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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클로즈업의 이데올로기, <조커: 폴리 아 되>가 찍은 얼굴의 우주
박홍열(촬영감독) 2024-11-06

<조커: 폴리 아 되>

크리스토퍼 놀런의 아이맥스영화 <오펜하이머>는 클로즈업에 대한 인식의 틀을 전복한 영화였다. 아이맥스란 거대하고 광활한 자연의 풍경을 카메라로 담아내 극장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감각을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기에 초기 아이맥스는 다큐멘터리에 주로 사용되었다. 이후 블록버스터영화에서 규모감 있는 장면이나 공간감 있는 롱숏을 임장감 있게 담아내는 데에 적합한 포맷으로 인식돼왔다. 이 고정관념을 깬 영화가 <오펜하이머>다. 영화는 70mm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얼굴 클로즈업을 화면 가득 담아낸다. 그전까지 극 중 인물의 얼굴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담아낼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아이맥스 포맷의 새로운 시도였다.

아이맥스 카메라의 70mm 필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영화들보다 4배 이상 넓은 면적에 이미지가 기록된다. 카메라에 기록되는 이미지의 면적이 클수록 화면의 심도는 얕아진다. 롱숏과 풀숏만 주로 찍던 아이맥스 카메라가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 클로즈업을 담은 순간 그 클로즈업은 관객이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이미지를 보여준다. 얼굴 클로즈업 전체를 선명하게 담아낼 수 없는 포커스의 깊이, 공간의 풍경을 담아내는 카메라가 인간의 얼굴 가까이 붙어서 얼굴의 풍경을 담아내려 할 때 만나는 생경함. 풍경을 선명하고 디테일하게 보여주던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을 그 선명도로 보여주려 할 때 만나는 낯섦. 그렇게 <오펜하이머>의 클로즈업은 말하는 상황과 감정을 대사로 전달하는 오펜하이머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침묵할 때의 얼굴을 클로즈업에 담아낸다.

한발 나아가 이 영화가 아이맥스로 표현하는 더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핵폭탄을 만들기 위한 기술인 양자의 세계다. 너무 미시적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지할 수도 없는 그 작은 세계를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담아낸다. 자연의 풍광과 액션 블록버스터의 화려하고 거대한 스케일을 롱숏으로 담아내던 카메라가 말하지 않는 주인공의 얼굴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의 풍경을 담아냈을 때, 그 이미지는 작고 좁은 이미지가 아닌 자연의 풍경을 압도하는 우주의 이미지가 된다. 미시 물질세계의 클로즈업과 얼굴 클로즈업 안에서 우주를 표현한 <오펜하이머>는 우리가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온 클로즈업에 대한 보편적 인식에 전복을 시도한 영화다.

규정할 수 없는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폴리 아 되>

클로즈업의 인식을 바꾼 또 한편의 영화, <조커: 폴리 아 되>가 아이맥스로 최근 개봉했다. 아이맥스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클로즈업으로 <조커: 폴리 아 되>는 아서 플렉(조커)의 얼굴을 택한다. 영화는 아리 알렉사 65 디지털 아이맥스 포맷으로 촬영됐다. <오펜하이머>는 아이맥스 카메라가 한번도 다가서지 않았던 인간에게 다가가 와이드렌즈로 인물의 클로즈업을 담아냈다. <조커: 폴리 아 되>의 아이맥스 카메라는 반대로 인물과 떨어져, 그 인물의 클로즈업을 담아낸다. <오펜하이머>의 생경한 클로즈업이 얼굴에 공간감을 만들면서 무표정한 얼굴의 깊이감을 프레임 밖 외부로 확장한다면, <조커: 폴리 아 되>의 클로즈업은 얼굴과 공간을 평면화하면서 아서 플렉의 무표정한 표정 위에 공간감을 만든다. 이 또한 아이맥스 카메라 클로즈업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미지들이다.

