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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에서 끔찍한 노인 혐오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플랜 75> 속 세상은 평화롭다. 특정 세대를 향한 증오가 살인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발현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계속하며 각자의 미래를 계획 중이다. 영화의 첫 번째 주인공인 미치(바이쇼 지에코)는 건강검진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두 번째 주인공인 청년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는 친절한 태도를 유지한 채 노인들을 응대한다. 세 번째 주인공인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 역시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노동을 멈추지 않는다. <플랜 75>의 전반부는 이 이상한 지속 때문에 서늘하다. 분명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이에 관해 말하지 않아서. 말하자면 사람들 모두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눈을 뜬 기분이 드는 것이 <플랜 75>의 전반부의 인상이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가 오프닝에서 제공하는 또 하나의 끔찍함은, 이 나라가
[비평] 영화가 고약한 냄새를 풍길 때, <플랜 75>와 <오키쿠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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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를 향한 사랑의 시도
관음과 절시는 영화에서 대상을 훔쳐보는 행위, 더 나아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을 말할 때 소환되곤 한다. 6부작 시리즈 드라마 <LTNS>를 말하려는데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함께 떠올랐다. 영화에서 청년 토멕은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여인 마그다를 매일 밤 망원경으로 지켜본다. <LTNS>의 우진(이솜)과 사무엘(안재홍) 또한 불륜 남녀를 미행하고 잠복하며 대상을 몰래 지켜본다. 이들의 훔쳐보기에 프로이트적 결론을 동원하기보다 도시(盜視) 행위 그 자체를 돌아보면 보이는 것이 있다. 토멕의 훔쳐보기의 끝에는 마그다를 향한 순애가 있고, 우진과 사무엘의 훔쳐보기에는 영화를 기억하고 떠올리게 만드는 짙은 향수가 배어 있다. 증거 수집을 위해 우진과 사무엘이 끌어오는 방법 중에 어떤 단서는 분명하게, 또 어떤 단서는 희미하게 이것이 바로 영화에서 태어나 영화를 회고하는 장면임을 지시한다.
[비평] 시네마를 향한 사랑의 시도, 'LT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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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항: 이 영화는 인물의 깊은 슬픔을 보존·전달하기 위해 유머를 충전해 포장하였음.
노스탤지어의 시대다. 사람들은 현재에 충실하기 어려울 때 종종 과거를 떠올린다. 자존감 높은 자는 그저 오늘 할 일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후회를 한다. 비전이 있는 사람의 가설은 지금을 설계하는 데 쓰이지만 미래가 불안한 사람의 가정법은 지난날들을 헤맨다. 그때 그 주식을 샀더라면,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 사회의 자존감이 낮아질 때, 공동체가 비전을 찾아내지 못할 때, 구성원들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 다수 대중을 대상으로 삼는 영화·드라마는 그래서 자주 과거로 향한다. 저때 저 쿠데타 세력을 처단했어야 하는 건데, 저때 저 대통령이 재평가를 받았어야 하는 건데…. 과거시제 가정법은 간혹 성찰적이어서 의미 있지만, 대개는 선별적인 탓에 일시적 위안이나 선동에 머물고 만다. 수많은 웹툰과 TV시리즈의 주인공들이 초자연적으로 시간을 되돌리거나 신분이
[비평] 향수의 시대에 찾아온 현재의 영화, <바튼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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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사회. 정제된 표현으로 감쌌지만 결국 ‘늙었다’는 속삭임이다. 지난 몇년간 우리는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내는 데 몰두했다. 늙음은 자주 수술대에 오르듯 공론의 장에 올라 이리저리 들춰지고 해부된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노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 적 있었나? 적어도 나는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활자와 숫자를 넘어, 뜨거운 숨을 내쉬는 이들에 대한 응시가 필요한 때. 이 시기에 노년의 마지막을 다룬 두편의 영화, <소풍>과 <플랜 75>가 우리를 찾아온 것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소재는 비슷하지만, 두 작품은 서로 닮은 점이 없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은밀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누워 있는 노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꿀 같은 잠이나 편안한 휴식은 아니다. 그들은 몸이 망가져서, 혹은 일어나지 않기로 결심해서 누웠다. 이 상태는 죽음을 향해 가는 길목에 있다. 그래서 누운 노인의 형상은 죽음에 대한 인
[비평] 눕고 일어나는 생의 행위, <플랜 75>와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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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웹소설이 원작인 드라마가 늘어날수록 ‘드라마 덕후’는 바빠진다. 예전에는 드라마만 보면 되었지만, 이제는 ‘쿠키’를 굽고, 코인을 구매해 원작을 정주행한 후 드라마를 영접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드라마를 먼저 보고 원작을 순례할 때도 있다). 드라마와 원작을 함께 보는 건 ‘제3의 눈’을 가지게 된 것과 같다고나 할까? 하나의 작품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어서 유익할 때가 많다. 물론 ‘선악과’를 먹어버린 것처럼 ‘차라리 원작을 안 봤더라면 재미있게 봤을 텐데’라는 후회가 몰려올 때도 있다.
