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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뤼크 고다르의 <열정>(1982)은 첫눈에 영화와 회화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렘브란트의 <야경>과 같은 유명 회화를 <열정>이라는 제목을 단 영화로 재구성하느라 분주한 영화인지 텔레비전인지 알 수 없는 어느 대규모 제작 현장이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조명기기가 현장을 비추고 있고 감독, 프로듀서, 장치, 운영진이 내는 소리와 움직임으로 사방이 들썩이는 가운데 17세기 바로크회화의 구성을 재구성하는 배우들은 정지상태로 숨을 고르고 있다. 고다르의 영화 <경멸> <주말> 등을 촬영했던 촬영감독 라울 쿠타르의 카메라는 <야경>의 세부와 인물에 차례로 포커스를 맞춘다. <야경>과 함께 보이스오버 목소리가 영화 제작진에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제작진은 “여기에는 이야기가 없다. 이것은 구성이다”. “이 (영화적 재구성) 장면은 사실 밤의 순찰이 아니라
[이나라의 영화의 검은 구멍] 고다르와 원죄 없는 영화, <열정> 속 회화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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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익의 두 번째 장편 <폭설>은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없는 무능의 소산이란 오해를 받기 십상인데 스토리가 드라마가 되는 관성이나 기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세개의 굵은 챕터와 에필로그로 나뉜 스토리는 사춘기 때 만난 두 소녀가 10년의 터울을 두고 다시 만나는 상황을 보여준다. 주연을 맡은 한소희와 한해인의 물리적 존재감이 주는 스크린의 박력에 의존하던 영화는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 그들의 존재를 풍경 안에 몰아넣고 그들의 육체적 시련이 심리주의 묘사를 대체하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나는 최근의 한국영화 가운데 배우의 클로즈업이 이토록 강력한 아우라를 자아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특히 이 영화로 데뷔해서 지금은 유명해진 한소희의 얼굴이 주는 힘은 어떤 이야기의 세공력보다 인상적이다. 5년 전 촬영을 시작했던 영화가 난산을 겪고 마침내 완성되었을 때 스크린 안의 캐릭터와 스크린 바깥의 배우가 기묘한 동질감을 띠는 것도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윤수익의 연출은 거두절미하고
[비평] 한소희의 클로즈업이 준 감흥, 단출한 이야기, 거대한 이미지 <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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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넥스트 도어>를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 세계의 예외 목록에 둔다면, 그 이유는 단지 그가 만든 최초의 영어 장편영화라는 사실에 국한되지 않는다. 비교적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편이긴 하나 위태로운 현재의 몸은 최근 알모도바르 영화의 본질에 가까우니, 달라진 건 플래시백의 지위다.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현재의 몸은 마비되거나 죽음에 가까워지더라도 비밀을 담은 회상 시퀀스의 강렬한 작용을 통해 언제라도 욕망하는 육체로 소생할 수 있었다. 플래시백은 현재 이미지와 대등하거나 종종 역전된 형태로 현재를 잠식하며 이를 가능케 했다. 반면 <룸 넥스트 도어>의 플래시백은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본래의 위치에 고정된다. 10대 연인의 육체적 사랑도, 전쟁 현장에서 은밀하게 암시되는 관계도 죽어가는 현재의 몸 앞에선 무력하다. 그렇다면 욕망하는 육체의 현현으로서의 플래시백이 사그라진 자리에 무엇이 있는가. 에두를 필요 없이, 거기에는 말이나 대사 차원을 넘어선 대화가 있다
[비평] 이야기의 삶과 죽음, <룸 넥스트 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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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의 세계를 구축한 영화의 시선은 바닥과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SF영화나 액션영화에서 비행하는 자, 낙하하는 자, 그리고 무중력상태로 우주공간에 떠 있는 자의 시선이 그러하다. 이외에도 CCTV, 인공위성, 드론과 같은 기계장치에 장착된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서 불안정하고 모호한 시각성을 다룬 경우가 있다. 이러한 근거 없는 시선들은 그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상작가이자 비평가인 히토 슈타이얼에 따르면, 군사, 감시, 엔터테인먼트 영역 등에서 이루어진 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감시의 일상화로 인해 서구의 재현 양식을 지배해온 선형 원근법의 체제는 수직 원근법의 체제로 대체되었다. 그는 시각문화의 재현 양식이 변화한 결과 방향감각의 상실, 새로운 시각성, 수직성의 지배가 나타났다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방향감각 상실은 안정적인 지평선의 상실에 일정 부분 기인한다. 지평선이 상실됨에 따라 근대성을 통틀어 주체와 객체, 시간과 공간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불안정, 모호함, 방향감각의 상실, 바닥을 잃어버린 시선이 비추는 공허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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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런의 아이맥스영화 <오펜하이머>는 클로즈업에 대한 인식의 틀을 전복한 영화였다. 아이맥스란 거대하고 광활한 자연의 풍경을 카메라로 담아내 극장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감각을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기에 초기 아이맥스는 다큐멘터리에 주로 사용되었다. 이후 블록버스터영화에서 규모감 있는 장면이나 공간감 있는 롱숏을 임장감 있게 담아내는 데에 적합한 포맷으로 인식돼왔다. 이 고정관념을 깬 영화가 <오펜하이머>다. 영화는 70mm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얼굴 클로즈업을 화면 가득 담아낸다. 그전까지 극 중 인물의 얼굴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담아낼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아이맥스 포맷의 새로운 시도였다.
