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로얄로더>가 12부 작의 막을 내렸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청년 한태오(이재욱)가 대한민국 최대의 재벌가 강오 그룹의 서자인 강인하(이준영)와 손잡고 계급의 최정상에 오르는 이야기, <로얄로더>란 이름 그대로 ‘왕도물’의 전형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하지만 민연홍 감독은 태오가 오르려는 강오그룹의 공간을 “겉으론 굉장히 웅장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차갑고 외로운 톤”으로 그리려 했다. 재벌가 인물들의 외양 역시 보통과는 달랐다. 강오그룹의 수장인 강중모 회장(최진호)은 정장이 아닌 바틱(인도네시아를 원산지로 하는 수공 염색의 독특한 기하학적 무늬 등을 일컫는 패션 용어.-편집자) 스타일을 입고 다닌다. 그렇게 민연홍 감독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더라도 전혀 점잖지 않고 지저분한 사람들이 많다”라는 지론 아래 “가족일지라도 서로 물고 뜯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려 했다.
“꿈이 크다면 작은 어려움
[인터뷰] <로얄로더> 민연홍 감독, ‘꿈이 크다면, 어려움도 쉽게 넘길 수 있다’
-
<닭강정>을 봤다. 의문의 기계에 들어간 여자주인공이 닭강정으로 변한다는, 상상조차 못해본 설정을 밀고 나가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끝까지 다 보기 위해서는 상당한 항마력이 필요한 B급… 도 아닌 D급 코미디라고 하기에 처음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몇몇 지인들의 호평에 솔깃해졌다. 강력한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읽어낸 이도 있고 장안의 화제인 <삼체>보다 더 재미있게 봤다는 이도 있었다. 질문도 떠올랐다. 왜 감자튀김도 아니고 탕후루도 아닌, 닭강정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이나 물건의 겉모습에 관심이 많은 내가 재밌게 볼만한 콘텐츠겠다 싶은 기대가 생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만족. 첫화부터 마지막 화까지 보는 내내 너무나 즐거웠다. 기대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외모가 중요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신선한 방식으로 다루어진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최민아(김유정)가 변신한 닭강정이 같은 식당에서 만든 다른 닭강정과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왜 하필 닭강정인가
-
촬영이 끝나고 2주가 지나도록 내가 살던 이 집이 낯선 것은 다 냉장고 때문이다. 냉장고 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3개월간 방치한, 한달가량 열어본 적도 없는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기란 외장하드 속 촬영 소스를 확인하는 기분이랄까. 냉장고 안에 내가 뭘 넣어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무서운 마음에 냉장고 문을 열 수가 없었고 생수병이며 먹다 남은 배달 음식이며 식탁과 싱크대에 쌓여만 갔다. 더이상은 이 시한폭탄 같은 냉장고를 끌어안고 살 수는 없었다. 날을 잡고 냉장고 청소를 했다. 5리터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몇번이나 내다버리고 재활용 쓰레기봉투는 큰 봉지로 두개나 나왔다. 하루 종일 냉장고 속을 닦고 또 닦았다. 하얗게 빛나며 찬기를 내뿜는 텅 빈 냉장고 속을 보고 있자니 이번엔 이것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가 막막했다. 내가 뭘 먹고 살았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일단은 바나나 한 송이와 요구르트 한 묶음을 사다 넣어놨는데 그 사이 또 그대로 검게 시들고 유통기한이 지나버
[김세인의 데구루루] 쓰는 생활
-
한때 정우성 같은 액션배우를 지망했던 우석(조병규)은 얼굴에 난 상처로 인해 스턴트맨 생활로 힘겹게 가족과 생계를 꾸려나가는 중이다. 그의 꿈은 사고로 얼굴에 흉터가 생기기 직전인 1997년으로 되돌아가 그 순간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러던 그는 스턴트를 하던 중 사고로 죽는다. 스턴트를 하기 직전 그는 거리에서 의문의 스님(박철민)을 도운 대가로 죽은 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부적을 구매했고, 그 덕에 1997년에 환생해 과거를 바로잡을 기회를 얻는다.
