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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이야기의 삶과 죽음, <룸 넥스트 도어>

<룸 넥스트 도어>를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 세계의 예외 목록에 둔다면, 그 이유는 단지 그가 만든 최초의 영어 장편영화라는 사실에 국한되지 않는다. 비교적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편이긴 하나 위태로운 현재의 몸은 최근 알모도바르 영화의 본질에 가까우니, 달라진 건 플래시백의 지위다.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현재의 몸은 마비되거나 죽음에 가까워지더라도 비밀을 담은 회상 시퀀스의 강렬한 작용을 통해 언제라도 욕망하는 육체로 소생할 수 있었다. 플래시백은 현재 이미지와 대등하거나 종종 역전된 형태로 현재를 잠식하며 이를 가능케 했다. 반면 <룸 넥스트 도어>의 플래시백은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본래의 위치에 고정된다. 10대 연인의 육체적 사랑도, 전쟁 현장에서 은밀하게 암시되는 관계도 죽어가는 현재의 몸 앞에선 무력하다. 그렇다면 욕망하는 육체의 현현으로서의 플래시백이 사그라진 자리에 무엇이 있는가. 에두를 필요 없이, 거기에는 말이나 대사 차원을 넘어선 대화가 있다. 틸다 스윈턴줄리앤 무어가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은 ‘죽음’을 둘러싼 대화 주제를 초과한다. 배우의 존재로 영화의 뼈대를 삼고, 두 사람이 나누는 끝없는 대화로 살을 붙여 육체를 구조하는 것이 알모도바르가 스스로에게 부가한 새로운 과제다.

죽음과 이야기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어쩌면 하나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잉그리드(줄리앤 무어)는 출간 기념 사인회에 나타난 친구 스텔라로부터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마사(틸다 스윈턴)의 암 투병 소식을 전해 듣는다. 입원 중인 마사는 병실에 입원한 환자로서의 모든 표식을 거부한 채, 붉은 티셔츠에 진한 청색 바지의 평상복 차림으로 1인실 침대에 누워 있다. 그의 몸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의료진의 면담이나 엑스레이 촬영 사진과 같은 사실적 묘사의 보조 없이 오직 마사의 말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면역 치료 도중 다른 장기로 암이 전이됐음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한 이도 마사 자신이다. 마사가 곧 죽음을 맞을 거라는 이야기가 자신의 말로만 전해진다는 사실이 진위를 의심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 순간 보여준 틸다 스윈턴의 연기는 의심할 나위 없이 진실되다. 그런데도 말을 통해 전해지는 대화의 구조가 필연적으로 믿음의 문제와 결부됨은 중요하다. 화자의 진실은 청자의 믿음을 요구하며, 때로는 청자의 믿음이 화자의 진실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마사만큼 듣는 잉그리드 역시 이야기에 개입하고 관여한다.

감독의 전작 <페인 앤 글로리>에서 신체 투과 영상이나 몸의 표면에 남은 긴 흉터 자국을 훑으며 신체를 둘러싼 고통이 비스듬히 가시화된 것과는 달리, <룸 넥스트 도어>에서 죽음은 이야기 속에서만 머문다. 그 결과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다는 대상의 특성이 강조된다. 대신 색을 중심으로 한 미술적 효과는 시각과 접촉의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강렬한 원색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으리라. (이렇게 쓰고 보니 알모도바르의 흑백영화가 무척 궁금하다.) 색채는 단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영속성을 표시하거나 무채색으로 인식되곤 하는 죽음을 전환적으로 사고하려는 목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강렬한 원색의 감각은 무엇보다 배우들의 몸을 휘감은 의상을 통해 체감된다. 의상은 캐릭터의 개성이나 계급 또는 직업의 특성, 시대적인 고증을 위한 도구가 아닌 알모도바르 영화 세계의 주된 구성물이다. 여기에 더해 <룸 넥스트 도어>의 의복은 유난히 접촉을 제한하는 영화에서 몸 가까이에 놓인 접촉물로서 기능한다.

영화가 접촉을 감각하게 만드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물들이 가까이 있지만, 접촉하지 않을 때다. 이를테면 잉그리드가 체육관 코치에게 친구의 사정을 털어놓았을 때 이야기를 들은 코치는 안아주고 싶지만, 규정상 회원과 접촉이 금지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다정한 말로서의 접촉을 보여준다. 조금 더 직접적인 접촉은 마사와 잉그리드 사이에서 벌어진다. 어느 날 아침 잉그리드는 등을 돌린 채 옆으로 누운 마사의 옆에 같은 자세로 눕는다. 카메라를 마주한 두 얼굴이 겹친 모양새는 두 사람의 평행한 관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이야기 아래에 잠복한 비밀을 암시하며, 둘 사이에 행해지는 접촉을 표시한다.

