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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 “낯선 길도 거침없이 달린다”
장영엽 사진 오계옥 2016-03-09

연극 <꽃의 비밀> <얼음> 장진 감독

장진만큼 유연하게 매체와 장르를 넘나드는 연출자는 드물다. 그는 영화감독이자 연극연출가이며, 방송작가이자 입담 좋은 예능 게스트다. 이렇게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쉬지 않고 달려온 그이지만, 여전히 장진에게는 휴식보다 새로운 자극이 더 절실한 듯 보인다. 올해 그는 두편의 신작 연극 <꽃의 비밀>과 <얼음>으로 대학로 관객을 만났다. 지난 2014년 말, 무언가에 홀린 듯 2주 만에 써내려나갔다는 이 두 작품은 배우의 연기에 대한 매혹과 연극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한편 3월 중순이 지나고 나면 현재 디지털방송국 메이크어스를 통해 개설한 장진 전용 채널 ‘딩고타임’의 모바일 콘텐츠에 대한 소식도 더 많이 들려오게 될 것 같다. 그렇게 그는 창작자로서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나가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거나 무뎌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긴장의 날을 벼리고 있다. “망하기 직전까지는 멈추지 않고 달려볼 것”이라고 말하는 장진은 당분간 충무로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고 한다. 아무렴 어떤가. 지극히 장진다운 선택 아닌가.

-신작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건 <웰컴 투 동막골> 이후 13년 만이다.

=맞다. <꽃의 비밀>을 먼저 올렸는데 순서로는 <얼음>이 먼저다. 어떤 작품을 먼저 할까 고민했는데, 연극하는 동료들은 <얼음>이 더 신선하고 재밌다고, 그런데 공연은 <꽃의 비밀>부터 올리라고 하더라. 불안하니까.

-비슷한 시기에 완성한 작품인데 장르와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른 두 작품이 나왔다. <꽃의 비밀>은 시끌벅적한 코미디 장르의 연극이다. <얼음>은 기본적으로 진중한 수사극이다.

=웬만하면 초고는 사무실이 아닌 다른 데 가서 쓰는 편이다. 그런데 <얼음>과 <꽃의 비밀>은 딱 이 자리(필름있수다 사무실)에서 썼다. 2주 동안. 그분이 오신 거지. (웃음) 지금 이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고 나서도 궁금하다. 도대체 왜 이걸 썼을까? 그 연유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보통 작품을 쓸 땐 이야기의 뼈대도 생각해야 하고, 일정도 봐야 하고, 조력자를 만나 어떻게 유통해야 할지도 생각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써내려갔다.

-두 작품을 집필한 건 2014년 12월경이다. “12월 마지막 주에 고민스러운 사정이 많았다”고 했다.

=그랬다. 이 회사를 20년 가까이 운영하면서 한번도 훌륭한 사장님이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생겼고 그걸 회사가 정식으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홍콩쪽에서 정식 파트너를 찾았다.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어서 보낸 상황이었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그게 잘 안 풀렸다. 그때 굉장히 실망했고 에너지가 많이 빠져나가더라. 그런 가운데 쓰게 된 작품이 <꽃의 비밀>과 <얼음>이다.

-<얼음>은 원래 영화 시놉시스로 염두에 뒀던 작품이라고. 왜 영화가 아니라 연극으로 만들 생각을 했나.

=생각해보니 영화로 만들면 다소 진부할 수도 있는 미스터리였고, 이걸 형식적으로 실험이 가능한 연극 무대에 옮겼을 때에는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음>은 쓰는 과정에서도 계속 내용이 바뀌었던 작품이다. 시놉시스를 정해놓고 쓴 게 아니니까. 오늘 꿈자리에 따라 내일 쓰는 작품이 달라지더라.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용의자가 등장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관객이 상상으로 만들어가게 된다는 극의 핵심적인 아이디어가 좋다.

