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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나는 켄 로치의 정공법이 시효를 다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일찌감치 등을 돌린 이들에 비하면 훨씬 늦은 축에 속할 테지만 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웅변까지도 감동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미안해요, 리키>에서 리얼리티를 위해 인물을 사지로 몰아가는 방식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화가 치밀어 오른 이유가 영화 속 현실이 아니라 영화에 있다는 사실은, ‘확신 불능증’을 앓고 있는 나조차도 확신할 수 있었다. <나의 올드 오크>를 마주하기 직전의 심정은 기대감보다는 의무감에 가까웠다. 이미 무언가가 끝났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에 응답하듯 영화 역시 무언가가 끝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켄 로치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공언된 영화는 끝을 형상화하는 대신 이미 끝난 후에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방법을 찾아간다.
통제되지 않는 것, <나의 올드 오크>
이미 끝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제스처는
[비평] 영화를 멈춰 세운 두개의 동작, <노 베어스>와 <나의 올드 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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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의 SF영화 <외계+인> 2부작에서 내가 가장 싫었던 게 뭐였는지 말해볼까. 바로 외계인의 촉수다. 보존법칙을 위반하며 끊임없이 생성되어 늘어나고,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기에서부터 USB 연결성까지 온갖 기능을 수행하고, 주인공이 한번 휘두른 칼에 잘려나가는 바로 그것.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자기 몸무게의 몇배나 되는 신체기관이 갑자기 생겨나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갈 때 배우가 그 조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는지 묻고 싶다.
요샌 다들 최소한의 물리법칙을 지키는 데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최근 마블 영화를 보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차라락 헬멧이 나타나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물리법칙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없이 그럴싸한 그림에만 집착한다면 결국 액션은 붕괴된다. 최근 마블 영화 <더 마블스>는 CG가 들어간 액션에 반영된 물리법칙이 너무 랜덤이라 이 우주에서 중력이 유지되는 것 자
[비평] <외계+인> 시리즈가 시도한 ‘한국형 SF’의 한계, <외계+인>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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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 하면 두 가지를 자주 말한다. 하나는 한국형 케이퍼 무비의 대가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 다수를 포함해 예사 영화보다 더 많은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등장인물의 앙상블이다. 그러나 <외계+인> 연작을 보면서 그의 작품이 품은 장소에는 관심이 적었단 생각이 든다. 더 정확히는 다양하게 꺼내고 빈번하게 바꾸는 장소를 바라보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이건 단순히 하이스트 영화라면 여러 인물 군상을 드러내고 강탈 과정을 풀어내느라 필연적으로 많은 장소를 제시할 수밖에 없어서는 아니다. 그의 영화는 직관적으로 땅으로 인식되는 곳에 국한하지 않고 예기치 못한 대상도 장소로 삼는다. 또 그가 잘 구현하는 활극은 장소를 관장하는 주체인 인물이 장소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웅을 겨루는 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달리 보면 그의 영화만큼 장소 대결이 이뤄지는 각축장도 없다. 대결 양상은 다름 아닌 점유와 점거, 퇴각과 이탈이다.
