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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적 차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이상 구경거리가 되지 못하는 미래가 바로 <미래의 범죄들>이 그리는 시대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는 보디 호러 장르의 <비디오드롬>에서 <엑시스텐즈>에 이르기까지 신체와 기계라는 물질과 그를 통해 보는 환각과 꿈이라는 비물질을 탐구해왔다. 비물질인 환각 이미지마저도 신경전달물질의 이상 체계로 인해 망막에 맺히는 영상이라고 본 크로넌버그에게 있어 정신은 내부와 외부로 나눌 수 없기에 그의 세계에서 내면은 인체의 내부, 장기가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또 <미래의 범죄들>에서 예술로 규정하는 해부와 그 행위자는 <네이키드 런치>의 괴물 형상을 한 타이프라이터로 글을 쓰는 작가 윌리엄과 문학적 행위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네이키드 런치> 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 윌리엄은 아넥시아의 경계에 이르러 작가임을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는 품 안에서 펜을 꺼내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평] 포스트 포르노 시대의 새로운 쇼, <미래의 범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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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스터스>가 <트위스터>(1996)로부터 빌려온 건 인물의 성격과 갈등 구도만이 아니다. 익히 알려진 영화를 영화 속에 인용하는 방식도 둘의 공통점이다. 주인공이 만든 토네이도 실험기구의 이름이 ‘도로시’라는 데서부터 인용은 이미 시작된다. 도로시는 주디 갈런드가 연기한 <오즈의 마법사>(1939) 주인공 소녀의 이름이다. 비록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수단으로 쓰였다 해도, 이 영화가 일종의 토네이도 영화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토네이도가 재난과 파괴로 등치되는 현실 속에서, 토네이도를 다른 세계를 여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인식한 기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함을 넘어 놀라움을 안긴다. <트위스터>와 <트위스터스>는 토네이도가 주는 매혹과 두려움을 취사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재난영화의 명랑한 기원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드러낸다.
영화 속 영화
영화관의 관객들이 토네이도의 습격을 받는다는 것도 두 영화의 공유점이다.
[비평] 왜 극장에는 <프랑켄슈타인>이 상영 중이었을까, <트위스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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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OTT가 HDR이란 용어를 들고 나오기 전까지 영화 속에서는 풍부한 블랙의 계조(밝기의 단계)를 만날 수 있었다. HDR은 High Dynamic Range의 약자로 이미지 암부의 블랙부터 하이라이트의 화이트까지 밝기의 단계가 더 넓어지고 많아진 것을 말한다. 블랙의 표현이 풍부하다는 OLED TV가 등장하고, 핸드폰 디스플레이도 HDR을 지원한다고 광고한다. 새로운 기술을 통해 그간 보지 못했던 블랙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막상 우리는 최근의 많은 한국영화와 시리즈물들에서 블랙의 계조를 찾아보기 어렵다. 어둠이 많은 공간에서 그 공간 안에 배치된 어둠과 각각의 사물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블랙의 계조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화면 속 사람이 갖고 있는 블랙도 마찬가지다. 블랙의 계조가 풍부한 머리카락의 구분은 사라지고 하나의 검은 머리카락 덩어리로 보이기 일쑤다.