렌즈의 사용도 독특하다. 보통 영화 촬영 과정에서 촬영감독은 시나리오와 영화 속 캐릭터를 분석하고 그것에 적합한 렌즈를 선택한다. 그렇게 주로 하나의 렌즈로 한편의 영화를 표현한다. 반면 <조커: 폴리 아 되>는 아서 플렉의 클로즈업을 하나의 렌즈로 포착하지 않는다. 한편의 영화와 그 인물을 표현하는 데 니콘, 캐논, 라이카, 하셀브라드, 아리, 마스터빌트, 애너스티그매트, 오토 네멘츠 등 다양한 렌즈를 섞어 사용한다. 한 인물의 클로즈업을 다양한 렌즈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 인물이 갖고 있는 기질이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조커는 자신이 조커인지 아서 플렉인지 규정하지 못한 채 이야기에 몸을 맡긴다. 세상은 아서를 규정하려 하지만 이 영화에 사용된 렌즈들의 다양한 물리적 성질은 아서를 하나로 규정짓지 않고 다름을 다름 그대로 담아낸다. 영화 속 모든 사람이 조커에게 여러 질문을 건네지만 조커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주변은 그에게 끊임없는 선택을 요구한다. 아서가 주체성을 갖기를 원한다. 교도관은 그가 광대 코미디언이 되길 요구하고, 할리퀸은 “다들 진짜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라고 말하며 아서의 얼굴에 조커 분장을 한다. 변호사는 그를 인격이 분리된 분열증 환자로 규정하고 조커가 아닌 아서가 되기를 원한다. 그가 갇힌 정신병동 교도소에는 매일 약을 투여해 기운이 없고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에 머물게 한다. 조커는 어떤 분장 없이 세상과 만나려 하지만, 이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수많은 조커가 서로 만나도록 한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자신의 얼굴을 분장으로 지워야만 하는 아서 플렉의 슬픈 클로즈업을 무표정한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을 통해 담아낸다.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폴리 아 되>는 뮤지컬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에서 타자를 규정짓는 이 세상에 대한 우화에 가깝다. 워너브러더스라는 할리우드의 대자본으로 과거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을 재연한 듯이, 클로즈업이 빛나는 무성영화의 형태를 오마주했다. 드레이어의 잔다르크는 자신을 마녀라 규정짓는 종교재판 앞에서 우주를 담은 무표정으로 프레임 밖 외화면을 열어젖힌다. 반면 조커는 자신을 규정하려는 타자들의 목소리와 시선에서 대답 없는 얼굴로 프레임 안에 내면의 우주를 연다. 감옥 안에서 마녀재판을 기다리는 잔다르크처럼 아서도 감옥 안에서 등장한 뒤 감옥 안에서 영화를 마친다. 감옥 외 공간은 실내 재판정 그리고 재판정의 폭발로 잠시 밖을 헤매다 오르는 계단뿐이다. 다시 조커는 감옥 안으로 잡혀온다.

잔다르크와 조커 클로즈업의 공통점은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을 통해 화면의 층위를 만드는 것이다.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잔다르크의 클로즈업은 그녀를 구원해줄 존재를 향해 프레임 밖으로 시선을 보낸다. 화면 가득한 그녀의 클로즈업은 프레임 안에 얼굴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밖 그녀를 구원해줄 존재와 연결하며 클로즈업된 얼굴은 화면 밖의 우주에 존재하게 된다. 반면 그를 구원해줄 존재가 없는 조커의 얼굴은 프레임 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 없다. 그의 클로즈업은 화면 안을 응시하며 화면 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아이맥스 스크린 가득 채워진 아서의 빅 클로즈업은 대사로 상황과 감정을 설명하는 얼굴이 아니다. 아서의 클로즈업은 어둠 속에 가려지거나 아이맥스의 아주 얕은 심도로 얼굴 전체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어딘가는 상이 흐려지거나 뭉개져 있는 얼굴이다. 정보를 제공하고 이야기를 전달하거나 말하는 아서의 얼굴도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표정 짓는 아서의 클로즈업은 더욱 아니다.

조커의 이데올로기

<오펜하이머>

일반화된 클로즈업의 상상적 약속은 잘 보이는 표정과 인물의 말하는 얼굴로 표현하는 명확한 전달자의 역할에 임하는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는 개인들이 자신의 실제적 존재 조건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의 표상을 이데올로기라고 설명한다. 얼굴의 클로즈업을 통해 얻는 관객의 감정 또한 영화가 구축해놓은 이데올로기로서 영화의 서사, 장르적 관습, 개인적 영화 체험에 대한 경험과 기억 등을 만난다. 이는 각자의 영화적 경험과 삶 안에 쌓여 있는 이데올로기(들)의 만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조커>의 후속작, 조커라는 안티히어로에 대한 기대감, 장르적 특징 등등 기존에 구축된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이 영화의 뮤지컬 요소를 보고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번 더 언급하자면 이 영화는 뮤지컬영화가 아니다. 조커와 할리퀸이 취한 환상 세계의 언어가 노래인 것일 뿐이다. 그들의 노래는 둘만의 환상 세계에서 소통하는 그들만의 이해 수단이다. 노래는 시뮬라크르다. 감각의 정념들로 잠시 들렸다 사라지는 것이다.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노래하는 얼굴. 할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얼굴. 사라질 감각의 정념들을 담아내는 아서의 얼굴들. 감정은 언어화할 수 없다. 이 영화 전반에서 아이맥스 화면 가득히 채워진 아서의 말하지 않는 얼굴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아서는 노래와 얼굴로 그 감각을 남기려 하지만, 아서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말하는 순간 이 세상과 타자들은 분장과 어둠을 통해 그의 얼굴을 지워버린다.