<외계+인> 1부 시작에서 그간
[비평] 장소 바꾸기에 주목하기, <외계+인>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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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첫 장면부터 정교하게 통제된 롱테이크다. 이러면 자파르 파나히가 아니지 않나. 행상이 지나간 상점가 이면도로에 거리의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고, 잠시 전 지나쳐간 행인이 카페테리아에 앉으면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는 다른 손님에게 맥주를 낸 뒤 남자와 만나 긴 대화를 나눈다. 삼각대 위 카메라가 360도 돌아가는 가운데 인물들은 철저히 계획된 동선에 맞춰 나오고 빠진다. 느린 패닝숏은 얼핏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솜씨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반대다.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여러 인물들이 카메라에 맞춰 움직이는 쪽에 가깝다. 아니나 다를까, “컷” 하는 음성과 함께 영화 촬영 현장임이 드러난다. 이어 화면은 촬영장을 맥북으로 들여다보며 원격 연출하는 감독의 어깨 뒤로 커팅 없이 빠진다. 여기서부터는 카메라가 인물을 뒤쫓는 쪽이다. 테이크는 7분에 육박한다. “전문 편집자의 기술”(감독의 전작 <3개의 얼굴들>의 대사)이다. 노트북 안과 밖이 얽
[비평] 곰은 우리 안에 있다, <노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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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이 영화는 유럽 사회의 어느 단면을 서늘한 시선으로 지켜보거나 도난 사건을 발단에 둔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다다를 법한 결말로 향할 것이라 믿게 만든다. 1.37:1의 화면비와 핸드헬드 카메라가 빚어낸 <티처스 라운지>의 화법은 이따금 다이렉트 시네마를 모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일게 한다. 그렇지만 두말할 것 없이 이 영화는 일정 부분 장르 법칙을 따르고 있다. 관계의 정치학과 그 반응의 화학작용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은 한편의 심리 드라마다. 이런 점을 제외한다면 영화는 대체로 자연 발생한 듯한 사건들이 연쇄되며 파문에 파문을 일으키는 듯한 양상을 띠며 카메라는 그런 현상의 관찰자처럼 행동한다. 공들여 살펴보지 않더라도 드러나는 건 독일 학교와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이민자 차별이라는 유럽 정치 사회의 민낯이다. 그러나 <티처스 라운지>는 사안의 핵심에서 비켜서 세워진 세계다. 당연한 세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오랜 시간 우리
[비평] 진실의 윤리학, ‘티처스 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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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질 때까지.” 활짝 폈을 때가 아니라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소멸시키는 순간에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벚꽃의 이미지는 일본 미의식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모노노아와레’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슬픔이 동반된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그것이 <경성크리처>가 구현하려 한 영화의 주된 정서다(이러한 정서와 관련된 몇몇 장면은 <화양연화>에서 차용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경성크리처>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가 그 아름다움이 슬픔으로 끝맺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잉태했다고 말하려 한다. 하지만 <경성크리처>가 추구하는 슬픔의 정서는 ‘크리처’를 제목으로 내세운 작품에 대한 관람자의 기대에서 크게 어긋난다. 관람자는 괴물의 힘으로 미칠 듯이 질주하는 속도감의 작품을 기대했겠지만, 슬픔의 정서를 추구하는 경향은 이 질주의 속도를 한없이 늦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와 감독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크리처를 중심으로 한 재난의
[비평] 괴물은 시간을 먹고 자란다, ‘경성크리처’와 한국 크리처물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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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 실린 기왕의 <서울의 봄> 평론들을 읽었는데 다들 대체로 박한 평가를 담았다. 천만 관객을 넘기며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이 영화에 대해 나는 좀 후한 평가를 내리고 싶다. 장병원, 안시환, 김예솔비 등 <서울의 봄> 개봉 초기에 이 영화를 논한 평자들은 공통적으로 12·12 반란 세력의 봉기를 막지 못한 기성 권력의 실패를 남성성의 신화로 위무한다고 비판했는데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공허한 권력의 실체
이 영화 후반부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들로 시작하고 싶다. 반란 성공이 확실해지고 수괴 전두광 장군(황정민)은 일행과 함께 본부로 돌아가려다 혼자만 차에서 내려 걸어간다. 그는 승리를 혼자만의 시간으로 만끽하고 싶다(전두광 혼자 돌아가는 장면을 찍어둔 것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환희와 고독이 동시에 휘몰아치는 그의 내면의 기운에 카메라가 동참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는 것은