영상기술은 휴먼 비전 인간의 눈과 똑같이 보이는 것을 목표로 발전해왔다. HDR도 그 목표 중 하나다. 인간의
[박홍열의 촬영 미학] 영화, 어둠의 계조를 잃다, HDR 시대에 ‘Black’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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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업영화의 주요 흥행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기류를 꼽아보자면 ‘밴드왜건효과’(band-wagon effect)와 ‘언더도그효과’(underdog effect)를 들 수 있다. 전자가 대세·강자를 따르는 심리에서 비롯된다면, 후자는 열세·약자를 응원하는 마음이 이끄는 효과다. 역대 한국영화 최대 흥행 연작 <범죄도시> 1~4편(2017~2024)의 관객 총합은 4175만명. 작품의 안과 밖에서 밴드왜건효과가 확연하다. 최강 주먹이 최악 빌런을 후련하게 때려잡아줄 것이라는 악단 마차가 관객을 모았다. 한편으로 김한민 감독의 역대 한국영화 1위작 <명량>(2013)을 포함한 ‘이순신 3부작’도 총 2945만명이 봤다. 이 경우는 서사 내부에 언더도그효과가 뚜렷하다.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지원으로 보나 왜군의 세력으로 보나 누가 봐도 열세인 상황에서 나라를 지켰다. ‘330척에 맞선 12척의 배’라는 홍보 문구는 언더도그효과의 최대치를 노려 적중한 사례다. 그
[비평] 열세 서사의 징후적 조류, <행복의 나라>를 계기로 본 한국영화의 한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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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단지 생계 때문만은 아니다. 일이 우리를 만성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게 하고 공황장애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일을 그만두느니 삶을 그만두는 게 빠를 것 같다고 생각하게 할지라도, 우리는 일을 도무지 그만둘 수가 없다. 왜일까? 우리가 일을 너무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일이 삶을 완전히 망치고 부숴주기를, 천천히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갈망하고 있는 마조히스트이기 때문일까? 2022년 6월 훌루(한국에서는 디즈니+)를 통해 첫 시즌, 그리고 마찬가지로 올해 6월 세 번째 시즌이 공개된 드라마 <더 베어>는 주인공 카르멘(‘카미’) 베어제토를 통해 우리가 일과 맺고 있는 애증 병존의 교착 관계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집안 출신인 카미는 마약중독자였던 형의 자살 이후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를 주 종목으로 하는 형의 가게 ‘더 비프’를 운영하기 위해 고향 시카고
[이연숙의 장르의 감정] 일의 고통과 고통, <더 베어>와 자기 파괴적 열정으로서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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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적 리얼리즘 영화들의 계보 속에 있으면서도 고유한, 그래서 정말로 귀중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더 원더스>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 여기에 로르바케르의 첫 ‘마술’이 있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답사할 가치가 있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미래의 시점에서 무언가의 처음을 목격한다는 건 늘 생경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데, 심지어 그 무언가가 마술이라면 보는 이의 입장에서 놀라움을 느낌과 동시에 마음의 벽까지 허물 수도 있다. <더 원더스>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마술이 그렇다. 이 쇼의 마술사는 가족의 대표 젤소미나(마리아 알렉산드라 룬구)이고, 관객은 젤소미나 가정에 위탁된 외부인 마르틴(루이스 휠카)이다. 젤소미나는 마르틴의 호감을 얻기 위해 입에서 벌을 꺼내는 마술을 선보인다.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상대의 긴장을 풀기 위해, 그럼으로써 관계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되는 이 마술이 알리체 로르바케르 영화의 본질이라는
[비평] 모든 성장 서사는 마술적이다, <더 원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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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안양은 왜 이렇게 평범하지?” 이 질문이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이하 <수카바티>)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수카바티>의 공동연출자인 나바루 감독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언가에 미친 자들만이 내지를 수 있는 함성에 홀리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그 함성의 주인공인 FC안양의 서포터스 ‘RED’는 노잼의 도시였던 안양을 극락의 도시로 도약시킨다.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축구의 힘인가? 아니면 안양의 힘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가? 그렇게 <수카바티>는 출발점에서 제기된 질문을 질적으로 다른 질문으로 이어가며, 관객을 ‘수카바티’를 미친 듯 외치는 RED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극락(極樂)의 세계에 당도한다.