마사와 잉그리드는 과거에 친밀한 사이였으나 최근에는 연락이 뜸해진, 적당히 가깝고도 먼 사이라고 규정된다. 애인을 순차적으로 공유한 적이 있다는 특이점 외에는 평범한 친구 사이로 묘사되지만, 대화하지 않을 때의 두 사람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과잉으로 느껴질 정도로 대담하다. 잉그리드가 마사의 병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던 마사는 노크 소리에 번쩍 눈뜬다. 부감으로 클로즈업된 마사의 어딘가 확신과 기대에 찬 표정은 마치 잉그리드의 도착을 미리 알고 기다린 것 같다. 그간 틸다 스윈턴이 맡아온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캐릭터 중 마사는 현실적인 캐릭터에 속할 테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비인간적 아우라가 여전히 작동한다. 가장 현실적이고도 가장 불가해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배우의 육신을 통해 현현한다.

기다림의 위치 교환

죽음을 실행할 동안 옆방에 있어 달라고 요청한 마사의 입장에서 ‘옆방에 있음’은 두려운 순간에 용기를 주는 존재가 가까이에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 잉그리드는 마사의 죽음이 지연될수록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입장에 놓인다. 원래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에 놓인 건 마사였기에, 죽음을 사이에 두고 마사와 잉그리드의 입장이 역전되었음을 의미한다. 마사가 끔찍하게 여긴 건 언제가 될지 모를 죽음에의 무력한 기다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사가 죽기로 결심하면서 기다림의 대상은 이제 실행의 대상으로 뒤바뀐다. 남은 기다림의 몫은 잉그리드에게로 외주화된다. 잉그리드는 기다림의 연루자만이 아니라, 실행의 연루자이기도 하다. 마사가 안락사를 실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물건을 집에 두고 오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마사가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린 약물을 잉그리드가 먼저 손에 넣으면서 그 역시 적극적인 연루자임을 확인시킨다.

마사가 죽음의 실행을 표시하는 규칙을 정하면서 잉그리드의 기다림 역시 하나의 구체적인 행위에 가까워진다. 열린 문은 실행 이전 곧 생존이며, 닫힌 문은 실행 이후 즉 죽음이기에 아랫방에 머물게 된 잉그리드는 매일 아침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 고개를 들어 문의 개폐 여부를 확인한다. 계단을 오르다 멈추는 동작과 위를 쳐다보는 얼굴, 열리고 닫힌 빨간 문의 존재만으로 서스펜스가 유발된다. 어느 날 닫힌 문을 본 잉그리드는 마사의 죽음을 예감하며, 구토와 호흡곤란을 동반한 패닉상태에 빠진다. 그런 잉그리드 뒤로 마사의 모습이 통유리 창문 안쪽에서 유령처럼 나타난다. 그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표시하는 동시에 죽은 마사의 영혼이 자신의 죽음 이후를 보는 것 같다. 문이 닫힌 이유가 열어둔 창에서 분 바람 때문이라는 설명이 덧붙지만, 실은 잉그리드를 위한 예행연습, 더 정확하게는 죽음 이후를 위한 마사 자신의 예행연습에 가까워 보인다.

죽음을 기다리는 주체가 마사에게서 잉그리드에게로 옮겨갔다 해도 궁극적인 기다림은 마사에게 속한다. 다만 이제 그가 기다리는 대상은 죽음이 아니라, 마사가 죽은 자신을 발견할 순간이다. 마사가 잉그리드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는 마사의 기다림을 표시한다. 그의 방 테이블에 놓인 편지는 마사의 죽은 육체보다 먼저 잉그리드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도착한다. 잉그리드에게 보내는 편지 옆에는 잉그리드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경찰에 남긴 편지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한쪽에는 진실이, 다른 한쪽에는 거짓이 담겼다. 아니, 두개의 편지는 두개의 이야기일 뿐이다. 마사의 이야기는 잉그리드를 통해 완수될 시간을 기다리며 거기 놓여 있다.