아이맥스 카메라의 70mm 필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영화들보다 4배 이상 넓은 면적에 이미지가 기록된다. 카메라에 기록되는 이미지의 면적이 클수록 화면의 심도는 얕아진다. 롱숏과 풀숏만 주로 찍던 아이맥스 카메라가 인물에
[비평] 클로즈업의 이데올로기, <조커: 폴리 아 되>가 찍은 얼굴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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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인물은 때로 캐릭터를 뛰어넘는 하나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알리 아바시의 <어프렌티스>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 이름, 도널드 트럼프(세바스티안 스탄)를 성공한 사업가나 정치인 개인보다는 성공과 권력의 화신으로 다룬다. 이때 그의 성공은 단순한 물질적, 경제적 성취를 넘어서는 것이다. 배우 제러미 스트롱이 ‘(이 영화는)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 바와 같이, 아바시는 트럼프가 ‘만들어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그 탄생의 본질을 파고들며, 그가 어떻게 성공과 권력의 상징이 됐는지를 조명한다.
“당신 해고야!”(You’re fired!)라는 유행어와 함께 트럼프의 유명세를 높여준 <NBC> TV쇼 <어프렌티스>로부터 제목을 따온 영화답게 이 영화가 초반에 무게를 두는 건 어설픈 ‘견습생(트럼프)’이 아닌, 거침없이 독설을 쏟아내는 ‘멘토(로이 콘)’쪽이다. 악명 높은 변호사 콘(제러미 스트롱)은 트럼프에게 실제 큰 영향을
[비평] 트럼프의 기원, <어프렌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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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개봉한 <리볼버>는 관객 24만명을 동원했다. 평단의 반응 역시 뜨거운 편은 아니다. <씨네21>(1471호)은 이에 대한 “자그마한 항변”으로 ‘<리볼버>는 문제작인가?’라는 기획을 마련했는데, 김영진 평론가의 글을 제외하고는 다소 소극적인 방어처럼 읽힌다. 10월 초, 부일영화상은 <리볼버>에 최우수작품상을 수여했다. 영화제에서의 수상이 언제나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부당하게 평가절하된 <리볼버>의 경우라면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리볼버>가 ‘2024년의 영화’로 앞으로 더 말해지길 희망하며, 이 작품이 안긴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뒤늦게 싣는다.
