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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한소희의 클로즈업이 준 감흥, 단출한 이야기, 거대한 이미지 <폭설>

윤수익의 두 번째 장편 <폭설>은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없는 무능의 소산이란 오해를 받기 십상인데 스토리가 드라마가 되는 관성이나 기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세개의 굵은 챕터와 에필로그로 나뉜 스토리는 사춘기 때 만난 두 소녀가 10년의 터울을 두고 다시 만나는 상황을 보여준다. 주연을 맡은 한소희한해인의 물리적 존재감이 주는 스크린의 박력에 의존하던 영화는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 그들의 존재를 풍경 안에 몰아넣고 그들의 육체적 시련이 심리주의 묘사를 대체하는 수준으로 나아간다. 나는 최근의 한국영화 가운데 배우의 클로즈업이 이토록 강력한 아우라를 자아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특히 이 영화로 데뷔해서 지금은 유명해진 한소희의 얼굴이 주는 힘은 어떤 이야기의 세공력보다 인상적이다. 5년 전 촬영을 시작했던 영화가 난산을 겪고 마침내 완성되었을 때 스크린 안의 캐릭터와 스크린 바깥의 배우가 기묘한 동질감을 띠는 것도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윤수익의 연출은 거두절미하고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며 장면에 많은 컷이 필요하다는 소심한 강박을 벗어던지고 최소한의 것들만 장면에 남겨놓는다. 예술계 고등학교에서 연기 전공인 19살 소녀 수안(한해인)이 아이돌 스타지만 자기처럼 방황한 끝에 이 학교로 전학 온 설이(한소희)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오글거리는 사춘기 소녀들의 서투른 대화와 감성을 잡는 걸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곧바로 그들의 충동적인 서울행 무면허운전 여행에 동승하며 인적 드문 명동 새벽 거리에서 활개치던 이들의 느닷없는 육체적 충동을 보여주는 것으로 첫 번째 챕터를 마감한다. 영화는 이후로도 계속 이런 식인데 두 번째 챕터에서 나름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알아볼 만큼 인지도 있는 배우가 된 수안이 설이와 10년 만에 재회했다가 다시 헤어지는 과정에서도 별다른 극적 상황이나 대사는 없다. 수안은 자신에게 사인과 사진 촬영을 요청하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회적 자아를 연기하면서 비로소 설이의 고민을 몸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는 PC주의에 입각한 연출론을 장황하게 펼치는 연출자 앞에서 비위를 맞춰주던 술자리가 끝난 후 남자 사람 선배의 방에서 약물에 취하고 인파가 붐비는 거리로 나가 자신을 내팽개친다.

연기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충만하게 채우려는 수안과 설이의 이상은 납득할 수 없는 상황과 조건 속에서 연기하는 데서 오는 공허함으로 망가지는데 그 대가로 얻은 유명세 앞에서 복종하는 그들의 모습은 더욱더 자기 환멸에 빠지게 만든다. 사회적 자아와 자신의 실체 사이에 놓인 허무한 틈을 마주하고 그들이 택한 방법은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수안은 약을 하고 설이는 인기 대신 악명을 얻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태도로 자신을 망가뜨린다. 세 번째 챕터에서 수안은 고향 강릉 해변에서 서핑에 몰두하는 설이를 발견하는데 정작 설이는 수안을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한다. 수안은 설이를 다그치고 설이는 자기 얼굴을 자해하는 것으로 응대한다.

