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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업이 평론가니까 임상수의 <돈의 맛>을 봤다. 평일 조조 상영을 보는데 다른 관객은 뭘 기대하고 보는 것일까 궁금했다. 주부 관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개 서너 사람씩 동네 주민들끼리 온 것 같았다. 수다로 시끄럽던 객석은 영화가 시작되자 이내 조용해졌다. <돈의 맛>의 첫 장면, 주인공 주영작(김강우)이 윤 회장(백윤식)의 지시로 비밀금고에 들어가 돈뭉치를 담을 때 굉장한 스펙터클이 나오기 때문이다. 영작은 돈다발 더미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카메라가 그의 넋나간 모습에서 뒤로 빠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엄청난 돈다발들이 쌓여있다. 관객이 보고 싶은 스펙터클의 기대치를 처음부터 만족시키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윤 회장은 영작에게 몇 다발 넣어두라고 충고한다. 맛 좀 보라고, 다들 그렇게 한다고 말이다. 영작은 돈다발의 냄새만 맡고 주머니에 넣지는 않는다.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관객은 그저 눈요기만 한다. 우리의 관음증은 이런 천문학적
[신 전영객잔] 돈의 맛도 결국 관념이고 허상일 뿐
<아르마딜로>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 헬만드에 나토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된 덴마크 병사들의 8개월을 촬영해 편집한 기록영화다. <디스커버리 채널> 다큐멘터리로 오인되기 십상인 영화 제목은 덴마크 군인들이 탈레반과 대치해 주둔하는 전진 작전기지 이름에서 나왔는데, 최첨단무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있음에도 적군 소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유사 감금 상태에 처해 있는 나토군의 상황은 궁지에 몰리면 갑피 속에 웅크려드는 동물 아르마딜로의 생태와 비슷하기도 하다. 야누스 메츠 페데르센 감독의 <아르마딜로> 는 이중의 의미에서 전방(前方)의 영화다. 그리 고 이 두 가지 전위성은 두개의 불안을 낳는다. 우선 페데르센 감독과 라스 스크리 촬영기사가 이끄는 팀은 반년간 목숨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 전장에 머물며 영화를 찍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린 페데르센은 당초 30분 길이 방송프로그램으로 기획된 <아르마딜로&g
[신전영객잔] 매끄러운 표면 뒤 다큐멘터리의 근골이
“첫사랑이 원래 잘 안되라고 첫사랑이지, 잘 되면 그게 첫사랑이냐, 마지막 사랑이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아 연애에 관한 한 만물박사로 행세한 <건축학개론>의 재수생 납뜩이는 정작 연애가 아닌 사랑에 관해서는 무지했던 것 같다. 마지막 사랑이라고 해서 다 잘되는 것이 아니다. 첫사랑에 관한 영화 <건축학개론>에 뒤이어 개봉한 마지막 사랑에 관한 영화 <은교>가 그걸 여실히 보여준다. <은교>의 70살 노시인 이적요는 17살 소녀 은교를 사랑하였으나 그 사랑은 잘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이적요는 그 사랑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그를 따랐던 제자 서지우를 죽음에 빠뜨렸으며 결국 은교도 얻지 못했다. <은교>의 마지막 장면을 보건대 은교는 이승에서 꿋꿋하게 자라날 것이지만 이적요는 저승으로 쓸쓸히 돌아갈 것이다. <은교>는 그렇게 늙음과 젊음 혹은 유한적 삶과 육체적 쇠락 또는 실패한 사랑에 관한
[신전영객잔] 깨달음에 관한 슬픈 시가 있네
젊은 배우가 분장을 하고 영화에서 노역을 맡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박해일이 주연한 <은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 영화의 주제는 늙음과 관련이 있고 적어도 한국의 관객은 아무리 발달한 분장기술의 덕을 봤다고 해도 <은교>의 늙은 소설가 이적요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가 처음으로 입을 뗄 때 나는 연기 잘하는 배우 박해일도 고전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건 누가 봐도 젊은 박해일이 늙은 이적요를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영화가 텍스트의 논리를 충실히 따라가는 입장에서 매혹을 준다기보다는 텍스트 바깥의 관객 입장에서 다른 매혹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영화 중반에 늙은 이적요가 환상 속에서 청순하고 풋풋한 소녀 은교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이 나올 때 그것은 늙은 이적요의 환상이라기보다 배우 박해일이 본모습으로 나온다는 인상이 더 강했다. 실제로 함께 영
[신전영객잔] 이 육체성, 혹여 관념적이지는 않은가
1. 인정해야겠다. 한두해 전부터 꾸준히 내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초조함이다. 쫓기고 있다는 이 감각은, 무선 통신망과 스마트폰으로 활성화된 소셜 미디어의 그물에 내 일상이 포섭됐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매일 밤 나는 오늘 보고 들었어야 마땅하나 미처 따라잡지 못한 뉴스와 지식의 양을 가늠하며 삿포로의 눈 치우는 인부처럼 망연자실하다. 때로는 희미한 자책마저 따른다. 어째서 책망까지 하는 걸까? 문제의 정보가 어디 먼 곳이 아닌 지척에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취하라고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좋은 노동자가 못 되어 불안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누리고 바람직하게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애석해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호강스런 스트레스라고 해도 행복하지 않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자진해서 가입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멤버에게 (은연중에) 요구하는 매너는 동시성과 즉각성이다. 뉴스채널 하단에나 흐르는 줄 알았던 속보의 띠가 머릿속에서 24시간 돌아가고
[신 전영객잔] ‘피로사회’로부터의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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