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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유럽의 시각을 결정지은 두 가지 질서는 영화와 강제수용소에 있다. 영화가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필름 카메라를 매개로 삼는 특권적인 재현 체계라면, 절멸의 수용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기록을 은폐하고 소각한 체계적 기관이다. 한쪽에선 이미지를 구현하고, 다른 한쪽에선 이미지를 말살한다. 영화가 역사를 창조한다면, 강제수용소는 역사에 구멍을 낸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체계는 그러나 유사성을 공유하면서 대립한다. 영화와 강제수용소는 바깥에 있던 세계를 내부로 가져와 관측하고 분류하고 조정하는 절차로 형성된다.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행렬과 열차의 도착을 상징적 기원으로 삼는 영화와 수많은 희생자를 열차로 실어 나르며 노역과 학살을 강제한 강제수용소는 제국주의의 열망이 깃든 발명품이자 세계를 포획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장 뤽 고다르가 지적한 것처럼 영화는 강제수용소의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표상과 기록장치로서의 영화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여겨진다. 수용소 내부의 이
[비평] 지루함, 따분함, 무의미함, <존 오브 인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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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 이후 이미지를 과도하게 전시하는 영화들이 대거 제작되었다. 마티아스 스톡(Matthias Stork)은 자신의 비디오 에세이를 통해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중심으로 나타난 새로운 경향을 혼돈의 영화(chaos cinema)라고 불렀다. 그는 다양한 기교를 사용하여 다량의 이미지를 빠르게 보여주는 영화들이 할리우드가 하나의 법칙처럼 지켜온 시공간의 연속성을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 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혼돈의 영화를 엽총의 미학(shotgun aesthetic)을 앞세워 전통적인 할리우드의 규범을 파괴하는 불온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이 불온한 반란의 선봉에 선 감독 중 한명으로 마이클 베이가 있다. 그가 연출한 <트랜스포머>(2007)와 그 작품에서 이어지는 시리즈는 외계에서 온 로봇 생명체들이 육해공을 넘나들면서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정신없이 움직이는 카메라, 다양한 프레임과 앵글, 평균 숏 길이의 축소 등을 활용해서 그렸다. 마이클 베이가 추구한 엽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트랜스포머의 변신은 유해하지 않습니다, 21세기 할리우드에 나타난 혼돈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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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볼 수 있어도 향기는 맡을 수 없다. 피부에 닿는 감촉과 존재의 무게 역시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시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뇌로 전달해 인지와 수용을 거쳐 감정과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지각 과정이다. 움직이는 영상과 음향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받아들일 때 그래서 가장 먼저 강조되는 감각 체계는 시각과 청각이다. 영화에서 타인의 꿈이 펼쳐지거나 정신분열을 예견하는 이명의 사운드는 들려올 수 있어도 냄새나 감촉은 후각과 촉각의 감각경험으로 전달될 수 없다. 오늘날 영화적 체험을 보다 많이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까. 스크린X와 아이맥스에서 강조하는 압도적인 시각 스케일이나 4D 상영처럼 눈으로 보는 동시에 신체의 다른 외부감각을 자극하려는 ‘체험’적 관람은 영화의 선천적 결핍을 메워보려는 스크린 바깥의 기술적 시도다. 시각과 청각 외 감각의 증폭과 확장으로 향하는 영화(기술)의 열망은 인간의 오감을 모두 아우른 뒤에야 멈출 수 있는 것일까. <프렌치 수프>와
