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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희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보내온 제74회 칸국제영화제 출장기

종이 티켓 대신 핸드폰을, 야유 대신 박수를… 칸은 좀 달랐지만, 그래도 여전했다

팔레 데 페스티벌 레드카펫.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기억하는 가장 즐거운 추억은 영화의전당 야외 상영장에서 레주 리 감독의 <레 미제라블> 무대인사를 했던 순간이다. 감독과 배우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3천명 넘는 관객이 일제히 손을 흔들며 ‘봉수아!’라고 목청을 높여 인사했고 무대 위 감독과 스탭들은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관객과 함께 오프닝 시퀀스를 숨죽여 지켜보던 감독의 옆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서승희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레 미제라블>을 처음 본 것은 2019년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다. 유럽을 포함한 월드영화를 담당하는 프로그래머들에게 칸영화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해 가장 좋은 유럽영화의 50~60%가 칸에서 처음 소개되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2019년 경쟁부문 라인업은 대단했다. <레 미제라블> <아틀란티스> <바쿠라우> <리틀 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페인 앤 글로리> <잇 머스트 비 헤븐>…. 그리고 칸영화제는 2020년 1년을 쉬었다.

칸에서 본 60편, 그중 주목한 작품들

칸을 찾은 <비상선언>.

유럽의 코로나19 기세가 꺾이지 않았던 지난 3월, 칸이 본격적인 대면 영화제를 재개할 것이라는 기사가 났을 때만 해도 그 누구도 영화제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칸은 지난 6월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여느 해보다 풍성한 초청작 리스트를 발표했다. 올해 칸에는 유난히 유럽영화가 많았다. 그보다는 지난해 공백을 만회하듯 전체적으로 편수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발표된 경쟁 리스트 중 절반은 지난해 칸에서 상영될 예정이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칸 개최가 무산되자 많은 작품들이 다른 영화제에 출품하지 않고 1년 넘게 기다린 것이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나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 가기로 내정되어 있던 몇몇 감독들조차 칸 공식 기자회견 전날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의 전화를 받고 뒤늦게 칸에 합류했다는 풍문도 들렸다. 마땅히 경쟁으로 가야 할 영화들이 새로운 섹션인 칸 프리미어에 선정됐다는 비판도 있었다.

칸의 개막부터 폐막까지 12일 동안 60편에 가까운 영화를 봤다. 어렵게 결정한 출장이었고 상황이 또다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경쟁부문의 영화는 담당 지역과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 챙겨 보았다. 거리를 두고 생각하니 경쟁부문의 경우 대체적으로 2019년에 비해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다 훌륭한 작품들이지만 감독 한 사람 한 사람의 필모그래피를 비추어봤을 때 올해 소개된 영화가 최고작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는 의미다. 이같은 이유로 <드라이브 마이 카> <6번 칸> <티탄>처럼 비교적 칸에 소개된 횟수가 적은 젊은 감독들의 작품이 더 신선하게 느껴졌다. 코고나다의 <애프터 양>, 가스파 노에의 <보어텍스>, 홍상수 감독의 <당신 얼굴 앞에서>, 마르코 벨로치오의 <막스 캔 웨이트>는 왜 경쟁부문에 선정되지 않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좋은 영화, 소개하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지만 한정된 지면으로 몇편에 대해서만 쓰기로 했다. 고민 끝에 개인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영화 세편(<아네트> <베네데타> <프랑스>)과 황금종려상 수상작 <티탄>, 칸 현장에서 가장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던 영화 두편을 골랐다. 이중 <막스 캔 웨이트>는 칸 프리미어에, <The Tsugua Diaries>는 감독주간에 소개된 영화다. 물론 지면에 소개하지 못한 훌륭한 작품이 훨씬 많다.

온라인 티켓.

칸이 조금 달라졌다. 칸에 도착한 첫날 부둣가에 마련된 오피스에서 배지를 찾고 세편의 경쟁작을 포함해 여러 편의 영화를 예약했다. 종이 티켓을 고수해온 보수적인 칸이 올해 처음 온라인 티켓 제도를 도입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줄을 선 사람들의 손에는 종이 티켓 대신 핸드폰이 들려 있고, 티켓을 구하려고 영화 제목이 쓰인 피켓을 들고 줄지어 있던 시민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개막작 <아네트>는 미국의 록 밴드 스파크스와 레오스 카락스의 만남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일종의 ‘트래지디 뮤지컬’, 오페라 록 무비다. 전작들처럼 매우 서정적이지만 <아네트>에서만큼은 캐릭터를 풍랑 치는 바다 한복판에 세워두기를 서슴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아네트>는 폭력적인 충동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파멸로 이끄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칸이 야심차게 개막작으로 선정한 레오스 카락스의 이 감옥보다 서늘한 멜로드라마는 영화가 어떤 환경에서도 건재하리라는 믿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칸의 관객도 조금 달라졌다. 상영 전 칸의 공식 트레일러가 돌아가고 영화제의 로고가 화면에 뜨자 모든 관객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영화가 별로라고 생각되면 여지없이 야유를 보내던 모습도 사라졌다. 코로나19를 견딘 서로에게 응원을 아끼지 않으려는, 영화를 매개로 기꺼이 공동체가 된 이들이 보내는 무언의 격려였다.

<베네데타>가 칸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아이러니의 대가인 폴 버호벤이 17세기 이탈리아의 레즈비언 수녀 이야기를 각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를 기다렸다. 폴 버호벤은 이번에도 신앙과 동성애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뤘다. 하지만 그는 악동이 아닌 장인의 모습으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뤼미에르 극장으로 입장했다. 감독은 짓궂고, 폭력적이고 에로틱한 이야기 속으로 관객을 한달음에 몰입시켰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한 소녀에 사로잡힌, 신비로운 베네데타를 구현하기 위해 폴 버호벤은 매혹적인 프랑스 여배우 중 한명인 비르지니 에피라를 선택했고, 다수가 그녀를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예견했다. 감독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감독은 모든 공을 배우들과 스탭, 그리고 제작자에게 돌렸다.