=궁극적으로 ‘배우의 기술’에 대한 동경과 존경이 컸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가 무대에서 수려한 연기를 통해 관객을 극에 깊이 이입하게 하는 과정이 너무나 신비로운 거다. 연극이 뭐라고 생각하나? 살면서 우리는 연극 같다는 말을 많이 쓴다. 그 말을 썼을 때에는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연극이라는 개념이 있는 거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걸 내가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두고 우리는 ‘연극’이라는 말을 쓴다. 그리고 연극 무대에서 우리의 이입을 가능하게 하는 건 배우다. 배우의 기술로 어떤 환영을 만들어냈을 때, 관객의 상상은 어느 수준까지 닿을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 상상의 힘으로 우리(제작진)가 80을 만들고 관객이 20을 만드는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상대 배우의 리액션이 없는 연극에 출연하면서 배우들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리액션이 별로 안 좋은 배우랑 연기하는 것보단 나았을걸? (웃음) 어떤 시각점을 맞춘 채로 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용의자를 만들어내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웠던 건 한 시간 반 동안 무대를 운영하는 감각이었다. 보통의 연극이라면 어떤 장치나 충돌의 도움을 받아 이야기가 앞으로 쭉쭉 나아가야 하는데, <얼음>은 극의 70%가 배우의 모노드라마였으니 무대의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게 힘들었다. 배우들 입장에서도 어떤 허상을 만들어내 구체화하는 것보다 그런 점이 힘들었을 거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냉철한 형사 조두만과 다혈질이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형사 이종률에 각각 이철민과 김대령, 박호산과 김무열이 더블 캐스팅됐다. 특히 연극 무대에서 어떤 모습일지 쉽게 짐작가지 않던 배우 김무열의 활약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로맨틱 헤븐>(2011)에서 동치성 역할로 짧게 출연한 적이 있는데, 어떤 연유로 캐스팅했나.

=일단 배우 캐스팅이 쉽지 않았다. 우리의 대본을 받아본 배우들이 우스갯소리로 “요즘 이렇게 대사 많은 작품 못해요”라고 하기도 했고, 또 이 작품의 필수 옵션이 다른 작품과 <얼음>을 병행할 순 없을 거라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무열이는 이 작품의 가장 안정적인 중심이었고, 언젠가 긴 작품을 꼭 한번 함께해보고 싶었던 배우다. <로맨틱 헤븐>에서 굉장히 짧게 나왔잖나. 나는 직접 연출한 작품 중에서 좋아하는 영화는 없지만 좋아하는 영화의 장면은 있는데, 무열이가 출연한 <로맨틱 헤븐>의 그 장면은 내가 좋아하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신이다. 그만큼 나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던 배우이고, 요즘 같은 매체 통합 시대에도 잘 어울리는 배우인 것 같다. 뮤지컬, 영화, 방송, 코미디, 멜로, 액션. 어떤 매체이든 어떤 장르이든 선입견 없이 갈 수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연출한 수사극을 보면, 용의자의 정체는 늘 맥거핀 같은 기능을 한다. <기막힌 사내들>(1998)에서도 모두가 살인사건의 진범을 잡으려고 그 고생을 하지만 정작 범인이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박수칠 때 떠나라>(2005)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누가, 왜 죽였는지보다 범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심을 갖는다.

=그건 내 스타일이라기보다는 굉장히 고전적인 수사물의 원칙이 아닐까 싶다. 범인을 밝혀내기 위해 모두가 움직이는 과정이야말로 관객이 재미를 느끼는 대목이니까. 하지만 <얼음>의 경우 이 작품을 본 관객에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니, 그래서 범인이 누구야?’라는 말이다. 연극이 제시하는 결론이 분명히 있음에도 <얼음>을 본 관객은 쉽게 동의하지 못하더라. 왜냐하면 그건 그들이 마음속으로 그린 혁이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2월25일) 재미있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관객끼리의 대화’라고, 내가 진행을 보고 <얼음>을 본 관객이 서로 범인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거다. 누가 더 멋진 해석을 하고 누가 생각지도 못한 해석을 들고 올지 기대하고 있다.

-또 다른 초연극 <꽃의 비밀>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라이선스 연극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사실 전략적으로 이 작품을 들고 외국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대개 라이선스 작품만 사오는 게 연극계의 현실이니, 이번에는 우리의 작품을 외국 스튜디오에서 번안해서 상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거지. 물론 경남 밀양에 있는 아주머니들이 주인공이었다면 대사 자체는 더 재미있게 나올 수 있지만 이 작품을 번안할 경우에는 또 다른 숙제가 될 수 있겠다고 봤다.