[비평] 부재하는 것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프렌치 수프>와 <원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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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랜드>를 어떤 계보나 맥락에 놓고 봐야 할까. 이런 의문이 들었던 이유는 영화가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본 듯한 이미지가 넘실댐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거의 영화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좀 심하게 들린다면 적어도 한국영화처럼 보이지 않았다. 배우 탕웨이의 에피소드에서 중국어와 영어, 한국어가 뒤섞이는 상황이나 영화의 배경이 다소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영향도 물론 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영화가 주는 이질감은 무엇일까. 당혹스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김태용 감독의 전작 <만추>(2010)를 떠올려보자. <만추>의 배경인 시애틀은 안개의 모티프를 생성하기 위해 소환된 장소다.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안개처럼, 이 장소 속 두 주인공 역시 그렇다. 안개는 제삼의 캐릭터이자 감정을 고취하는 적절한 조정자였다. <원더랜드>에 이르러 영화의 장소는 그보다 추상적으로 인식된다. 김태용 감독은 전작의 일시적 장소이자 플랫폼으로서의
[비평] 빈곤한 공감의 장소와 위기의 한국영화, <원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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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8개 부문을 수상했고, 오스카 시각효과상까지 거머쥔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결국 국내 극장에 걸리지 못했다. 물론 이는 괴수물이 꾸준히 국내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몬스터버스의 다섯 번째 영화 <고질라X콩: 뉴 엠파이어>는 북미에서의 성공과 달리 국내에선 51만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앞선 세편의 몬스터버스 고질라 영화도 100만 관객 동원에 실패했다. 2016년 개봉 당시 일본 흥행 2위를 기록한 <신 고질라>는 국내 관객 7592명이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았다. 봉준호의 <괴물>이나 심형래의 <디 워>, 혹은 피터 잭슨의 <킹콩>처럼 흥행에 성공한 괴수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흥행이 하나의 현상처럼 여겨졌음을, 나아가 <고질라> 시리즈와 같은 전통적인 ‘거대 괴수물’의 흥행이 없다시피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
[비평] ‘고지라’의 타임 패러독스, <고질라 마이너스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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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는 필름으로 촬영됐다. 영화용 디지털카메라는 최근 6K를 넘어서 12K의 사양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디지털 시대에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왜 필름으로 영화를 만든 것일까. 이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 눈길을 끈 것은 영화 프레임의 테두리였다. 이를 인지한 순간부터 이전과는 다른 영화 보기를 체험하게 된다. <키메라>는 프레임 테두리 위에 앉은 먼지의 움직임을 봐야 하는 영화다. 이 먼지는 필름 게이트에 앉은 먼지들의 그림자가 필름 위에 남긴 흔적들이다. 촬영 당시 그 공간과 시간 안에 있었던, 눈으로 보이는 가장 작은 존재의 흔적들이다.
영화의 프레임 테두리를 중점으로 보면 재미난 것들이 많이 보인다. 카메라의 움직임, 배우들의 동선, 인물들의 배치, 컷과 컷 사이 간격, 몽타주의 방향성, 프레임 안 여백의 감흥, 주인공의 감정뿐만 아니라 말하지 않는 사물들의 감정, 외화면의 이미지와 사운드, 디지털 상영에서 보편화된 블랙 마스킹 위의 이미
[박홍열의 촬영 미학: 물질로 영화 읽기] <키메라>, 카메라의 고고학, 필름 게이트와 화면비로 보는 존재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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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에 오르기
시미즈 히로시의 1948년작 <벌집의 아이들>에서 주요 인물은 떼지어 거리를 떠도는 전쟁고아들이다. 헐벗은 나날에도 아이들은 나름의 방식을 터득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데, 유독 한 소년의 연약함이 눈에 밟힌다. 바다에서 엄마를 잃은 후, 바다만 보면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요시보, 그는 다른 아이들의 활기와 속도에 언제나 뒤처져 결핍감과 슬픔을 호소하는 울보다. 움막에서 시름시름 앓던 요시보는 무리에서도 가장 어른스러워 보이던 아이가 찾아오자, 애걸한다. 산에 가면 바다가 보일 거야, 바다를 보면 병이 나을 거야, 나를 산에 데려가 줘, 부탁이야, 나를 업고 가줘. 둘의 눈이 프레임 바깥을 향한 지 얼마지 않아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업고 정말로 산을 오르는 광경이 펼쳐진다.