코로나19 검역소.

칸이 많이 달라졌다. 유럽에서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모든 참가자들은 48시간 이내에 코로나19 음성 판정 문서를 보여줘야만 팔레 데 페스티벌에 입장이 가능했다. PCR 테스트 절차는 의외로 간단했다. 예약 시간에 맞춰 가면 검사소 입장부터 테스트가 끝나기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의료진도 전에 없이 친절하고, 테스트 후 6시간이 경과하면 이메일과 핸드폰으로 결과가 통보되었다. 참가자들도 별 불평 없이 이틀마다 이 성가신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팔레의 내부는 예년에 비해 눈에 띄게 한산했다. 아침 8시면 상영 스케줄이나 데일리를 픽업하러 오던 사람들, 2층의 네스프레소 무료 카페에 줄을 서던 그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브뤼노 뒤몽은 미디어와 뉴스 채널의 세계로 뛰어들기 위해 <잔 다르크>의 중세시대에서 현대로 돌아왔다. 레아 세두가 불행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스타 저널리스트 프랑스 드 뫼르(France De Meurs)를 연기했다. 그녀의 이름은 ‘죽다’와 ‘다시 태어나다’라는 상반된 의미를 갖는데, 거듭 태어나기 위해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결국 자신이 속한 세계를 떠나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닥칠 운명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되었다. 카메라 앞에서 모든 고통을 감수하는 게 현대의 잔(Jeanne)에게 주어진 형벌인 셈이다. 레아 세두가 코로나19로 불참하면서 뤼미에르 극장에는 감독 혼자 들어섰다. 그녀가 주연을 맡은 초청작 네편을 모두 보았다. <프랑스>에서의 연기가 가장 빛났던 건 영화마다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브뤼노 뒤몽의 꼿꼿함과 역량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칸은 그래도 여전했다. 칸의 아이덴티티 중 하나는 해마다 특정 영화에 대한 애착이나 거부와 같은 격렬한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격정은 드물게 관객을 기절시키는 등의 신체적 반응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런 영화는 보통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된다. 다행히 올해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경향이다.

올해 크루아제트 대로를 달궜던 작품은 다름 아닌 <티탄>이었다. 누구도 줄리아 뒤쿠르노의 <티탄>이 황금종려상까지 받으리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티탄>은 프리미어 상영부터 관객을 혼란에 빠뜨렸다. 하지만 감독의 첫 장편 <로우>에서부터 돋보였던 상상력과 미장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명료하게 한 장르로 분류하기 쉽지 않은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강철과 피와 불꽃의 오페라라고 해야 마땅한 줄리아 뒤쿠르노의 유니크한 영상 스타일이다. 이 다재다능한 젊은 여성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머지않아 프랑스의 아카데믹한 영화적 관습은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 분명하다.

칸의 열기가 부산으로 이어지기를

칸국제영화제 공식 데일리.

영화제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60년대 마지막 위대한 이탈리아 감독 마르코 벨로치오의 다큐멘터리 <막스 캔 웨이트> 상영을 들 수 있다. 벨로치오는 1968년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한 쌍둥이 형제를 만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다. 가족과 친구들의 증언, 빛바랜 사진들, 8mm 필름 조각들은 결국 이 세상에 동화되지 못한, 감수성이 예민하고 갈 길을 잃어버린 한 청년을 되살아나게 했다. 칸의 관객은 노장의 자기고백적이고도 진솔한 <막스 캔 웨이트>를 보고 진심으로 감동하여 길고 긴 기립박수를 보냈다. 안경 너머 거장의 깊고 맑은 눈에도 끝내 눈물이 맺혔다.

미겔 고메스와 모린 파젠데이로가 공동으로 연출한 <The Tsugua Diaries>. 겸손하고 개인적인 이 영화는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21일간의 이야기가 역순으로 펼쳐지는 ‘워크 인 프로그레스’로, 포르투갈에서 록다운 기간 중에 만들어진 영화다.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 모든 스탭이 코로나19 테스트를 받는 모습도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다. 배우들은 리허설에서 때로 서로의 역을 바꿔 연기했다. 제한된 공간성 때문에 양말과 같은 사소한 디테일에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감독주간 메인 건물

두 감독은 스탭이 갇혀 지내는 집이나 정원을 아주 부드럽고 평화로운 세상처럼 카메라에 담아냈다. 나란히 자연을 관조하고 빛의 조각들을 포착하거나 배우들의 춤에 넋을 잃는 장면들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범세계적인 대재앙 속에서도 작고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들만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직은 가능하다. 삶에서든 영화에서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본질적인 가치다. 두 감독은 우리의 삶이 곳곳에, 무엇보다도 시네마 안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10대들의 축제처럼 춤과 음악으로 시작하고 끝났다. 가벼움과 기쁨이야말로 이 고단한 시기에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그 무엇이고 또 힘이라는 것을 말하듯이.

마르코 벨로치오 감독은 칸영화제 폐막식에서 상상력과 용기야말로 시네아스트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했다. 상상력이 용기를 잃으면 영상으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2021년 칸은 의기소침해 있던 모든 영화인을 북돋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용기와 상상력으로 다시 시작된 칸의 열기가 대서양을 건너 부산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그리하여 올가을 부산국제영화제 야외 상영장에서 다 함께 춤추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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