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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로히어르스(타커 니콜라이)는 촉망받는 23살의 젊은 피아니스트다. 제니퍼는 세계적 권위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본선 진출에 성공해 대회 참가 전 뮤직 샤펠로 향한다. 뮤직 샤펠은 외딴 고성으로, 11명의 콩쿠르 본선 진출자들은 이곳에서 외부와 격리된 채 합숙하며 1주일간의 연습 기간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뮤직 샤펠에 도착한 제니퍼는 서로 어울리며 지내는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홀로 고독한 시간을 보낸다. 특히 합숙 내내 스스로를 과시하기 바쁜 나자렌코(재커리 샤드린)는 제니퍼에겐 눈엣가시다. 그렇다고 연습에만 열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제니퍼는 격리 기간 내내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트라우마와 싸운다. 제니퍼를 괴롭히는 두 가지 기억은 모두 그의 원가정으로부터 연유한다. 일찍이 제니퍼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루스 베쿠아르트)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제니퍼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만들기 위해 정서적으로 억압했고, 제니퍼의 성공 이후에도 딸에게 집착한다. 그런 아
[리뷰] ‘뮤직 샤펠’, 신경쇠약과 강박의 장엄한 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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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을 읽으면서 한번쯤 책의 내용뿐 아니라 종이의 색과 질감, 삽화와 폰트, 가름끈과 띠지의 조화 등 본연의 디자인에 매료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목할 만한 영화가 개봉한다. 50여년간 1만5천여권의 책 표지를 디자인해온 일본의 ‘명장’ 북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의 작업 현장과 일상을 근거리에서 포착하는 다큐멘터리 <책 종이 가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제작에 참여한 바 있는 히로세 나나코 감독의 연출작으로, 기쿠치 노부요시의 디자인처럼 군더더기 없는 담백하고 깔끔한 연출이 돋보인다.
종이책의 소멸이 당연하게 예고되는 디지털 시대에 기쿠치 노부요시는 (영화의 제목에서 예상 가능하듯) 종이를 가위로 오려서 풀로 붙이는, 다소 번거로운 ‘수작업’을 고수한다. 이것만으로도 가히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을 대표할 만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단지 아날로그적 도구의 사용만이 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그의 작품 세계를 탄생시킨 것은 아니다. 타이포그래피의 1mm
[리뷰] ‘책 종이 가위’, 여전히 종이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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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녹색 액체가 뉴욕의 깊은 하수구 아래로 방류된다. 그 방사능 물질에 노출된 네 마리의 거북이는 그렇게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가진 돌연변이 거북이가 된다. 그 순간 곁에 있던 한 마리의 쥐 스플린터(성룡) 역시 같은 과정을 겪어 돌연변이가 되는데, 그날부터 스플린터는 어린 레오나르도(니컬러스 칸투)와 미켈란젤로(샤몬 브라운 주니어), 라파엘(브래디 눈)과 도나텔로(미카 애비)를 거두어 닌자 기술을 가르치며 나름의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간다.
<닌자터틀: 뮤턴트 대소동>은 거북이 4형제의 청소년 시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거북이들은 그동안 스승이자 아버지 격이었던 스플린터의 강력한 경고로 인해 하수구 밖 인간 세계에 발을 들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사춘기 거북이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호기심은, 결국 자신들의 존재를 인간 에이프릴(아요 에데비리)에게 드러내게 만든다. 마침 학생 기자 일을 하고 있던 에이프릴은 특종을 잡았다는 생각에 거북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리뷰] ‘닌자터틀: 뮤턴트 대소동’, 너무 순하게 리부트 된 식은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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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가을 대구. 어린 동준(홍사빈)과 강현(신주협)은 길을 걸으며 꿈에 관해 이야기한다. 강현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 대구를 탈출하는 것이 꿈이고, 동준은 ‘다른 우주에 있는 또 다른 나’가 되는 것이 꿈이다. 강현은 동준의 수학 과외 선생이자 유일한 친구인 동네 형이다. 그는 동준에게 동경의 대상이다. 그의 뛰어난 두뇌와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음악적, 문학적 취향은 동준을 매료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현의 엄마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충격을 받아 자살한다. 이에 화가 난 강현은 아버지의 차를 부수기 시작한다. 자신의 영웅이 추락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동준도 충격에 휩싸인다. 시간이 흐른 2020년의 가을, 대구. 어른이 된 동준(심희섭)은 학교 선생이 됐다. 그는 게이바 앞에서 제자를 마주치고 당황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더불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버릇이 된 동준은 고향 대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점차 망가지고 있었다.