잉그리드는 이야기할 기회를 두번 얻는다. 경찰서 취조실에서 잉그리드는 이야기하기에 실패한다. 조사한 시나리오에 따라 이미 결말을 정해놓은 상대는 마사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는 잉그리드의 말을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다. 취조실에서의 상황은 이야기하기에 있어 청자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방증한다. 이야기의 진위를 판정하려들 때, 이야기는 죽는다. 반면 마사와 똑같은 얼굴을 한 채 나타난 미셸은 흡사 현장 답사를 위해 파견된 형사처럼 긴장을 불러오지만, 결국 잉그리드의 이야기에 마음을 연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새로운 청자를 통해 이야기는 다시 작동할 가능성을 드러낸다.

눈이 내린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과도 같은 편지(이야기)가 생을 이어갈 살아 있는 육체를 취할 때, 죽은 몸은 이야기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미지 속으로 숨는다. 노란색 바지 정장을 차려입고 짙은 화장을 한 마사가 연두색 소파형 테라스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누워 있다. 부감으로 잡은 바스트숏 안에서 눈을 감은 채 정지한 마사는 배경이 된 의자와 분리된 채 페이드아웃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마사는 죽은 것이 아니라 의자의 짙은 연두색 패브릭 속으로 녹아들어 이미지의 일부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마사의 죽음이 전면화된 유일한 순간은 아니다. 서사의 생명력은 결말로서의 죽음을 지연하는 데 있다면, 이미지의 생명력은 죽음을 반복하는 데 있다. 마사가 잉그리드에게 전이 사실을 알리는 시퀀스의 마지막은 마사가 약물을 투여받는 상황으로 끝난다. 이때 부감으로 잡힌 마사의 얼굴은 화이트아웃으로 사라진다. 마치 마사의 얼굴 위로 하얀 천이 덮이는 순간을 상상케 하는, 죽음을 예고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마사는 잠에서 깨어나 제임스 조이스 단편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키는 분홍색 눈이 내리는 풍경을 마주한다. 내리는 눈을 보며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읊는 시퀀스는 마사의 얼굴에서 흑백으로 프리즈프레임되었다가 암전된다. 정지한 얼굴은 영정 사진을 연상시키며, 앞서 지연된 죽음을 다시 작동시킨다. 그러나 마사는 죽지 않고 살아난다. 다만 이 장면 이후 마사의 모습은 마치 죽음에서 새로 태어나기라도 한 듯 낯선 모습이다. 검은 코트 차림에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마사와 함께 영화의 장르는 범죄 누아르로 이동한다. 죽음이 도착하기 전에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마사의 고백이 시한부판정을 받은 이의 무력한 떠밀림이 아니라, 은밀하고 짜릿한 범죄 모의라고 착각할 정도다.

미셸 역시 장르적 서스펜스를 가동하는 인물이다. 마사와 잉그리드의 대화 속 이야기로만 존재했던 미셸은 마사가 사라진 뒤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틸다 스윈턴이 1인2역을 맡은 미셸은 당연하게도 마사와 동일한 사람처럼 보인다. 미셸이 플래시백에 등장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놀라움을 위해서일 것이다. 미셸을 통해 마사는 비로소 부활한 것 같다. 하지만 서두에 밝혔듯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 속 플래시백의 기능이 전과 달리 축소되었음을 염두에 둘 때, 단지 극적 효과를 위해서라고 단언할 수 없다. 미셸뿐 아니라 잉그리드와 데이미언 역시 플래시백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나는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 플래시백이 상대적으로 약화한 자리에, 두 주인공이 나누는 현재의 대화가 들어섰음을 밝힌 바 있다. 대화는 결국 각자의 자리에 나란히 누워,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마지막 이미지에 도착한다. 이 불가해한 이미지를 아직 재현되지 않은 미래를 초대하는 이미지로서 플래시포워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리는 눈은 일종의 하얀 장막으로, 무언가를 투사할 수 있는 스크린이기도 하다. 알모도바르는 흩날리는 스크린 위에 몇 가지 색을 바꾸어 비추며 신호를 보낸다. 마사와 잉그리드가 병실에서 대화를 나눌 때 불현듯 내린 눈은 세계가 이들의 이야기에 조응함을 드러낸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시의 풍경 위에도, 곧게 뻗은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고즈넉한 교외의 숲 위로도 눈이 내린다. ‘죽은 자와 산 자 위로 내리는 눈’을 노래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소설 마지막 구절은 마사에게서 잉그리드에게로, 잉그리드에게서 다시 미셸에게로 옮겨지며 구전된다. 소설에서 따왔으나 시처럼 변주되어 읊어지는 문장들은 완전한 이야기를 상징하기보다는 아직 이야기되지 못한 미래의 씨앗을 품고 있다. 흩날리는 세계의 눈은 이야기의 부활을 꿈꾸며, 한 인물 속에서 살고 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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