-이 작품은 사망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편으로 위장하는 네 아내들의 이야기다. 젠더에 대한 관심이 영화 <하이힐>(2014) 이후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이힐>과는 다소 맥락이 다른 작품이다. 자기가 남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보험금을 타기 위해 하루 동안 어쩔 수 없이 남편이 되어야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니까. 어떻게 보면 <꽃의 비밀>도 <얼음>과 마찬가지로 배우의 메소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작품이다. 지금 버전으로는 여배우들이 남장 연기를 하지만, 원래 생각했던 건 남자배우들이 여장을 하는 설정이었다. 말하자면 여자를 연기하던 남자배우들이 그녀들의 남편을 연기하며 관객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진짜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설정을 계획한 거다. 배우의 기술이 얼마나 관객을 몰입하게 할지 궁금했다. 다소 과격한 시도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3월11일부터 열리는 앙코르 공연을 비롯해) 초연만큼은 여배우들이 연기하기로 했고, 다음에 <꽃의 비밀>을 올릴 때에는 남자배우들과 함께해볼 생각도 있다.

-지난해 <얼음>과 <꽃의 비밀>을 준비하는 동시에 디지털방송국 메이크어스와 계약을 맺었다. 메이크어스가 운영하는 멀티 채널 브랜드 딩고(Dingo)에 당신의 채널 ‘딩고타임’을 개설한 계기는.

=예전부터 온라인 방송국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메이크어스가 시도해보고자 하는 것들이 내 관심사와 맞아떨어졌다. 개인적으로 지금은 TV라는 고전적인 시장이 대중과 소통하던 시대가 끝나가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하루에 두 시간가량 TV를 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한 시간 반 동안 TV를 보고, 모바일로 나머지 30분을 본다고 한다. 말하자면 TV 시장의 4분의 1가량이 모바일로 이탈한 건데, 여전히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시장의 비중이 국내에서 크진 않지만 누군가가 머리를 조금만 잘 쓴다면 어떤 가능성이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바일이 TV의 대안 매체가 아니라 뉴미디어라고 생각한다. 뉴미디어로서의 모바일에 대한 관심사가 메이크어스의 멤버들과 통하는 지점이었다. 에너지 넘치는 젊은 친구들과 일하다보니 겁 없던 스물일고여덟의 내가 떠오르기도 하더라. 그래서 2년 동안 영화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의 가장 큰 관심사는 메이크어스와의 작업을 통해 훌륭한 콘텐츠 창작자들을 만들어내는 거다.

-페이스북을 기반으로 한 ‘딩고타임’에서는 고경표, 김슬기, 조복래, 오지호가 출연하는 혈액형 시리즈와 ‘싸움의 정석’ 등 이미 수많은 단편 콘텐츠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건 일종의 파일럿처럼 만든 영상들이고, 본격적인 콘텐츠는 지금 쌓아두고 있다. 빠르면 3월 중순이나 말 정도에 볼 수 있을 거다. 이 콘텐츠들은 두세 가지 차원에서 기존에 선보였던 콘텐츠와 완전히 다를 거다. 가장 먼저 시간상(러닝타임)의 고려가 있을 거고, 소재 면에서도 기존의 방송 콘텐츠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 거다. 더불어 다양한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재미를 줄 수도 있다. 이 세 가지가 우리 콘텐츠의 가장 큰 덕목이 될 거다. 오락성도 있으면서 정치•사회적 풍자성도 강한 작품들을 계획하고 있다.

-얘기를 들어보니 <SNL 코리아>의 확장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SNL 코리아>는 무조건 웃겨야 했는데 사실 딩고타임 콘텐츠는 웃겨야 한다는 부담은 없다. 계획하는 작품 중 음악이나 무용 콘텐츠도 있는데, 이런 작품들은 웃음을 주기보다는 굉장히 멋진 작업이 될 거다.

-그렇다면 2016년 당신의 키워드는 ‘연극’과 ‘딩고타임’이라 말해도 되나.

=그렇다. 연극이 개인 창작자로서의 작업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매개체라면, 딩고타임은 내가 몸담아왔던 장르 안에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해줬다. ‘모바일 콘텐츠는 장진네가 가장 잘 만들지’라는 말을 듣고 싶다. 뉴미디어에서 1등을 해보는 게 앞으로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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