[비평] 관료주의의 무능, 권력자의 광기, 그리고 인간의 존엄 - <서울의 봄>이 상기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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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놓인 아날로그 라디오를 통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알리는 뉴스가 들려온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장면. 단순한 사물과 소리의 결합이지만 기묘하게도 과거와 현재 시제가 뒤섞인 듯한 인상을 건넨다. 여전히 20세기에 남겨진 것처럼 보이는 시대착오적 연인들의 멜로드라마 위로 동시대 전쟁과 폭격을 알리는 소식이 겹쳐질 때, 이 평범한 외형의 장면으로부터 생경한 질문이 생겨난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그들은 라디오 뉴스가 전해주는 현재의 시간에 정착할 수 있을까? 카우리스마키의 카메라가 포착해온 연인들. 그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느 시간에 머물다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카우리스마키는 은퇴를 번복하고 완성한 이 영화가 필모그래피 초기에 만들어진 ‘프롤레타리아 3부작’의 연장선에 있는 네 번째 연작이라고 밝혔다. 그의 말처럼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두 연인에게 드리워진 시선은 일자리를 잃어버린 빈곤한 노동자들의 삶을
[비평] 극장 앞의 평범한 연인들, <사랑은 낙엽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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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노량: 죽음의 바다>(이하 <노량>)를 한번 보고 쓴 글이다. <노량>을 다시 보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러지는 않을 작정이다. <노량>이 전쟁영화라는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전쟁영화를 여러 번 관람한다는 것은 전쟁영화광이 아니라면 고문에 가깝다. 영화평론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견뎌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부디 없기를 바란다. 있다면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곧 크리스마스가 아닌가(이 글은 크리스마스 이후 공개되겠지만, 내가 이 글을 쓰면서 크리스마스를 지났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평론가라면 모름지기 <노량>보다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 관해 쓰고 싶을 것이다. 다만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한다. 참모총장의 거듭되는 부탁에 원치 않던 수도경비사령관 직을 수용한 이태신(<서울의 봄>)이라도 된 듯 짐짓 결연한 자세로 말이다. <노량>은 비평이 필요하지 않은 영
[비평] 전쟁영화의 무의식은 어디에 떠 있는가, ‘노량: 죽음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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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 인물들이 옷을 갈아입는 행동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곤 했다. 카우리스마키는 평소에 존경한다고 밝힌 오즈 야스지로의 인물들이 옷을 입는 동작을 오마주하듯, 환복과 같은 일상의 동작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곤 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오즈와 카우리스마키의 옷 입는 행위에 부여된 속성은 다르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거의 반자동적으로 수행되는 나른한 일상의 운문적 리듬을 조탁했던 오즈는 남루한 생활감이 표백된 세련된 부르주아 가옥으로 향했다. 이와는 달리 카우리스마키의 노동자들에게 현재의 일상이란 관능적 매혹이 결여된 공장에서의 지루한 노동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늘의 버거운 일상을 벗어나 특별한 미래를 꿈꿀 때 옷을 갈아입는다. 그 미래는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이 기다리는 시간이다. <성냥공장 소녀>의 소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데이트를 준비하며 비싼 옷을 사입고, <희망의 건너편>에서 핀란드로 밀항한 난민 칼리드는 이민청에 망명
[비평] 쓰라린 과거를 뒤로한 채, 우리는 영화를 본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시제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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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하며 상반된 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충실히 거장의 경전 구절에 복무한다. 그래서 모호하다. 음악 팬들은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는 25살 레너드 번스타인(브래들리 쿠퍼)의 모습에 가슴이 뛰다가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브로드웨이 하이라이트와 베를린장벽 붕괴 기념 음악회 등 중요한 순간이 축소된 영화를 당황스럽게 바라본다. 번스타인이 1973년 케임브리지 일리 대성당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말러 교향곡 2장 롱테이크 신 정도를 제외하면 클래식 애호가들의 구미를 당기는 장면은 거의 없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연극 혹은 뮤지컬처럼 느껴진다. 극의 주인공은 번스타인 혼자가 아니다. 번스타인과 그의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캐리 멀리건)의 부부 관계가 핵심이다. 매튜 리바티크가 촬영하고 미셸 테소로가 편집한
[비평] 거장의 어깨 옆에서, ‘마에스트로 번스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