안양은 아미타불의 정토이자 ‘깨달음이 동반된 즐거움’의 세계를 의미하는 ‘극락’과 같은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극락을 뜻하는 산스크리스트어가 바로
[비평]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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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두달차,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수 19만명을 넘어서며 예상치 못한 호응을 얻고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주제의 무게와 영화의 비상업적 화법을 떠올리면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평단만이 아니라 대중 또한 이 작품이 전위적인 형식으로 압도적인 체험에 이르게 하며, 무엇보다 그 과정이 ‘윤리적’이라는 견해를 공유한다. 망설임 없는 호평의 물결 속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견을 제기하려고 한다.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형식적 야심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재현하는 두 가지 선택에서 빚어진다. 우선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수용소 바로 옆에 긴 담장을 치고 사는 나치 가족에 초점을 두는데, 한자리에서 움직임을 자제하는 카메라가 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반면, 담장 건너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미지가 아닌 사운드로만 나치 가정의 장면을 부유한다. 요약하자면, 프레임 내부의 이미지와 외부의 사운드가 접촉하며 일으킨 불쾌한 긴장이 이 영화의 도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구역질의 만용, 가장된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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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그림, 만화, 광고, 영상 작품처럼 여러 영화도 <최후의 만찬>(1495`~98)을 인용한다. 최후의 만찬 도상은 반복적으로 그려진 기독교 도상 중 하나이고,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의 구도는 에펠탑의 실루엣만큼이나 유명하다. <최후의 만찬>은 인터넷 밈처럼 가볍게 사용되는가 하면, 짐짓 심각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비리디아나>(1961),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의 <맘마 로마>(1962) 같은 경우가 그렇다. 매춘 포주를 도상 속 예수의 자리에 배치한 <맘마 로마>는 최근 논란이 된 파리올림픽 개막식 장면 못지않게 불손한 장면일 것이다. 이번 올림픽 개막식에선 센강 다리 위에서 스트리트댄스를 추던 드랙 퀸, 어린이, 장애인, 초고도 비만인 등이 디오니소스로 분장한 가수 뒤쪽에 서며 활인화(tableau vivant, 살아 있는 모델이 회화, 조각, 문학 속 구성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인간 예수, 소수자 예수, 올림픽과 교회 그리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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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의 중핵은 인간 신체를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훼손하는 변형의 공포가 아니다. 물론 그의 영화는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절단되는 신체와 부서지는 살덩어리, 쏟아지는 분비물과 짓이겨진 얼굴을 스크린에 전시하며 정상적인 인간 규격에 야유를 보내는 혐오스러운 비체(abject)의 영화다. 크로넨버그는 신체의 일관된 질서로부터 추방된 부위들의 조각과 점액을 건조한 기계장치들과 병치시키며 스크린의 매혹으로 교정한다. 그의 영화는 고정된 몸을 변형하는 급진적인 유혹과 역겨운 형태로 변형된 몸이 건네는 두려움의 모순적 체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는 표면의 진실만을 가리키는 진술이다. 그가 묘사하는 과격한 신체의 변형은 한 가지 특수한 절차를 전제하고 있다. 크로넨버그 영화의 유혹은 이 절차에서 비롯되는 긴장에 있다.
가시적 무대와 비가시적 침입
많이 거론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는 것은 새로운 발명품이나 현상을 발표하고
[비평] 기계는 벌레를 포획할 수 있는가?, <미래의 범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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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의 총성과 함께 새로운 유형의 영웅이 탄생했다.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매트릭스>(1999)는 주인공 네오가 몸을 젖혀 총알을 피하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묘사한다. 360도로 움직이는 가상 카메라를 통해 네오의 움직임과 총알의 궤적을 느리게 표현한 그 장면은 관습적이면서도 혁신적이다. 과거 서부극이나 필름누아르의 주인공이 총격전에서 뽐낸 것과 같은 민첩함과 더불어 총알의 속도와 움직임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매트릭스>의 블릿타임은 디지털 영화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영웅의 형상, 즉 속도의 한계를 넘어서 시공간의 질서를 다스리는 영웅을 상징적으로 그리는 영화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블릿타임은 정지된 것을 움직이는 것으로 전환하는 영화의 기본 법칙을 뒤흔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법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새롭다는 말은 아니다. 일찍이 움직임의 환영을 중단하기 위해 슬로모션이나 프리즈프레임을 사용한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총알의 시간과 정면 승부, 블릿타임의 도래와 할리우드의 신영웅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