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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로르 칼라미)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시종 따스한 마음으로 다른 이의 고통과 슬픔을 바라보고 보듬는 평범한 이웃이다. 그런 애니에게는 16살 난 딸과 9살 된 아들,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 매트리스 공장에서 퇴근한 뒤 찾아간 한적한 서점 뒤편 공간에 여인들이 하나둘 모이면 그제야 비로소 이들이 무엇을 위해 한자리에 서로 마주 앉아 있는지 알게 된다. 임신 중지가 불법인 프랑스에서 저마다의 사연으로 서점을 찾아온 이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임신 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 단체인 MLAC 소속이다. 더이상 출산을 원치 않았던 애니는 MLAC의 도움을 받은 후, 또 다른 여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한다.
임신 중지를 다루지만 <앵그리 애니>는 크리스티안 문주식의 냉담한 고발과도 스크린 위에 펼쳐진 아니 에르노의 충격적 자기 고백과도 다르다. 적나라한 현실로 침묵하고 숙연하게 만드는 대신, 일련의 사태처럼 반복되는 개인사와 공동체적 연대가
[리뷰] ‘앵그리 애니’, 연대가 잉태하게 한 것과 소명의식의 태동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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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에(아이나 디 엔드)는 길거리 버스킹 가수다. 노래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이는 그이지만, 일상에선 거의 말을 꺼내지 못하는 상태다. 이유는 과거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재난으로 가족을 잃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온 키리에는 타인과의 관계, 삶의 안정성, 현실적인 경제력 면에서 모두 문제를 겪고 있다. 그렇게 길에서 노래를 부르던 키리에 앞에 잇코(히로세 스즈)가 나타나 그의 매니저를 자처한다. 잇코는 가정에서 받은 상처 때문인지 홀로 살아가며 위태위태한 범죄를 일삼고 있다. 키리에와 잇코는 고등학생 때부터 알던 사이다. 잇코의 입시 과외 선생이었던 나츠히코(마쓰무라 호쿠토)가 키리에 언니의 약혼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재해로 약혼자를 잃은 나츠히코 역시 안정적이었던 삶의 환경을 뒤로 한 채 방황 중이다. 그렇게 영화는 동일본 대지진 후 약 10년이 흐른 지금, 재난 이후 현실에 부유하듯 살아오던 세 젊은이의 시간을 반추한다.
<러브레터>
[리뷰] '키리에의 노래', 구체적인 역사에 기반할 때 이와이 슌지의 매력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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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잡한 파티장에서 콜(아리 매카시)이 애타게 동생 더켓(소니 존슨)을 찾는다. 후미진 방구석에서 더켓을 찾은 콜은 황급히 동생을 데리고 나가지만 무언가에 씐 듯한 더켓은 흉기로 형을 공격하고 자신은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의문의 공포가 지나간 후 어딘가 울적해 보이는 미아(소피 와일드)가 등장한다. 어머니를 여읜 미아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크기만큼 아버지와 소원하다. 가정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는 미아는 친구 제이드(알렉산드라 젠슨)의 집에 주로 머문다. 제이드의 동생 라일리(조 버드)의 픽업을 대신할 정도로 가족 같은 사이가 된 미아는, 어느 파티장에서 숏폼 챌린지를 경험한다. 이 챌린지는 악령을 소환하는 주문인 “내게 말해”(Talk to Me)를 외치며 시작한다. 이후 “널 들여보낸다”라고 주문을 외면 90초간 짧은 빙의를 경험할 수 있다. 미아를 포함한 또래 친구들 모두는 이 경험에 중독돼 쾌락을 느끼고, 급기야 어린 라일리까지 이 챌린지에 도전하게 된다. 이때 라일리의
[리뷰] ‘톡 투 미’, “짧아야 본다”는 작금의 관람 문화를 적극 반영한 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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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뮤지션이 공연장이 아닌 극장에 모여 노래한다. 1935년 개관해 88년간 지역민들의 문화생활을 책임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광주극장이 그 무대다. 이들은 제각기 노래하고 연주하기 위해 버텨내고 존재한 예술가들이면서, 멀티플렉스 시대에 가능한 한 오래 버텨내고 존재한 극장을 사랑하는 관객이기도 하다.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은 이동과 만남이 어려워진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소수의 뮤지션들을 자신의 고향 극장에 초대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는 원풍경을 서서히 잃어가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회고를 더하면서 뮤지션들의 노래가 서로 꼬리를 물도록 공연의 세심한 배치와 연출을 시도한다.