<안녕, 내일 또 만나>
[리뷰] ‘안녕, 내일 또 만나’, 세 개의 시공간 속에서 그들은 다시 나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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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캘리그래피 쓰기
글자로 아름답게 쓰는 일을 좋아한다. 캘리그래피를 한 이후로 작품을 할 때 타이포를 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됐다. <마스크걸>은 ‘걸’의 ‘ㄹ’이 넷플릭스의 N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더라. 이런 디자인적 요소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콩물
어려서부터 엄마가 절기마다 음식을 꼭 챙겨주셨다. 대보름에는 오곡밥에 나물을, 동짓날에는 팥죽에 새알심을 빚으셨다. 여름에는 단연 콩물. 직접 콩을 삶고 갈아서 설탕 듬뿍 넣고 우무채 썰어 넣어 얼음 동동 띄운 맛이란! 이제는 이걸 손수 해먹는 게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잘 알지만.
조조영화
리스트에 영화를 한편 추천하고 싶지만, 그보다 더 나를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침 일찍 보는 조조영화다. 아이를 등교시킨 후 아침 일찍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
[LIST] 염혜란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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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변호사 판이던 드라마에 초능력자들이 출몰하는 요즈음이다. 생업과 악귀 소탕을 겸하는 tvN <경이로운 소문>이 새 시즌으로 돌아왔고, 디즈니+ <무빙>은 음지의 공무원으로 일하던 능력자들이 다음 세대를 지키려 골목의 자영업자로 살아간다. tvN <소용없어 거짓말>에서 거짓을 판독하는 주인공의 능력은 뱃속 아이에게 먹고 살 재주를 내려주시되 돈 많이 드는 예체능 계열은 피하게 해달라는 엄마의 기원으로 인한 것이었다. 특수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과 접점을 만드는 데 생계의 구체화는 유용하고 JTBC <힙하게> 역시 그렇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반려 동물 진료가 늘어나리라 기대했던 수의사 봉예분(한지민)은 개발은 소문뿐인 충청도 무진에서 ‘소, 돼지 전문’ 전단지를 돌리고 광어양식장으로 출장도 간다. 예분의 능력은 출산을 앞둔 소금실이의 엉덩이를 살피다 축사에 유성우가 떨어지며 생겨났다. 예분은 손으로 엉덩이를 만지면 대상의 기억을 볼 수 있
[유선주의 드라마톡] ‘힙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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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것처럼>
웨이브, 왓챠 ▶▶▶▶▶
한때 인간의 고유한 역량으로 간주됐던 인지작용은 이제 우리를 둘러싼 사물과 기기의 자동화된 역학으로까지 분산됐다. 동시대 감독들이 현실의 재현을 회피하는 이유는 인간화된 주체의 의지와 욕망을 토대로 경험의 형식을 구조화하는 관습적 극작술이 그런 시대를 담는 데 불충분한 도구이기 때문일 테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그런 한계를 일찍이 돌파했다는 점에서 재평가가 시급한 걸작이다. 핸드폰, 자동차, 전자레인지 등 온갖 사물이 빚는 시청각적 물성이 영화적 현실의 지분을 당당히 점유하는 이 작품에, 상실된 2010년대의 시공이 근사하게 구현돼 있다.