<리볼버>를 향한 비판 중 일부는 액션은 미약한데 말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장르물로서 대사가 과하게 설명적이라는 것이다. 오승욱 감독도 이 영화가 ‘대화의 영화’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그가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정직한 교환, 마침내 한 사람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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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 마틴은 캐나다 출신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극작가다. <필 굿>에서 그는 마약중독과 트라우마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논바이너리 바이섹슈얼로서 이른바 ‘젠더 문제’를 겪고 있는 메이 마틴 본인으로 등장한다. 시스 여성이자 ‘벽장’인 애인과의 갈등, 불안정 애착 관계를 맺고 있는 ‘포식자’ 남성과의 대면, 정신질환과 중독 성향으로 인한 자기파괴의 경험 등을 다룬 에피소드들이 <필 굿>의 두 시즌을 이룬다. 넷플릭스의 분류에 따르면 <필 굿>은 로맨틱코미디지만, 당연하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 드라마는 단지 그런 보수적인 장르에‘만’ 속하지 않는다. 그보다 <필 굿>은 약물중독과 성적 학대로부터 어쩌다 살아남은 메이 마틴이 어떻게 평범한 연애와 프로페셔널한 직업 세계로의 진입은 물론이고 제때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의 영위에 처참히 실패하는지를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낱낱이 보여주는 일종의 ‘트라우마 이후 스트레스 장애’(PTSD) 코
[이연숙(리타)의 장르의 감정] 그대가 그대의 재앙이라오, <필 굿>과 PTSD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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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전작 <조커>(2019)에서 탄생해 <조커: 폴리 아 되>(2024)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이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요란스럽게 폐기된다. 과연 토드 필립스가 전작에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 진 빚을 변제할 능력을 갖추었을까는 <조커: 폴리 아 되>에서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단 하나의 의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러나 역시 예측을 벗어나지 않으며 토드 필립스는 자신이 창조했던 조커의 신체를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 질식사시키고 장황하게 실패한다. 전작에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표피적으로나마 계승해보고자 애를 썼던 시도를 뒤로한 채, <조커: 폴리 아 되>는 뮤지컬영화를 장르적으로 차용한다. 이를 위해 토드 필립스가 쓴 전략은 레이디 가가라는 동시대의 팝 아이콘을 할리퀸으로 기용한 것이다. ‘오늘은 농담 없나?’라는 교도관들의 반복적인 질문(이것을 하나의 읽어야 할 ‘신호’로 삽입한 부자연스러운 연출도 달갑지 않다)에도 더이
[비평] 만취한 이미지, 숙취의 잔해, <조커: 폴리 아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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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폐막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선 로렌스 아부 함단의 <하늘의 일기>와 일본의 필름 작가 니시카와 도모나리의 <빛, 소음, 연기, 그리고 빛, 소음, 연기>를 같은 섹션에 상영했다. 이스라엘이 침공한 레바논 상공의 긴급한 기록을 담아낸 비디오 에세이와 일본 여름 축제의 불꽃놀이를 촬영한 16mm 핸드메이드 필름 작업은 일견 별다른 접점을 공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영화는 하늘에서 만난다. 시작도 끝도 없고, 깊이를 확신할 수도 없는 비정형의 대기에서 만난다.
관객들은 상영 순서에 따라 <하늘의 일기>를 본 뒤에 <빛, 소음, 연기, 그리고 빛, 소음, 연기>를 감상한다. 상공에 떠오른 전쟁의 흔적을 눈과 귀에 새겨둔 관객들에게 고요한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놀이의 아름다운 광경과 수많은 사람을 환호하게 만드는 폭발음은 단순한 축제의 기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의 일기>에서 베이루트의 하늘이 폭
[비평] 대기의 교향곡, 전장의 미장센 - <하늘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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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머리)에서 작동해야 하는 프로세스가 점점 여기(가슴)에서 발생하고 있어.” 프로그램대로 움직여야 하는 로봇 로즈는 아기 기러기를 키우면서 발생한 오류에 혼란을 느낀다. ‘느낀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겠다. 로즈는 입력된 명령대로 결괏값을 도출해내는 로봇일 뿐이니까. 섬에 불시착한 도우미 로봇(루피타 뇽오)은 실수로 둥지를 덮쳐 어미 기러기를 죽였다. 이후 불행한 사고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아기 기러기를 ‘획득’한 로봇은 기러기를 키우기로 결심한다. 다시, 결심이란 단어도 부적절하다. 무엇이든 임무가 필요했던 로봇은 기러기를 책임지고 키워 무리로 돌려보내는 것을 임무로 설정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억지스럽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기적과 비약은 이 순간에 발생한다. 영화는 로즈가 왜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대신 어떻게 엄마가 되는지 과정을 성실히 따라간다. 마음을 움직이는 건 정답을 향해 닦인 매끈한 길이 아니다. 오히려 미처 해결하지 못한 구멍, 미지와 불투
[비평] 감정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 이성과 감성 사이, 우연처럼 기적의 다리를 놓은 <와일드 로봇>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