웹툰의 질문, 드라마의 질문
시청자뿐 아니라 창작자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의 눈’으로 원작과 비교 분석하는 깐깐한 원작 팬들을 설득시켜야 함과 동시에 드라마 팬들도 만족시켜야 하기에 마치 저글링하듯 드라마를 제작하지 않을까? 원작이 소위 ‘레전드’ 반열에 오른 유명한 작품일수록 그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넷플릭스 시리즈 <살인자ㅇ난
[비평] 복잡하고 난감한 질문은 어디로, <살인자ㅇ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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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게 뭐야?” 블랙아웃의 화면 위로 던져진 첫 질문이다. 산드라(잔드라 휠러)의 입을 빌려 쥐스틴 트리에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 성공한 한 여성의 남편이 의문의 추락사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이 사건은 관객을 유혹하는 미끼일 뿐이다. 미끼의 떡밥으로 배를 채울 수 없듯,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추락의 해부>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이 궁금증을 관객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도록 한다는 데 있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각자의 서사를 완성할 수 있다. 결국 <추락의 해부>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빈틈, 진실의 자리
작가 산드라와 그 작품 세계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인 학생 조에(카미유 루더퍼드)의 인터뷰는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이 음악을 크게 틀면서 중단된다. 하지만 사뮈엘은 (그것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죽음을 통해 자신이 중단시킨 인터뷰를 지속시킨다. 그르노블에서 다시 만나 인터
[비평] 사실의 빈틈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것들, <추락의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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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센과 서사가 명백히 지시적인 영화가 지닌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클럽 제로>에 대해 할 말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말들은 이 영화가 특별한 감응을 불러일으키기에 파생되기보다는 영화가 요청하고 있는 사회적 시각 때문이다. 예시카 하우스너는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약점을 지적하는 데 관심이 있다”라고 밝히며, “<클럽 제로>는 영양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곧 너무 지나쳐서 학생들의 생각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바뀌며 급진화와 조작”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실로 영화는 국적이 불분명한 엘리트 학교에 새로 부임한 영양 교사 노백(미아 바시코프스카)이 새로운 식사법을 가르치는 수업을 통해 아이들의 합리적인 생각을 점차 급진적으로 바꾸어가는 데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엄밀하게 다루며 그에 따른 결과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 결과란 아이들이 금식을 하는 ‘클럽 제로’의 회원이 되어 노백이 이끄는 그림 속 저편의 낙원을 향해 가고
[비평] 충격의 두께, <클럽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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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해부>를 비평하는 방법은 간단해 보인다. 영화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사뮈엘의 돌연사를 두고 아내인 산드라의 연루 여부를 파헤치는 법정 공방을 다룬다. 그런데 종막에 이르기까지 진상을 밝히지 않고 여러 인물의 변론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니 진실이란 모름지기 모호한 것이며, 이 영화는 인간의 주관성이 얼마나 연약한지 보여주는 영화라고 요약하면 깔끔한 정리가 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이 작품의 전부인가.