웹소설에서 유행하는 환생물 장르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른다. 영화 <비트>(1997)와 가수 김건모의 <핑계> 등의 소재로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려 했으나 영화 속 1997년이라는 시공간은 서사와 결부되지 않고 피상적인 차원에 그친다. 대사마저 90년대 소년 만화에나 등장할 법한 온갖 클리셰와 낡디낡은 주제, 애잔할 정도로 반복되는 시대착오적 개그로 가득하다. 내레이션에 의존하는 전개와 허점투성이인 설정, 모든
[리뷰] ‘어게인 1997’, 1997년을 찍으랬더니 1997년으로 퇴행한 영화
-
-
꿈을 향해 달려가는 세 사람이 있다. 번번이 오디션에 떨어지지만 언젠가 자신들의 개성이 세상에 인정받으리라 믿는 록밴드 ‘은하수’다. 하지만 세 사람의 기괴한 불협화음을 듣고 있노라면 이들이 이름을 떨치지 못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청춘과 낭만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생활고에 시달리던 리더 동은(윤제문)이 주식 손실을 메꾸기 위해 밴드 공용 통장에 손을 대고 만다. 화가 난 은수(김지훈)와 은하(이시아)가 홧김에 동은이 아끼는 기타를 중고 시장에 팔아버린다. 영화 <은하수>는 세 사람이 동은의 “심장과도 같은” 기타를 되찾는 여정을 유쾌하게 그린 작품이다. 고등학생의 풋풋한 러브 스토리와 가족을 위해 새출발을 준비하는 아버지의 일화가 이어지며 따뜻함을 자아낸다. 일차원적인 웃음 코드와 플래시백에 의존하는 단순한 플롯이 다소 아쉽지만 놀라울 정도로 낙천적인 세 사람은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분명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밴드 노브레인의 보컬 이성우를 비
[리뷰] ‘은하수’, 영글지 않은 몽글몽글함
-
혈혈단신의 건축사 청이옌(양조위)에게 1970년대의 홍콩은 사업을 벌이기 좋은 기회의 땅이다. 쩡 사장(임달화)을 도와 부동산 매매 작전에 뛰어든 그는 잠깐의 기지를 발휘해 큰돈을 만지게 된다. 건물은 짓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청이옌은 작은 투자회사 ‘카르멘’을 설립한다. 그리고 점차 주식시장으로 발을 넓히며 카르멘을 홍콩 경제를 주무르는 재벌 기업으로 키워낸다. 11년 뒤 찾아온 홍콩의 경제위기. 카르멘 그룹의 주가도 폭락한다. 카르멘의 비위를 눈여겨보던 반부패 수사관 류치위안(유덕화)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그는 청이옌과 주변인을 심문하며 탐욕으로 얼룩진 황금 제국의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무간도>의 각본가와 두 주연배우가 의기투합한 만큼 정통 누아르를 기대하기 쉽지만 <골드핑거>는 1970년대 홍콩 경제의 황금기를 배경으로 한 금융 범죄물이다. 홍콩영화 역대 최고 제작비를 투입한 프로덕션 위에서 펼쳐지는 일사불란한 앙상블
[리뷰] ‘골드핑거’, 원초적 포만감으로 슬며시 갈음하는 악행의 변
-
우연히 폭죽이 담긴 수레에 올라타 얼떨결에 용의 전사로 지목되었던 포(잭 블랙)는 이제 지혜의 지팡이를 물려받아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다. 마스터 시푸(더스틴 호프먼)는 포에게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차례라고 조언한다. 우그웨이 대사부처럼 평화의 계곡을 수호하는 영적 지도자가 되어 새 후계자를 임명할 때가 된 것이다. 시푸는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선발전을 열지만 포는 아직도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용의 전사로 남고 싶은 눈치다. 그러던 어느 날 제이드 궁전의 유물을 노리는 여우 젠(아콰피나)의 등장으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치열한 결투 끝에 젠을 제압한 포는 그녀에게서 강력한 악당에 관한 소문을 듣는다. 어떤 존재로도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악당 카멜레온(비올라 데이비스)이 강력한 힘을 탐내고 있다는 것. 시푸는 포가 후계자 물색에 집중하기를 바라지만 포는 카멜레온을 제압하려 젠과 함께 그녀의 고향인 주니퍼시로 향한다. 한편 카멜레온은 포의 지팡이를 얻어 영혼계로부터 최악의 빌
[리뷰] ‘쿵푸팬더4’, 판다로 충분한데 강제로 덤을 주려 한다
-
<가여운 것들>을 보며, 이상했다. 영화는 시종 벨라(에마 스톤)를 화려하게 비추지만, 진짜 보여주려는 건 따로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뭔가가 더 있다는 묘한 기분. 영화의 숨겨진 이면을 보기 위해, 한 여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영화의 초반, 벨라의 사랑스러운 순수는 돋보인다. 그런데 벨라의 순수함을 좀 유심히 뜯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순수는 물들지 않은 공백의 상태. 그러니까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벨라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즉각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녀에게 없는 것은 과거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있는 자신만의 역사가 벨라에겐 없다. 그러므로 지식과 교양도 없다. 세상을 모른다. 이것은 <가여운 것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으로 작동한다. 벨라는 좌충우돌하며 세상을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코미디와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표면에 드러난 벨라의 공백이다.