할리를 만나고 돌아와 자신의 감옥 안으로 들어가면 문이 닫히고 창살 사이로 아서의 얼굴이 보인다. 문이 닫히면 행복한 그의 얼굴은 감옥 안 어둠으로 지워진다. 얼굴이 실루엣으로 가려진다. 어둠 속에서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아서, 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자신을 스스로 비춘다. 하지만 그 빛은 너무 작다. 법정에서 조커 분장을 하고 스스로 자신의 변호를 하고 돌아온 조커. 법정에서 자신이 조커라 말하고 당당함으로 감옥으로 돌아오자 그를 기다린 것은 교도관들의 폭력이다.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심한 폭력을 당한 후, 그는 교도관들에 의해 감옥 안으로 끌려간다. 교도관들에 의해 침대 위로 내던져지고 아서의 얼굴이 침대 위 프레임인된다. 화면 가득 그의 얼굴이 들어오지만, 그의 얼굴을 인지할 틈도 없이 감옥 문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 대부분을 지워버린다. 어둠 속에서 감시창 사이 작은 구명의 빛이 그의 한쪽 눈과 얼굴에 닿는다. 아서는 사랑하는 할리퀸을 붙잡기 위해 조커 분장을 하고 법정에서 스스로 변론한다. 조커의 분장은 웃고 있지만 아서는 울면서 조커가 아니라고 말한다. 한 얼굴 위에 동시에 겹친 조커의 웃는 분장과 우는 아서의 얼굴, 감옥 안 동시에 비추는 어둠과 빛은 하나의 주체만을 결정하기 요구하는 사회에서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경계인으로서 아서의 이미지를 만든다. 얼굴을 그리지만 얼굴의 부재를 드러내는 레오나르도 크레모니니의 그림처럼, <조커: 폴리 아 되>는 얼굴을 통해 우리가 기대하고 익숙한 조커와 아서의 얼굴을 지우며 조커가 누구인지, 누가 조커를 만드는지를 되묻는다. 영화 매체가 클로즈업으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호명하는 얼굴, 클로즈업

<조커: 폴리 아 되>

인간의 얼굴뿐만이 아니라 사물의 클로즈업도 얼굴이 된다. 벨러 벌라주의 말을 빌리자면 클로즈업은 고립된 얼굴 그 자체로 공간과 상관없이 새로운 차원을 여는 것이다. 모든 시공간의 좌표들로부터 추출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영화 이미지는 항상 탈영토화되어 있고, 클로즈업은 화면을 시공간적인 좌표에서 떼어내 무화의 공간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클로즈업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경험하거나 만나지 못한 임의적 시공간으로 데려가는 역할을 한다.

<오펜하이머>에서 보여준 물질의 미시 세계뿐만 아니라, 오즈 야스지의 영화들에서 긴 대화가 끝나고 등장하는 의미 없이 보이는 주전자, 창문, 방 안의 공간과 사물들의 클로즈업도 앞서 대화를 나눈 부녀의 정서를 대변하는 얼굴들의 시공간을 만나게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막내동생이 죽은 후 동생 앞에 앉아 있는 언니, 오빠들의 얼굴을 먼저 보여주지 않는다. 막내동생의 죽음 앞에서 먼저 보이는 화면은 동생이 식물을 키우던 컵라면 용기와 주변의 사물들, 베란다에서 보이는 골목을 가로지르는 전선과 골목의 풍경들이다. 이 모든 사물과 풍경은 동생의 죽음 앞에 모여 있는 형제들의 슬퍼하는 얼굴 클로즈업이며, 죽은 막내동생의 얼굴 클로즈업이기도 하다.

벨러 벌라주는 얼굴의 클로즈업이 개인의 감정, 상황, 성격 등 개별적 특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얼굴 뒤에 숨겨진 가족, 국가, 계층 등 비개성적인 특징을 정확한 말보다 더 미묘하고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사물 또한 고유한 얼굴과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자율적인 존재라고도 말한다. 얼굴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다양하게 섞이는 동시적인 공간이고, 이는 인간 신체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곳이다. 얼굴의 클로즈업 위로는 여러 감정과 상황에 대한 다양한 내용들이 음악의 화음처럼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좋은 클로즈업은 가시적인 얼굴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들을 드러낸다. 좋은 영화는 인간의 얼굴 위치에 사물의 얼굴을 놓는다.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화들 속 배우의 얼굴은 열심히 말하거나 설명하는 커다란 얼굴뿐만은 아닐 것이다. 무조건적인 클로즈업도 아닐 것이다. 인상적인 배우의 얼굴은 보이는 얼굴 너머의 무언가를 만나게 해주는 몸짓들이어야 한다. 알튀세르는 좋은 예술이 이데올로기와의 거리 두기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드러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영화는 말하는 얼굴의 클로즈업에 기대지 않는다. 얼굴 클로즈업의 전통적인 방식 및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둘 때 오히려 그 얼굴이 기억된다. <조커: 폴리 아 되>의 아서 플렉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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