김철홍 평론가는 <씨네21> 20자평(1442호 참조)에서 인간 주관의 불완전성을 까발리는 기획이 이제 진부하게 느껴진다고 썼다. 그러게 말이다. 현실의 복수성을 지목하며 주관적 인식의 한계를 지목하는 전략은 이제 꽤 익숙한 화법이 됐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그 익숙함을 근거로 <추락의 해부>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추락의 해부>에는 쥐스틴 트리에가 법정 공방을 통해 최종적 진실에 도달하거나, 반대로 그 도달에 실패
[비평] <추락의 해부>를 감싸고 있는 피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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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를 벗어나 유럽으로 망명하려는 자라는 자동차에 타기 직전에 걸음을 멈추고 가발을 벗는다. 그녀는 남편 박티아르에게 전달받은 여권을 들고 멈춰 선다. 그리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모니터 스크린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는 연출자 자파르 파나히에게 외친다. “우리 삶을 영화로 만든다고 했죠?” 파나히의 대답. “맞아요.” 자라의 질문. “그런데 이건 뭐죠?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니잖아요.” 그녀는 박티아르의 여권이 유효하지 않은 위조 여권이라고 밝힌다. “모두 가짜잖아요. 우리가 가짜가 됐다고요.” 자라는 지금 연출자가 ‘해피 엔딩’을 위해 배우들의 삶을 가짜로 조작했다고 항의한다. 이 장면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노 베어스>의 후반부에 나오는 한 장면, 혹은 자파르 파나히가 원격으로 연출하는 영화 속 또 다른 영화의 장면, 동시에 박티아르와 자라가 처한 현실을 소재로 삼은 허구적 영화의 일부분, 그러나 그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않은 ‘가짜’ 장면
[비평] 영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노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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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환기 감독의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은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진부하다는 걸 일깨운다. 김대중을 존경하든, 김대중을 증오하든 오랫동안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입장은 선입견으로 단단해져 불변의 것이 되었다. 어느 편이건 초기에 형성된 관점은 새롭게 다듬어지지 않고 굳어졌다. 존경도, 증오도 다 진부하다. <길위에 김대중>은 다큐멘터리의 근본을 지킴으로써 우리를 진부함에서 구해낸다. 그에 관한 팩트에서, 팩트의 구성에서 차곡차곡 그의 일대기를 역사에 포개놓는다. 팩트의 구성 다음엔 주석과 해석이 남는다. 그 단계에서 굳은 관점을 해체하고 새롭게 보기 위해 우리는 다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길위에 김대중>은 그 나침반이다.
민주주의자로서의 일관된 자기 정체성
김대중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연대기순으로 전개하는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를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 기초적인 전기적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그에 관
[비평] 부재했지만 존재할 가치를 위해, <길위에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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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시>는 디즈니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100’이라는 숫자는 월트 디즈니의 탄생 100주년은 아니다(그는 1901년에 태어났다). 디즈니의 첫 애니메이션 커리어 100주년도 아니다(1919년에 처음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다). 그가 세운 첫 스튜디오도 아니다(‘래프 오 그램’(Laugh-O-Gram)이라는 스튜디오를 1921년에 만들었다). 미키마우스가 탄생한 100주년도 아니다(미키마우스는 1928년에 세상에 나왔다). 그렇다고 첫 장편애니메이션의 100주년도 아니다(<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1937년에 개봉했다). 그러니까 ‘디즈니’라는 말로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가 여럿 있는데, 인간 월트 디즈니와 그의 분신인 미키마우스,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100주년의 당사자가 아니다. 100주년은 ‘월트디즈니 컴퍼니’ 설립 100주년에 해당한다(처음부터 그 이름은 아니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는 ‘디즈니 브러더스 스튜디오’였고, 19
[비평] 디즈니가 디즈니했습니다만?, <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