라 앞으로는 시간을 두고 나의 영화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려 한다. 신작에 대해선 구체적인 계획 없이 생각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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