‘바다’와 ‘폭설’이라는 제목이 붙은 세 번째 챕터와 에필로그에서는 배우들의 육체적 헌신과 무모한 카메라워킹이 조화를 이뤄 심리주의적 연출 방식을 버렸거나 할 수 없었던 제작 조건을 초월하면서 아기자기한 심리적 묘사가 감당할 수 없는 차원의 거대한 심리적 파도를 만들어낸다. 서투르게 서핑을 연습하는 수안을 따라다니던 카메라는 수안과 설이가 함께 서핑을 하다 거센 폭설에 휩쓸려 다른 해변에 고립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때의 표류와 고립에 관한 이미지는 언어의 영역을 담대하게 넘어선 이 작품만의 영화적 시그니처라고 할 만하다.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고 경외감과 두려움을 몰고 오는 자연의 숭고한 풍경 속에서 두 주인공의 이미지는 용해되고부서지며 사라졌다가 다시 형체를 회복한다. 이것은 그들의 서투른 사랑이 낭비한 시간과 공간의 완벽한 대체물이며 자립할 수 없기에 관계 맺기에 몰입할 수 없었던 그들의 연약한 자아가 결국 감당해야 하는 시련과 극복의 은유이다. 그들은 폭설로 인한 고립 속에서 비로소 한몸이 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청춘 비극이 해피 엔딩으로 역전되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주변 인물을 소거하고 두 주인공에게만 초점을 맞춘 이야기 설계와 그 빈약한 이야기의 무게를 확장시키는 이미지의 힘은 후반부 폭설이 몰아치는 스펙터클이 펼쳐질 때까지 오로지 두 배우의 물리적 존재감의 현전으로 버텨낸 것이 <폭설>의 경이적인 부분이다. 한소희와 한해인의 연기 톤이 다른 상태에서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의 화면 내 조화가 이뤄내는 기운은 앞서 거론했듯이 한소희 클로즈업의 절대적인 매력에서 나온다. 한해인은 표현적인 연기를 하며 가끔 자기의식적인 태도가 완전 무장해제되었을 때 (두 번째 챕터에서 수안이 설이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수안의 표정은 무구하게 빛나는데 반갑다는 표정도 서운하다는 마음도 미처 꺼낼 기색 없이 포착된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자세가 나온다. 한소희는 심드렁하게 자신 안의 것은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는 태도로 정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지만 가끔 온기를 뿜어내는 공감의 몸짓으로 자연스럽게 자기방어적인 성채를 스스로 허물면서 고유한 매력과 기운을 스크린에 접속시킨다.

인적이 드문 서울 시내 거리를 담은 초반부 풍경과 두 사람이 폭설 속 바다에서 고투하는 후반부 장면은 두 주인공에게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덧씌우면서 흡사 그들을 유령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들은 자유인이고 싶었으나 너무 일찍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버린 기성 질서의 희생자이며, 현실을 살고 있으나 그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몽상가들이다. 그들의 존재 조건에 맞게 그들의 삶에서 주변 사람들은 차례로 지워지고 그들은 그들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힘겹게 유영한다. 거센 바다를 헤치고 당도한 해변에서 주변의 모든 공간과 존재를 하얗게 가려버리는 폭설의 이미지에 다시 파묻힌 두 주인공의 모습은 시각적 논리의 흥미로운 귀결로서 현실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던 그들이 이 세상에서 미필적 고의로 당도한 추운 낙원의 실체를 비극적으로 은유한다.

<폭설>의 감독 윤수익은 (그가 그걸 해낼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외로 하고) 드라마의 정석을 추구하는 대신에 카메라를 내레이터 삼아 인물과 풍경 묘사로 특정 세계의 심상을 포착하려는 이상을 추구했다. 빔 벤더스오즈 야스지로를 추모하며 오래전에 만든 다큐멘터리 <도쿄가>에는 우연히 도쿄로 여행을 왔다가 인터뷰에 응한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가 자신에게는 새로운 이미지가 필요하다며 이제 세상에는 쓸 만한 이미지가 드물다고 미친 사람처럼 말하는 장면이 있다. 베르너 헤어초크가 <아귀레 신의 분노>를 찍을 때 이야기를 위해 아마존 밀림이 필요했던 것처럼 다소 과장하자면 윤수익에게는 폭설이 내리는 강원도 바다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장단점을 떠나서 이미지의 모험에 기꺼이 나섰던 이 젊은 감독의 용기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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