영화관을 비롯한 모든 사라지는 장소에 대한 희미한 서글픔을 담고 있는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말 대신 노래를 언어로 택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공감각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극장 매표소 앞, 층계, 복도, 상영관 안, 영사실, 건물 담벼락 등 극장 곳곳을 배회하는 카메라를 따라가면서, 그곳에서
[리뷰] ‘버텨내고 존재하기’, 사라질 장소를 위무하는 음악, 유순히 뒤따르는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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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비 내리는 어느 날, 삼례 우리슈퍼에서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10대 소년 세명이 강도 살인 혐의로 기소된다. 영화는 2016년으로 무대를 옮겨 섬으로만 발령을 받다가 정년 2년을 남겨놓고 전주시로 발령난 황준철 형사(설경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때 ‘미친 개’라고 불렸던 그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술을 준비했다며 너스레도 떠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30년 근속했지만 15년 넘게 진급을 하지 못한 상태. 하지만 현재 전북경찰청 경무관이 된 최우성(유준상)의 이름이 나오면 그는 여전히 권력에 굽히지 못하고 냉정해진다. 두 사람의 악연은 아직 황준철이 “한번 문 것은 절대로 놓지 않는 미친 개”라 불리던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라북도에서 검거 성과 톱3에 들던 황준철은 완주경찰서로 발령받는다. 그런 그에게 이미 살인 내용을 자백해 감옥에 수감된 소년들이 진범이 아니고 진짜 할머니를 죽인 사람은 따로 있다는 제보 전화가 들어온다. 사람을
[리뷰] ‘소년들’, 미스테리 해결에서 나아가 약자들을 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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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일본 나고야에서 먹은 상어 심장 회
나고야 선술집에서 모듬회를 시켰는데, 상어 심장 회가 나왔다. 맛은 물론 식감도 기가 막혔다. 시식 후 일본 야후를 검색해보니 열도 내에서도 귀한 음식이란 걸 알게 됐다.
김혼비 작가
요즘 가장 즐겁게 읽고 있는 책들은 전부 김혼비 작가에게서 탄생했다. 김혼비 작가를 미국식으로 표현하면 ‘유머리스트’일 것이다. 빌 브라이슨이나 데이비드 세다리스를 떠오르게 하는, 유쾌함과 깊이를 동시에 갖춘 작가다. 게다가 취향도 확실하고 웃음의 패턴도 굉장히 치밀하다. 마침 김혼비 작가도 나의 팬이라고 들어 11월 중 북 토크 행사를 함께하기로 했다.
딸들과의 수다
첫째가 중1이 됐다. 중학생만 해도 학교에 다녀오면 사랑 이야기, 친구 이야기 등 에피소드가 시트콤처럼 쏟아진다. 첫째가 미주알고주알
[LIST] 이적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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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소리>의 이길보라 감독은 동명의 저서에서 청각장애인에 대한 오해를 갖게 하는 TV드라마의 뻔한 설정을 짚은 적이 있다. 요약하면, 불의의 사고로 청력을 잃은 인물이 상대의 입술 모양을 읽는 구화 훈련으로 청인과 다를 바 없어지고, 그에게 일어나는 기적이란 청력이 돌아와 다시 청인이 되는 식이었다. 이처럼 역경의 극복과 해피엔딩의 실마리를 청력의 상실과 회복에서 찾는 이야기는 수어로 소통하는 농인과 시각언어 중심의 세계를 불완전하고 불행한 자리에 두곤 했다.
농인 부모에게서 자란 청인 자녀인 ‘코다’ 소년이 주인공인 진수완 작가의 tvN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은 어떨까? 농인인 가족과 청인의 세상을 통역하던 어른스러운 모범생 은결(려운)은 기타로 세상에 말을 거는 기쁨과 밴드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부모에게 이해시키지 못해 갈등한다. 이상한 악기점을 통해 1995년으로 타임슬립한 은결은 18살 동갑내기 아빠 이찬(최현욱)이 청력을
[유선주의 드라마톡] ‘반짝이는 워터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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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컴>
넷플릭스 ▶▶▶▷
최고의 축구 선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할지 모르겠지만, 최고의 스타 축구 선수는 의심할 여지없이 데이비드 베컴이 맞다. 반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베컴>은 ‘스타’라는 수식어에 가려진 베컴의 축구 선수로서의 면모에 주목한다. 고향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시작해 최고 축구 클럽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이적과 함께 할리우드를 뜨겁게 달궜던 LA 갤럭시행까지. 베컴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연대기순으로 정직하게 담은 이 다큐는 종종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현재의 베컴의 정면 얼굴을 보여준다. 세상의 지나친 관심과 압박에서 살아남은 한 인간의 강인한 얼굴이다.