매력적인 몸을 가진 성녀, 벨라
하지만 그게 다인가?
[비평] 반복된 것이 본질에 가깝다, <가여운 것들>
-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미완성 희곡 <성스러운 창녀>(La Sainte Courtisane)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인이 여행을 떠난다. 그 미모가 눈부신 나머지 남자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황제의 딸이라 여기거나 여신이라 여기거나. 여인은 청금석 잔의 안쪽처럼 파란 하늘 아래 붉은 모래언덕 사이를 지나 동굴에 기거하는 수도자를 만난다. 수도자가 청한다. “나를 알렉산드리아로 데려가 7가지 죄악을 맛보게 해주시오.” 이어 묻는다. “당신은 왜 나를 유혹하오?” 여인이 답한다. “당신이 화려한 가면 속의 죄를 보고 수치스러운 옷 속에 있는 죽음을 보게 하려고요.” … 미완성작이어서 그 결말이나 주제는 모호하지만, <가여운 것들>을 본 이라면 ‘성스러운 창녀’ 벨라(에마 스톤)가 짙푸른 하늘 아래 알렉산드리아의 빈자들을 목도하거나 종종 동굴 같은 공간을 탐험하고 상대 남성을 시험에 들게 하는 등 젠더 위상과 관련한 설정들을 보며 분
[비평] 보편적인 압축성장, <가여운 것들>
-
한국영화 선호파
<특별시민> 감독 박인제 (네이버 시리즈온, 왓챠, 웨이브, 쿠팡플레이, 티빙) / <더 킹> 감독 한재림 (넷플릭스, 네이버 시리즈온) / <비밀은 없다> 감독 이경미 (네이버 시리즈온, 왓챠, 웨이브, 티빙)
대권을 노리는 정치 9단 변종구(최민식)가 헌정 사상 최초의 3선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특별시민>은 선거사무소의 치열한 밤과 낮을 현실감 있게 그린다. 광고계 출신의 홍보 담당을 연기한 배우 심은경을 비롯해 문소리, 라미란, 류혜영 등 선거판의 전략을 책임지는 여성 인물들도 돋보인다. 추진력 있는 초·중반부에 비해 힘 빠진 전개로 흐르는 <특별시민>이야말로 현실 정치판이 영화보다 언제나 더 극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상징적 예시이기도 하다. 전두환 정권부터 이명박 정권까지 근현대사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환기하는 한재림 감독의 <더 킹>에서는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 후보가 맞붙은 제
[기획] 묵직하거나 가볍거나, 4·10 총선 전후로 볼만한 선거영화 OTT 큐레이션
-
<킹메이커>란 제목으로 개봉됐던 영화 두편이 있다. 하나는 조지 클루니 감독, 주연의 2011년 미국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변성현 감독, 고 이선균 주연의 2021년 한국영화다. 이들 모두,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자와 그 뒤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려 하는 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치의 흑막이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같지만, 한 <킹메이커>(2011)는 현실 정치의 승리를 위해선 이상적 정치의 패배가 필요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반면, 다른 <킹메이커>(2021)는 현실 정치의 패배를 통해 이상적 정치의 가능성과 여운을 남긴다.
나는 인구에 회자되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언,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만큼 현대 한국 정치, 아니 시대와 국가를 넘은 모든 정치의 본질을 꿰뚫는 말도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이 말에 빠진 것을 더하자면 ‘민중의 바람’이다. 이 바람은 흔히 ‘바램’으로 적히는 소망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런 소망이 뭉쳐 움직이는 강
[기획] ‘돛대를 꺾어버릴, 거센 바람이 인다,’ 영화를 경유해 살펴보는 4·10 국회의원 총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