<우리도 사랑일까>
웨이브, 왓챠, 티빙 ▶▶▶▶
좀더 어렸을 때엔 엉뚱한 몸짓과 괴상한 수다로 가득한 <우리도 사랑일까>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 까닭 모를 기호들이 사랑이라는 사건의 본질
[OTT 추천작] ‘사랑에 빠진 것처럼’ ‘우리도 사랑일까’ ‘일본 곤충기’ ‘노스탤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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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 감독 마크 잡스트, 팀 서덤, 에마 설리번, 조지프 쿠보타 블라디카 / 각본 맷 오언스, 스티븐 마에다 / 출연 이냐키 고도이, 아라타 맛켄유, 에밀리 러드 / 플레이지수 ▶▶▶
<원피스>의 실사화는 반가운 뉴스지만 전적으로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원피스>는 만화적 기호를 다루는 비상한 유머 감각에도 불구하고 종종 사실적 세계를 비추던 20세기 영화사의 기억을 내보였기 때문이다. 가령 주인공 루피의 여정은 서부극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반영한다. 주인공이 마을 공동체를 지킨다는 소명을 간직한 여타 소년 만화와 달리 처음부터 마을을 떠나는 루피는 뿌리내린 공동체를 수호하겠다는 자의식이 없으며, 그렇기에 부담스러운 도덕적 장광설도 내뱉지 않는다. 악당이 주인공의 마을을 찾아오는 소년 만화의 관습과 달리 루피는 고유한 질감과 개성을 갖춘 여러 장소를 직접 방문하며, 해적인데도 해적 사냥꾼, 해적을 혐오하는 도둑과 임의적인 동료의식을 빚는다. 이는
[OTT 리뷰]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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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낙원 생츄어리 시티에 사는 주머니쥐 케리(박시윤)는 야생의 삶을 동경한다. 특히 케리가 꿈꾸는 것은 생츄어리 시티에 없는 겨울이다. 언니 페트라(최정현)의 눈엔 이런 케리가 철없기만 하다. 한편 생츄어리 시티의 어린 동물들은 목도리도마뱀 야라의 주재하에 매년 마법의 소원 나무에 소원을 빌 수 있다. 소원 성취가 절실한 나머지 케리는 이날의 금기를 어기고, 생츄어리 시티엔 영원한 겨울이 닥친다. 마법의 소원 나무마저 동사 위기에 처하자 케리는 야라, 페트라와 함께 생츄어리 시티를 되살리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멸종 위기 야생 동물 보호구역 생츄어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이국의 동물에 관심이 많은 어린이들을 위한 좋은 교재가 될 법하다. 애니메이션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낯선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물들이 대거 등장해 그들의 생물적 특징이 서사를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종이나 서식 환경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존재를 분리해 배격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다름을 받아들
[리뷰] ‘생츄어리: 마법의 소원나무’, 어린이들이 반길 오스트레일리아 야생동물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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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2 남학생 미야노(사이토 소우마)는 한겨울에 밖에 있어도 춥지 않다. 연인 사사키(시라이 유스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는 한 학년 위 동성 선배였던 사사키를 동경하던 시절과 사사키에게 사귀자는 말을 들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자주 만나지만 둘에게 관계의 변화가 찾아올 거라는 걸 잘 안다. 대학 입시를 치르고 있는 사사키가 곧 졸업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온 신경이 쏠린 10대 소년의 감정이 얼마나 시시각각 요동치는지를 은은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보고 싶었다는 선배의 말 한마디, 앞머리를 넘겨주는 선배의 손동작 하나에도 반응하는 미야노의 표정 작화가 돋보인다. 많은 양의 꽃과 도형이 화면을 떠다니는 효과로 서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멋쩍은 상황에 순정 만화 그림체의 주인공들을 앙증맞은 캐릭터로 변모시켜 귀여운 악센트를 준다. 둘만의 완전한 러브 스토리일 줄만 알았던 영화는 미야노의 존재를 알고 충격받는 사사키의 누나를 등장시켜 예
[리뷰] ‘극장판 사사키와 미야노-졸업편’, 사랑에 빠지면 상대의 손동작 하나도 큰 의미가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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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창가쪽 맨 뒷자리에 앉아 자고 있던 재수생 쉬유수(린이)는 눈이 번쩍 뜨이는 사건을 겪는다. 새로 온 여학생 린샹즈(조금맥)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다. 일단 친해지는 작전을 서툴게 펼치는 쉬유수를 보고 그의 단짝인 송샤오난(심월)과 장우(왕가휘)가 합세하지만 린샹즈는 꿈쩍하지 않는다. 사고 뒤 친구를 일주일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병이 생겼다는 린샹즈의 말을 듣고도 쉬유수는 그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일주일간 친구>는 동명의 유명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중국영화로 청춘 스타들이 주연을 맡아 주목받은 작품이다. 4명의 남녀 학생이 가까스로 친구가 되는 과정을 담은 전반부는 내내 창창한 날씨와 경쾌한 배경음악에서 알 수 있듯 발랄한 톤으로 그려진다. 교실, 아지트, 옥상, 수영장 등 교내 곳곳을 누비며 우정과 사랑이 싹트는 순간을 포착한다. 영화는 중반부에 반전을 심어 분위기를 빠르게 전환한다. 린샹즈로 무게중심을 옮겨 그의 과거를 펼쳐 보인 뒤 다시 시
[리뷰] ‘일주일간 친구’, 발랄하게 시작해 한층 깊고 짙은 우정의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