<시크릿 인베이전>
디즈니+ ▶▶▶▷
어벤져스의 주요 멤버들이 상당수 세상을 떠났음에도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어벤져스의 설립자 닉 퓨리다. <시크릿 인베이전>은 늘 쿠키 영상에서만 얼굴을 비추던 그를 전면에 내세운다. 모습을 감춘 채
[OTT 추천작] ‘베컴’ ‘시크릿 인베이전’ ‘레밍 인 더 가든’ ‘더 딥 블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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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 연출 저스틴 벤슨, 에런 무어헤드 등 / 각본 에린 마틴 등/ 출연 톰 히들스턴, 소피아 디 마티노, 오언 윌슨, 조너선 케 콴, 조너선 메이저스 / 플레이지수 ▶▶▶▷
로키(톰 히들스턴)는 시즌1의 끝에서 ‘계속 존재하는 자’(조너선 메이저스)로부터 시간 변동 관리국(TVA)의 기원과 멀티버스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무거운 진실은 다른 타임라인의 로키인 실비(소피아 디 마티노)와 로키간의 의견 충돌을 낳고, 그 결과 TVA는 무한히 생성되는 새로운 타임라인을 통제할 힘을 잃은 채 붕괴할 위기에 놓인다. 로키는 여전히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확신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지만 일단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TVA 요원인 모비우스(오언 윌슨)와 함께 기술자 우로보로스(조너선 케 콴)의 도움을 받아 시간 여행에 나선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운명은 정말로 로키에게 달려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로키는 <로키>를 통해 멀티버스 사가의 메
[OTT 리뷰] ‘로키’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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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똑똑, 똑똑. 한밤중에 술병을 잔뜩 든 치훈(서영주)이 미국 뉴저지의 한 가정집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고 나온 집주인은 치훈의 처남 문석(이순원)이다. 이미 한잔하고 있던 문석은 뜻밖의 술벗을 환대하고 두 남자는 취기에 옛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어릴 적 치훈이 엄마(강애심), 누나(김수진)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 세탁소를 차린 때부터 강도에게 엄마를 잃기까지의 가족사가 펼쳐지던 중 강도 사건의 내막이 흘러나오면서 이들 사이에 적막이 엄습한다.
올해 상반기 <리바운드>로 극장가에 감동과 희열을 전했던 장항준 감독이 미스터리 스릴러로 돌아왔다. <오픈 더 도어>는 명랑한 창작자의 진지한 영화적 실험의 결과물이다. 71분의 러닝타임을 5개의 챕터로 쪼개 문을 열고 들어간다는 제목의 의미를 형식적으로 강조하고 현재에서 6시간 전,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일그러진 가족의 발원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스릴러로서 서스펜스를 적절히 구사하지는 못한
[리뷰] ‘오픈 더 도어’, 명랑한 창작자의 진지한 영화적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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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미국 오클라호마주, 아메리카 원주민인 오세이지족의 영토에서 석유가 솟아오른다. 오세이지족은 단번에 세계 제일의 부자 집단이 되지만, 돈이 있는 곳엔 비극도 따르기 마련이다. 1920년대 들어 오세이지족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흑막엔 바로 지역 유지로서 막강한 자본 권력을 쥐고 있는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니로)이 있다. 그리고 그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조카 어니스트 버크하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막대한 부를 지닌 오세이지족의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턴)와 결혼한다. 킹 헤일이 주창하는 가족, 신실함의 가치는 돈과 탐욕으로 검게 물들어 어니스트 부부를 잠식한다.
80대의 감독이 가장 젊은 영화를 내놓았다.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는 지금의 미국, 혹은 전세계가 앓고 있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20세기 초 미국의 실화에서 찾는다. 서부 시대 미국을 참회하며 동시대를 읽는 영화는 많았지만 스코세이지의 강점은 언제나 캐릭터의 직조에 있다. 어니스트는
[리뷰] ‘플라워 킬링 문’, 지구 반대편에서도 묻는다. 지금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