가여운 두 소년의 무리한 여정에 바다는 금세 화답하리라. 이 숏만 지나면 소년의 눈에 바다가 담기리라. 그러나 기대는 이내 부서진다. 무려 5분에 걸쳐 숏 수가 점점 불어나는 중에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영화’로운 리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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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참사가 일어난다. 인간은 반응하고 대응한다. 여기엔 단계가 있다. 우선 논리적 사고 이전 단계에 우리에겐 충격과 공포, 불안, 분노, 공격성 발현, 또는 회피, 남 탓 등의 반응이 나타난다. 당사자가 아니어도 해당 사회 구성원은 유사한 작용 과정을 겪는다. 편도체를 중심으로 한 교감신경계의 리액션이다. 그다음 우리는 사태 파악, 원인 진단, 진상규명 등을 시도한다. 이 단계는 앞 단계와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선후가 뒤섞일 때도 잦다. 이때 누군가는 피해자를 염려하고 누군가는 책임자를 단죄하려 한다. 이후 사태 파악 다음 단계에서 소수의 어떤 이들은 참사에서 출발해 인간·사회·세계의 본질에 다가서려 애쓴다. 예컨대 조현철 감독은 <너와 나>(2023)를 통해 애도의 방식을 구현하는 동시에 직선으로만 인식하기 쉬운 이 세계의 시간을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영화가 해낸 일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무력하기만 한 우리의 현재를 마주 보게 함으로써 희생자
[비평] 홀로코스트 영화 제3 국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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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도시의 발생 이전에 살았던 이들이 경험했을 소리의 세계를 상상해본다. 기계의 소음보다 자연의 음향이 친숙했을 세계. 거리를 거닐면 물론 그때도 사람들은 떠들고 장난치고 싸웠겠지만, 철도가 발명되고 공장이 세워지면서 도시가 갖게 된 음역과는 차원이 달랐을 터다. 이 추측은 활자와 사진을 통해 짐작할 따름이라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대자연이라는 원형으로 섣불리 감응하고 낭만화한다는 한계가 있겠다. 그럼에도 “귀가 먹먹해지는 시대”(데이비드 헨디)의 도입에서, 세상에 없던 것의 소리가 불현듯 우리를 침범하던 순간 인류가 느꼈을 당혹스러움에는 의심이 들지 않는다.
여기에는 당연히 증기기관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다. 영화의 시원적 피사체라 부를 만한 열차는 수많은 (서부)영화에서 반복되어온 이미지다. 우리는 열차의 거친 운동, 위아래로 혹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액션’(action)의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칙칙폭폭, 덜컹덜컹, 이 격렬한 공간이
[비평] 전기 바깥의 전기, <차이콥스키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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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이하 <새로운 시대>)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모두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다. “교만의 대가로 몰락”(<새로운 시대>)하거나 또는 “인류가 스스로를 파괴”(<퓨리오사>)한 결과로 도래한 또 다른 세계에 남겨진 자들에 대한 영화. 일주일 사이로 서로 연관된 두편의 영화를 본 후 머릿속에 남겨진 몇몇 이미지들이 있었다. 디지털이 덧입혀지지 않은 인간의 몸과 퓨리오사의 기계 팔.
연약한 인간의 몸에 대하여
그 어떤 인물 형상과 액션도 디지털로 그려낼 수 있는 시대에 그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의 몸은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 이 질문의 시작은 <새로운 시대>의 한 장면에서 비롯됐다. 내게 <새로운 시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말과 지성을 잃은 인간 무리(또는 에코들)가 냇가에서 유인원에
[비평] 연약한 인간의 몸과 기계 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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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운동의 예술이다. 영화는 운동을 재현하는 권능과 운동의 중단을 경험하게 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영화 속 시간은 생략되고, 늘어나며, 분기와 도약 속에 되돌아온다. 말하자면 영화는 시간 경험의 촉매를 제공한다. 어떤 작품들은 역사적 시간이나 시간의 지각을 탐구하거나 표현하기 위해 때때로 정지상태의 달인인 조각을 향해 렌즈를 겨눈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대작 <레오파드>(1963)의 조각도 그중 하나다. <레오파드>는 가문의 내부, 개인의 내면 안에서부터 쇠락하는 세계 혹은 시대를 묘사한다. 비스콘티의 카메라는 우선 대저택의 영지 안으로 들어가고 이어서 가족 미사가 열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원작 소설에서 영지는 무성하게 자라, 뒤엉키고 썩어가는 식물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비스콘티가 찍은 오프닝에서 영지 입구에는 대저택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여러 개의 토르소 조각상이 부산한 혁명의 기운과 건조한 바람 아래 요동 없이 도열해 있다. 단단한 돌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조각과 함께 찍기 - 비스콘티, 로셀리니, 고다르의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